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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아모 7,10-17
복 음 : 마태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한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이 실험했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서 첫 번째 그룹은
‘일을 좋아한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의 긍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허풍이 심하다.’, ‘거만하다’ 등의 부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문장들을 다 외웠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만 들어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시하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평가하게 했습니다.
긍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긍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가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를 손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는 신부 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아마 늘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신부를 대부분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쳐 달라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다른 것을 보십니다.
바로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중풍 병자이지만,
예수님만은 고쳐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뿐인데도 이를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긍정적으로 보시고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병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과 정반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이 자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이지요.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을 가지고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확대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가져왔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믿음 없는 자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지요.
그래서 이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확실한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계속하면, 주님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계속된 의심과 불평불만만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몸소 행하시면서
하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시고
‘메시아’로서 당신의 정체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늘 나라의 구원과 기쁨을 이 땅에 실현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질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졌고
(레위 26,16; 신명 28,22.35 참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었기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마음속으로 단죄합니다.
이에 그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와 치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운지 물으십니다.
사실 가치론적으로 본다면
육체의 치유가 죄의 용서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신 다음,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시니,
그가 치유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를 본 군중은 몹시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복음서에서 들려주는 이 같은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신 기적 사건으로
우리는 죄와 질병, 고통과 죽음까지도 모두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며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애야, 고생 많았다. 그 모진 세월 견디고 기다리느라 애썼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평상에 뉘어’라는 표현을 통해 중풍 병자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잘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웬만한 중풍 병자들은 힘겹지만, 안간힘을 다해 홀로 걷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병자는 병세가
깊을 데로 깊어진 말기 중풍 환자였음이 확실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고장 나고
AS를 받으러 부지런히 병원을 다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초기 증세라든지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으면 대체로 스스로의 힘으로,
아니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가는데,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병자의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워 보입니다.
중증 중풍 병자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보통의 사람들은 기상 알람이 울리면 힘겹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기상 알람이 울려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워서 떡 먹기인 화장실 한번 가는 것이 세상 어렵습니다.
세수를 할 수 있나, 샤워를 할 수 있나?
매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도움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도우미의 짜증이 하늘을 찌릅니다.
누군가가 밥 한 숟갈이라도 떠먹여 주면 감지덕지한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쫄쫄 굶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어
백방으로 노력해 보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런 중풍 병자가 기적적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습니다.
측은지심의 주님께서 세상 가련한 그를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눈여겨보시며 격려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오 복음 9장 2절)
이어서 놀라운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일어나 내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오 복음 9장 6절)
우리도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중증 중풍 병자 못지않은 심각한 고통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앞에 서게 됩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그물에 걸린 가련한 한 마리 물고기처럼
참혹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벽 앞에 서게 됩니다.
다 때려 치고 싶은 순간, 모두 포기하고 싶은 순간...
그러나 결코 때려 치거나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의 시계는 우리 인간의 시계보다 훨씬 더디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충분히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기적처럼 따스한 예수님의 손길이 내 혹독했던 삶을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상 따뜻한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애야, 고생 많았다. 그 모진 세월 견디고 기다리느라 애썼다.
이제 고생 끝이니 안심하거라. 이제 나와 함께 새 삶을 한번 멋지게 살아보자꾸나.”
하느님 중심의 삶
-믿음, 회개, 용서, 영적건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엊그제 “믿음의 청송(靑松;푸른솔)”이란 강론 제목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전 유명한 ‘고건’(1938-) 총리의 부친이 저명한 청송 고형곤(1906-2004) 철학자였습니다.
청송(靑松) 푸른솔과 같은 호인가 했더니 “청송(聽松;듣는 솔)” 참 특이한 호였습니다.
전에 읽을 때는 못 봤다가 지금서야 발견했습니다.
침묵의 듣는 소나무,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한다 싶었습니다.
청송 선생에 대한 마지막 일화와 미리 써놨다는 비문을 소개합니다.
-“나 죽거든 슬퍼하지 말고 묘 앞에서 한번 흐드러지게 놀아라.”
자주 북한강 건너 강가 음식점에 갈 때면 말씀하셨고,
“용마 타고 왔다가 철마 타고 간다.”가 마지막 말씀이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연잎에 구르는 아침이슬 같이 청명淸明하게 산 청송은 이렇게 떠났다.
청송이 쓰게 한 비문을 우리말로 옮겨 본다.
“산은 첩첩하고 물은 겹겹으로 갈 길을 막는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고?
산비둘기 한 번 울고 석양 바람에 날아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강산이 적막하다.
나머지 일은 말하지 마라.
천지는 현황玄黃하고
우주는 홍황洪荒하다”-(청송의 생애와 선철학210쪽;소광희)
흡사 크게 깨달은 고승의 열반송涅槃頌같은 비문과 생애 마지막 모습도
참 인상적이라 오래전 읽은 내용이지만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늘서야 발견한 푸른솔 “청송靑松”이 아닌
침묵의 듣는 솔이란 “청송聽松”의 호가 더욱 마음에 끌립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제1독서 아모스서의 아모스와 아마츠야의 대조가 흡사합니다.
진짜와 가짜의 삶, 하느님 중심의 삶과 자기중심의 삶,
지혜의 삶과 무지의 삶, 온전한 삶과 병든 삶의 대조 같습니다.
예수님과 아모스야 말로 영적건강의 온전한 삶의 모범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예전에 자주 인용했던 팬티 끈과 팬티 천의 예화와 더불어,
특히 요즘 영혼에 대해 강조한 경우가 생각납니다.
“속옷인 팬티는 끈만 튼튼하면 천은 낡고 떨어져도 끝까지 입을 수 있으나,
팬티 끈이 헐거워지거나 끊어지면 팬티 천이 아무리 새것이고 튼튼해도 입지 못한다.
팬티 끈이 영혼을 상징한다면 팬티 천은 육신이다.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지, 결코 육신에 영혼이 끌려가지 않도록 하라.
영혼 건강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영혼이 튼튼해야 육신도 영혼을 따른다.
우선 영혼이 건강해야. 멘탈이 강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영양식에 보약, 운동만으로는 건강을 확보하지 못한다.
영혼에 최고 보약이 무엇이겠는가! 사랑, 기쁨, 찬양, 감사. 평화. 희망이다.”
참 많이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때로 고백성사 보속으로는 말씀 처방전과 더불어
의식적으로 기쁨과 평화, 찬양과 감사, 사랑과 희망으로 충일한
오늘 하루를 지내라는 보속도 드리곤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드려다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중풍병자 치유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예수님의 삶인지 직관直觀할 수 있습니다.
다음 대목의 장면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래서 믿음 좋은 공동체 형제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주님이 보시는바. 주님이 감동하시는바 믿음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 덕분에 주님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물론 중풍병자도 믿음은 있었겠지만, 개인의 믿음은 약합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천국 입장도 개인 입장이 아닌 단체 입장입니다.
더불어 미사 시 영성체 예식 중 제 좋아하는 기도문도 생각납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2000년 전통의 교회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계승되는 믿음이요 믿음의 DNA입니다.
우선적으로 죄의 용서가 선행됩니다. 이미 이들의 믿음에는 회개가 전제됨을 봅니다.
이런 회개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심으로 영혼부터 치유하십니다.
몸과 마음은,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대부분 육신의 병은 영혼의 무질서와 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대로 자애로운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요즘 장마철에 자주 내리는 빗소리가 하늘 음성처럼 들립니다. 어제 써놨던 단상이 생각납니다.
“빗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참 좋다.
자연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 침묵과 조화된 소리다.
영혼에 평화와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어찌 이런 자연의 소리에 견줄 수 있겠는지요!
예수성심은 하느님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성심성월 마지막 날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 마음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대로 자애로우신 하느님 말씀입니다.
이어 율법학자들의 무지를 꾸짖으시며 결정적 육신의 치유를 이루십니다.
믿음으로 인한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입니다.
육신의 치유에 앞서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 치유의 고백성사가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흡사 오늘 복음이 미사 장면 같고 미사가 끝난 후 치유 받고 파견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군중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영혼의 상비常備 건강식健康食이자 약藥은 새삼 하느님 찬미와 찬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의 화답송 후렴과 오늘의 영성체송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영혼 건강에 주님 찬미와 찬양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온갖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1)
오늘 아모스 예언자의 무지와 불신의 아마츠야를 꾸짖는
거칠 것 없는 천의무봉한 모습은 얼마나 통쾌한지요!
그대로 아모스 예언자의 육성을 듣는 듯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나온 확신에 넘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나 아모스 예언자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난 분들입니다.
아모스의 성소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은
얼마나 자유자재自由自在하신 은총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목자이자 농부인 아모스가 주님께 붙잡혔듯이
저는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가 주님께 붙잡혀
수도원에 와서 살게 되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다시 살라 해도 이처럼 살 수뿐이 없겠다 생각이 듭니다.
영혼 건강이 우선입니다.
믿음의 회개와 더불어 용서받음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튼튼히 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쁨과 평화, 찬양과 감사.
사랑과 희망으로 충일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제일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영육을 건강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19,9). 아멘.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중풍 병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왔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이웃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절) 하신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들을 부르듯이 말씀하신다.
사지의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있는 그가 주님 앞으로 들려왔다.
그분의 자비로 우선 마음이 치유되면
그 육체는 곧바로 자기 침상을 들고 갈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얻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치유 받을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어서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4절)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따진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읽으시고
당신이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5절)
이것은 어떤 행위가 더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께서 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6절).
이 행위로써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병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찬양을 드렸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하늘로 돌아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병자의 치유행위는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혼과 육신의 마비를 모두 고쳐 주셨다.
영혼의 치유는 육신의 치유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주님께
우리 이웃도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오늘의 환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그들과 같이 우리 이웃의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중풍병자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음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생명과 활력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의 근원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견지망월)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모두는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만남을 위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과 사랑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하기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내가 죄인이라서 벌을 받는구나.
또는 내가 못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외부에서 오는 위기인지
아니면 연약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마음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시는 고을에서 중풍병자 일행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태 9,2)
어제, 그제에 이어 또 “믿음”의 이슈가 등장합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저마다 부족한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한 덕목이기 때문일 겁니다.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굳이 시간과 공을 들여 괜한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움직임과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이와 동행하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의 믿음을 알아보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위로와 희망을 주는 참으로 다정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첫 말씀에 먼저 반응한 건 환자가 아니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죄의 용서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능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신성모독으로 들렸을 겁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첫 말씀이 영의 원리에 기인하는 표현이었다면,
이 두 번째 말씀은 땅의 원리를 충족시키는 표현입니다.
매우 구체적이면서 실천적인 지시여서 달리 오해할 소지가 없이 명확합니다.
그리고 즉시 이루어집니다.
이 말씀의 실현에 대해 복음사가는
“그러자 그가 일어나 집으로 갔다.”(마태 9,7)고 전합니다.
고통을 겪는 환자 앞에서 예수님은 구구절절 율법학자들과 입씨름하느라,
또 당신을 변호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즉시 인간의 사고방식에 가장 익숙하고
무리 없는 표현으로 바꾸어 말씀해 주시지요.
어떻게 표현되었든 의미는 같습니다.
곧 “사람의 아들이 따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마태 9,6)을
일깨워주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현된다는 걸 증명하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사악의 번제라는 창세기의 유명한 대목입니다.
귀하게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데리고 지정해 주신 장소로 향합니다.
성경 저자는 아브라함의 움직임만을 서술할 뿐
그의 내면에 오가는 짐작 가능한 감정적 동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어,
독자인 우리로서는 각자 자기 삶을 투사해 이를 추측하고 읽어 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창세 22,6)
교부들은 자기를 태울 장작을 진 이사악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하는 아브라함을 인류구원을 위해
성자의 죽음을 허용하신 성부 하느님으로 보지요.
그런데 오늘 제게는 하느님께 순종해 길을 나선 아브라함이
단순히 성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성부인 동시에 성자라고 느껴지네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의 끝을 아시면서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에 스스로를 내어놓으신 것처럼,
아브라함도 자기의 생명이고 분신이고 미래인,
또 다른 자기라 할 수 있는 독자 이사악과 함께
아버지로서의 죽음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가는 중이니까요.
아브라함이 손에 쥔 “불과 칼”이 다가옵니다.
사람을 해칠 수도 있고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는 참 강렬한 도구들이지요.
그래서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고(탈출 3,2; 13,21; 19,18 외 다수 참조),
날카로운 칼은 “말씀”으로 연결됩니다.(히브 4,12 참조)
또 이 “불과 칼”은 창세기 원조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4)
여기서 “불칼”은 영원한 생명과 인간 사이의 철저한 단절을
유지 시키는 방벽이고 근접할 수 없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순명으로 이사악의 생명뿐 아니라 후손 대대로 민족의 생명을 보장받았듯이,
성자 예수님께서도 순명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불칼”이 거두어지게 하실 겁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칼과 불”이 숫양의 번제에 사용된 것처럼,
하느님 나라와 인간 사이를 가로막았던 “불칼”은
하느님 현존이 되고, 말씀이 되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뜨거운 사랑이 되어(아가 8,6-7 참조)
오히려 인간을 되살리고 행복하게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태 9,6)
예수님의 권한은 바로, 사랑의 자발적 순명에서, 사랑 때문에 떠안은 죽음에서,
인간을 위해 자신을 잊은 온전한 소멸에서 옵니다.
누구도 자기를 잊은 숭고한 죽음 앞에서
“네가 무슨 권리로....”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친히 죽음으로써 인간이 진 죄의 짐을 벗겨 주셨으니
우리로서는 감사하며 따를 뿐입니다.
삶의 질곡을 통과하는 동안 죄와 약함으로 인해
마비되고 굳어지고 쓸모없이 늘어져 버린 우리 영혼 구석구석에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속삭이시는
그분 음성에 즉시 일어나 따릅시다.
예수님 권한은 유통기간이 없습니다. 소멸 시효도 없습니다.
불칼이 영원한 생명 나무에 다다를 때까지 쭈욱 이어질
그분 권한에 기대어 부족한 나를 입고 그저 믿으면서 묵묵히 나아갑시다.
마치 오늘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이들처럼 말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