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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와 함께 일상 숨쉬기[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1] 조민아
승인 2013.09.13 13:47:46
일상과 신비를 화두로 생각을 나누어 달라고 편집국장님이 제게 청하셨을 때, 부족하지만 시작해 보겠노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막상 이 단어들을 가슴에서 꺼내어 글을 쓰고 사이버 공간에 투척할 생각을 하니, 일기장을 낯선 이들에게 열어 보이듯 쑥스러움과 우려가 앞섭니다. 아직 덜 익은 생각들이 혹시 여러 님들의 마음에 미혹을 더하진 않을지, 또 그것들이 제 안에 품었던 것과는 영 다른 의미의 옷을 입고 어딘가를 배회하며 오해를 사거나 하진 않을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합니다. 글쓰기가 아니라면, 또 내어 주신 이 작은 공간이 아니라면 아마도 소설가 신경숙 님의 글처럼 “태어남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소멸을,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해체되어 버리는 것이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들을” 어설프나마 손을 뻗쳐 건드려 보고 만져 보고 그려 볼 욕심조차 내어 보지 못했겠지요(신경숙,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서).
노동을 보상해 주는 것은 오로지 아득한 언어의 바다에서 반짝이는 심상(心象) 하나 건져 올리는 찰나의 기쁨뿐입니다. 은빛 비늘 펄떡이는 고기와도 같은 그 심상은 그러나 또 수면에 떠오르자마자 가뭇없이 빛을 잃고 말지요. 참으로 글쟁이들의 환희(ecstasy)는 “태어남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소멸”이며,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해체되어 버리는 것”이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입니다. 섬광처럼 강렬하지만 공기처럼 가볍고, 터질 듯한 기쁨인 동시에 가눌 길 없는 슬픔입니다. 알 수도 잡을 수도 간직할 수도 없는 그 ‘환희’때문에 축복일지 천형일지 모르는 삶을 사는 이들은 하지만 글쟁이들뿐만이 아닙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가 사랑에 대해 나눈 아름다운 대화를 담고 있는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 ‘환희’를 “미칠 듯한 갈망,” 혹은 “신이 부여한 광기”라고 표현하면서 네 가지 영역을 통해 주로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예언, 치유, 시, 그리고 사랑이죠. 말하자면, 강정마을에서 대한문에서 또 어딘가에서 피와 눈물로 정의를 호소하고 있는 이 땅의 예언자들, 집 앞을 떠도는 길고양이 한 마리 불쌍히 여겨 밥 한 그릇 놓아주는 보살핌의 손길들, 노래와 글과 그림 혹은 춤에 기꺼이 삶을 바치는 ‘딴따라’들, 그리고 부끄럽고 애틋한 마음 그대에게 어찌 전할까 밤을 새우는 연인들, 이들은 모두 어찌할 수 없는 갈망에 사로 잡혀 ‘나’를 내어 주고 축복일지 천형일지 모를 환희에 몸과 혼을 맡기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아니, 이런 벅찬 갈망과 미칠듯한 환희를 적어도 한 번쯤은 맛보았을 우리 모두는, 그 찰나의 환희가 얼마나 격렬한 생기로 일상을 살아 있게 하는지 기억합니다. 이렇게 뜨겁게 갈망하고 환희에 몸을 떠는 것을 플라톤은 ‘신비 체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이미 신비를 체험했거나 체험하며 살고 있는 ‘신비가’(the mystic)인 것입니다. 예언, 치유, 시, 사랑 이 네 가지 영역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은 ‘나’라는 찰라생사(刹那生死)를 벗어나 보살행(菩薩行)을 살아 보려는 몸부림입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 빠르고 편하고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것들을 강요하는 세상에 익숙한 ‘나’를 과감히 떨치고, 느리고 불편하고 어쩌면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에게 내 마음을 내어 주는 행위들입니다. 받아 줄지 모르는 특정의 혹은 불특정한 ‘너’를 향해 ‘나’를 던지는 이 안타까운 몸짓들을 통해 우리는 신비를 맛봅니다. 신비는 일상 속에 있습니다. 아니 일상 자체가 신비입니다. 우리는 모두, 알 수도 잡을 수도 간직할 수도 없는 그 신비가 마치 네루다의 시편인 ‘시’(詩에서처럼 “얼굴도 없이 거기에 지키고 섰다가”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 가슴을 멋대로 뛰게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가 손짓할 때 잠시 멈추고 눈을 맞출 만큼 여린 가슴 안고 살아가는지요? 앞으로 격주로 찾아뵙게 될 이 공간에서 저는 가슴에 두껍게 내려앉은 세상의 더께를 거두고, 연하고 순한 마음의 속살을 회복시키는 여정을 여러분과 함께 떠나려 합니다. 어느 수피 수도승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가 들이 쉰 어느 숨결이 신의 숨결에 닿아 있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하고 탄식 같은 고백을 하게 되길 바라면서요.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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