고구려의 관등 중에서 서열 2위는 태대형이고, 일반적으로는 막리지라는 관명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태대형과 막리지의 관계는 어떠한가. 단지 막리지는 태대형의 별칭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막리지도 결국 관등명인 것이다. 일단 태대형과 막리지가 등장하는 기록들을 살펴보겠다.
次曰太大兄. 比[正]二品. 一名莫何何羅支. <한원>
其武官曰大模達. 比衞將軍. 一名莫何邏繡支. <한원>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삼국사기>
高藏及男建遣太大兄男産將首領九十八人, 持帛幡出降, 且請入朝, 勣以禮延接. <구당서>
任莫離支兼授三軍大將軍卅二加太莫離支摠錄軍國阿衡元首 <남생묘지명>
特進太大兄如故平壤道行軍大摠管兼使持節按撫大使 <남생묘지명>
廿三遷位頭大兄累遷中軍主活卅爲太大莫離支 <남산묘지명>
한원은 태대형을 정이품이라고 소개하며 막하하라지라고도 한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막하하라지는 막리지이다. 그렇다면 막리지는 태대형의 별칭인가. 별칭이라면 달리 호칭하는 법칙이나 경우가 있을 것이다. 특히 삼국사기나 묘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양자가 동시에 쓰이는 것을 보아서는 변경 또는 대체된 것이 아니라 상존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남생묘지명이다. 삼국사기나 구당서 등은 다른 사람과 다른 시기에 태대형과 막리지가 혼용되었지만, 남생묘지명에서는 동일인에게 혼용하고 있다. 이것은 태대형과 막리지가 쓰임새가 달랐다는 것을 말한다.
남생이 당에 투항했을 당시 받은 관작을 분석해보면, 특진과 태대형은 정2품으로서 관등을 말하고 평양도행군대총관과 안무대사는 관직명이다. 그런데 앞서 태막리지와 삼군대장군을 지낸 남생을 예전과 같이 태대형에 임명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록에는 없지만 연개소문과 남산 등이 태대대로나 태대막리지를 지냈다면, 남생도 항복 직전에는 1품 대대로까지 올랐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태대대로, 대대로, 태(대)막리지 보다 하위 관등인 태대형에 임명하면서 예전과 같다고 함은 모순이다.
한편 형식상 남생묘지명에서 관작을 겸한다고 할 때에는 관직과 관직을 겸하는 것으로 기록하지 관등과 관직을 겸하는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군대장군을 겸한 막리지 역시 관직명이 아닌가.
다시 한원을 살펴보면, 태대형의 별칭으로 기록한 막하하라지는 관직명인 대모달의 별칭인 막하라수지와 비슷하다. 관명을 莫何-支의 형태로 작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 나라의 무엇’과 같이 관명을 만드는 식이다. 그렇다면 결국 막하하라지는 막하라수지와 같이 관직명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중국사서가 고구려의 관명에 관하여 절대적으로 정확한 서열과 의미를 기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별칭과 같이 관등에 부기한 관명 중에는 상당수가 관등이 아닌 관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신라에 비교할 만한 것이 있다. 신라 관등 서열 1위는 각간인데, 김유신이 각간에 오른 이후 백제를 정벌하고 대각간에, 고구려를 정벌하고 태대각간에 오른다. 당시 각간만 해도 수명이며, 더 이상 오를 지위가 없는 김유신 등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등이다. 만약 태(대)막리지가 관등이고 신라와 같은 이유로 설치한 것이라면, 서열2위인 막리지를 올릴 것이 아니라 대대로에 오른 후에 태대대로 등의 관위를 부여받는 것이 맞다. 따라서 태(대)막리지는 장군-대장군, 사마-대사마 등과 같은 의미의 관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고자묘지명이다. 고자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曾祖式本蕃任二品莫離支 ’ 라고 하여 막리지를 관등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고자묘지명과 남생묘지명은 동일한 종류의 사료로서 정확성의 우열을 가릴 수 없고, 오히려 남생묘지명이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적고 있는 바, 고자묘지명은 단지 혼용하여 사용한 것일 뿐 남생묘지명에 주목하여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더욱이 태대형과 막리지는 혼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삼국사기와 남생묘지명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명백히 관등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태대형을 적고 있다.
정리하자면 막리지의 쓰임새를 본다면 태대형의 별칭이 아닌 태대형의 고유 보직인 관직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태대형 고연무는 대장군직을 맡은 것이고, 태대형 남산은 태대막리지를 맡았으며, 태대형 남생도 태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을 맡았으며 당에 투항한 이후에 태대형과 동일한 정2품 특진으로서 대총관과 안무대사를 맡았던 것이다. 추측하건대 막리지를 항상 태대형으로 보했기 때문에 중국측에서 혼용하여 기록했던것 같다.
첫댓글 처음엔 막리지를 관등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차츰 관직명으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예전에 써 놓았던 글인데, 아래서 관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올려보았습니다. 김용만선생님께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간략하게나마 지적을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고구려의 관등관직에 관하여 별로 아는 게 없어 나 자신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일본의 末松保和는 막리지=대대로=태대대로 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설을 요약하여 카페에 올리겠습니다. 참고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고구려 황제의 근시직 으로서 중리직이 있는데 남생 남산 묘지명에는 모두 중리 소형 중리대형 중리 대활 중리 위두대형등의 순으로 승진한기록이 나오며 이같은 중리직 최고관직으로 막리지가 있고 막리지는 2품 태대형 관등에 있는자가
임명되었다는 설이 참조되어야 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