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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땅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제 1화 탈북민 수기 지한나 전도사 24, 1
그 누구의 삶인들 굴곡이 없고 편안하기만 했겠냐마는 과거를 떠올리고 그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마음을 힘들게 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나의 입을 열고 나의 삶을 들려주길 원한다. 바로 칠흑같이 어둡던, 절망뿐인 내 인생에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큰 축복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나는 1970년 5월에 농민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가난하지만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어린 시절 나는 사람을 치료하는 의술을 배우고 싶었다. 의학전문대에 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6년을 마치고 졸업하면서 대학 진학 시험도 치렀다.
이제 합격 통지서만 받으면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위로부터 지침이 내려왔다. 70 년대 생들은 모두 사회주의 농촌으로 나가야 한 다는 것이었다. 김일성, 김정일의 말 한마디면 없던 법도 생기는 것이 북한이었기에, 그렇게 나는 어디에 항의도 못하고 의학 공부의 꿈을 접어야 했다. 농장으로 나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수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이쁜 딸도 낳았다. 이렇게 가정을 꾸리살다 보니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리 가정에, 아니 북한 전역에 고난의 행군이 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덮치기 시작했다. 김일성 이 살아있을 당시에만 해도 배급이 꼬박꼬박 나오고 배곯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94년 7월, 신처럼 생각했던 김일성이 사망했고, 곧 이 어 모든 배급이 끊기고 말았다. 집에 있는 것들을 몽땅 내다 팔았지만 날이 갈수록 가계 경제는 악화하여 갔고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어찌저찌 버티고 살았지만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웠다웠다.
한 번은 어린 딸을 데리고 3일을 꼬박 굶었는데, 정신이 혼미하여 눈이 돌아가고 머리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그냥 앉아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몇몇 사람들이 강을 건너 중국에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소문에 따르면 중국에는 우리가 꿈도 못 꿀 쌀밥에 돼지고기를 집에서 키우는 개가 먹는다고 했다. 집 이 국경과 가까워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중국이 보이는데, 저 땅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다고 하니 굶는 입장에서 그 소식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암만 생각해도 현 상태로는 가족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었다. 나는 강을 건널 결심을 하고 딸과 애 아빠한테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했다. 우리 아버지는 원래 중국 사람이셨다. 어머니를 보고 반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따라 북조선으로 내려와 터전을 잡고 사셨던 것이었다. 그 덕분에 중국에 있다는 고모들 이야기도 들어왔고, 친척들의 연락처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친척 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중국행을 결심했다. 호기롭게 딸과 남편에게 중국행을 말했지만 정작 이를 실행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 생각하여 길을 나서는데 하필 비가 오는 날이었다.
이제 11살이 된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길을 나서는 나를 만났다. “엄마 가는가?” 이미 여러 차례 중국에 갔다 오겠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내가 중국에 가는 것을 알고 있던 딸이었다. “엄마, 우리를 아 이 버리는 거지?” 딸의 말이 가슴을 찔렀지만, 엄마가 너를 왜 버리겠냐고, 갔다가 꼭 돌아온다고 기다리라고 말하고 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나는 상당히 무모했다. 어떤 도움 없이 혼자서 강을 건넜는데 하필 나는 수영도 할 줄 몰랐다. 물이 그렇게 깊은 줄 모르고 어푸어푸 하다가 물을 한껏 먹고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깨어 일어나보니 내 몸뚱이가 중국 쪽 강변의 모래밭에 파묻혀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살아서 강을 건넌 것이다. 허겁지겁 전화기를 찾아 고모네 집으로 전화했고, 다행히 연락이 잘 이루어졌다. 놀란 고모들이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주셔서 기력을 회복하고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강가로 왔는데,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너무나 많이 불어있었다. 강을 건너다가 죽을 뻔했던 일이 엊그제인데 더 불어난 강물을 보니 선뜻 강에 뛰어들기 어려웠다. 그렇게 중국에 상당 기간 머물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중국에서 돈을 보내는 것이 북에 남은 가족들에게 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중국에 머물기로 결심을 했고, 한족을 만나 결혼해서 딸을 낳았다. 고향에 남아있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마음이 아프면서도 고향에 돈을 보낼 생각에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2007년 어느 날 밤...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공안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공안은 다짜고짜 나에게 “너 조선 사람 맞지?”라고 물어보았다. 아니라고 발뺌하고 일부러 중국인인 척 중국말로 떠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두 살 난 딸을 두고 결국 나는 붙잡혔고, 북송이 되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을 잡아서 북송시키려고 탈북자 한 사람당 100위안을 포상금으로 걸었다.
당시 내가 살던 마을에는 열 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있었는데, 포상금을 노린 사람에 의해 그들 대부분이 붙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를 신고한 사람은 중국 사람이 아닌 같은 탈북자였다. 현상금을 노리고 공안과 작당한 한 탈북자가 우리 모두를 신고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탈북자에게 고발을 당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딸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고향땅을 강제 북송 피해자로서 밟게 되었다.
북으로 넘겨지자마자 보위부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그 들은 잡아 온 사람들의 옷을 다 벗기고 검신을 한 다. 그들이 찾는 것은 몸 안 구석구석 숨겨져 있는 돈이었다. 여자들은 자신의 뱃속에 돈을 숨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아는 보위부에서 옷을 벗은 채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백 번씩 시켰고, 그러면 숨겨져 있는 것들이 다 몸 밖으로 나오곤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오지 않더라도 여자 수감자 들을 눕혀놓고 여자 보위부원들이 장갑을 낀 손으로 직접 속을 다 검사했다. 잡혀갈 당시 나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임신을 했으니 나를 검사 하진 않을 것 같아 아래쪽에 돈을 조금 숨겨 두었다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빼서 다시 잘 보관해 두었다..
검신 후에는 철저한 취조가 이루어졌다. 취조의 첫 질문은 “한국 드라마를 봤는지?”였고, 그 다음 이 “교회에 간 적이 있는가?”였다. 당시 나는 기독교나 성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교회도 출석 한 적이 없었다. 다만 한국 드라마나 방송 프로그램은 여럿 보았다. 어느 날 TV를 보다가 조선말을 쓰는 TV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분명 조선말을 쓰는 사람들이 상당히 멋있는 집에서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기가 어디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중국 가족에게 물었더니 대한민국이라고 하였다. 나는 대한민국이 어디인지 몰라 다시 물었다.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입니까?” 그리고 돌아온 대답을 믿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남조선이야.” 거짓말인 줄 알았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우기로는 남조선은 식민지에 집도 없고 판잣집에서 산다고 했는데, 사실은 이렇게 좋은 집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 당시 중국에서는 북한 엘리트와 김일성, 김정일의 사생활을 배경으로 하는 영상물이 돌고 있었다. “진달래꽃 필 때까지”1 라는 제목의 드라마였는데 나는 그 드라마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속고 살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1, 98년 1월 KBS2에서 방영된 8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 만수대 무용단 원 출신 탈북자 신영희가 1996년에 쓴 동명의 수필을 원작으로 했으며, 북한 기쁨조의 일상과 같은 북한 사회 내부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보위부 사람들은 끈질기게 내가 한국 드라마를 봤는지, 교회에 나갔는지를 물었지만 나는 그냥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앓기만 했다고 잡아뗐다. 그렇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한다며 각목으로 온몸을 때려 멍이 들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3일을 그렇게 맞고 나니 온 몸이 부어서 더 이상 맞아도 아프지 않았다. 내가 때려도 아파하지 않으니 나중에는 추운 겨울날 얇은 내의 하나만 입혀서 바깥으로 내보냈다. 눈 속에서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로 인한 고통이 밀려왔고, 매맞는 것 보다 더욱 매서워 견디기 어려웠다. 이러다 얼어 죽겠다는 두려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말을 하겠으니 문을 열어달라며 문을 두드렸다. 그렇지만 보위부원이 문을 열어 주자 나는 어찌 안본걸 봤다 하고 안 간 곳을 갔다 하겠냐고, 이제 나를 죽이라고 배짱을 부렸다.
나중에는 나에게 종이를 뭉텅이로 주더니 중국에 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별달리 쓸 말이 별로 없어서 10줄 정도 썼고, 그것을 가지고 한 달 동안 토를 달고 넘어져 서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지역 안 전부로 이송되었다. 안전부에서도 사람을 때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받을 형량 이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임신을 했으니 감옥에는 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큰 오산 이었다. 내 서류를 보고 다시 심문을 진행한 후 내려진 판결에서 나는 3년 노동교화형이 선고되었다. 전거리 교화소에서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은 이미 선고된 형량에 대해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소송을 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나는 그래도 임산부이니 까 봐주겠지 생각했지만 담당 간부는 “임신이라고 널 감옥에 안 보낼 거 같으냐?” 라고 하면서 다음날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달아날까 봐 손을 꽁꽁 묶어놓고는 배에 주사를 놨다. 강제로 낙태를 시키는 주사였다. 당시 나는 임신 5개월이었는데 배꼽에 주사를 놓으니 시간이 지나 아이가 나왔다. 아이를 낳고 보니 아이의 이마 중간에 주사 때문인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는데 아직 죽지 않고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이를 쓰레기장에 갖다 버린 다고 하는 걸 사정사정 부탁을 해서 버리지 말고 묻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입던 옷을 벗어 아 직 죽지 않은 아이를 싸서 덮어주었다. 어미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였다.
그 당시 나의 감정과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기에는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인간으로서 감히 생각해서는 안 될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아이를 방금 출산한 임산부에게 마땅히 필요한 회복의 시간과 장소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빨리 교화소에 수감시킬 생각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매우 허약해져 있었던 나는 야외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일어나다가 밀려오는 찬 바람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만약 화장실 문고리를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똥통에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음날 바로 퇴원을 해야 했고, 3일 만에 교화 소로 이송이 되었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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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평안한 한주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