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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봉 백광홍의 혼과 문학의 얼이 깃든 기양사 | | |
◆…이 글은 본래 '오마이뉴스'의 유길수 기자가 '관서별곡 백광홍과 문학의 고장'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지만, 편의상 '특집/장흥의 가사문학과 백광홍'편에 포함시켜 '백광홍과 기양사'라는 제목으로 재편집했음을 알려드린다. 편집자 주…◆
기행가사 효시, 문학성 재조명 부상돼야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뽑아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다. 나중이 먼저보다 더 빛난다는 의미이다. 기봉 백광홍과 송강 정철, 제자나 후학이 스승이나 선배보다 더 뛰어날 때 그 사회가 발전하는 장대한 흐름에서, 큰 별의 선후를 가릴 필요 있을까.
관서별곡과 관동별곡! 두 작품은 한국문학사에서 우리나라 말의 아름다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 우리 민족성의 아름다움을 문자로 형상화한 최고의 작품들이다. ‘선별곡’인 관서별곡은 기행가사의 효시로, ‘후별곡’인 관동별곡은 기행가사 백미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관서별곡(1556년)이 관동별곡(1580년)보다 무려 25년이나 앞선 작품이고, 후별곡인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조선조 이후 모든 기행문학의 모체로까지 전해지면서도 뒷 작품 그늘에 가려져 왔다는 점이다.
가사문학을 이해하려면 ‘긴 시조’ 쯤으로 알면 편리하다. 시조를 ‘단가’로 가사를 ‘장가’로 알고, 구와 행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4음보 연속체로 읊조리면 될 성 싶다. 조선 전기에 출발한 가사문학은 중기, 후기, 개화기로 이어오면서 양반 사대부에서 여성 평민층의 문학으로 보편화된 우리 민족 문학의 큰 갈래였다.
이런 가사문학 산실이 전남 담양 지역으로만 본격 알려진 것은 송강 정철의 명성과 관동별곡의 작품성 외에도 광주호 상류 지역에 있는 송강정, 소쇄원, 식영정, 면앙정, 환벽당 등의 널려 있다시피한 ‘가사문학 유적’과 송순, 정철, 기대승, 김성원, 김인후, 고경명, 김덕령 등의 ‘인물 파워 브랜드’의 덕분일 것이다.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 제 행상을 다사리니 칼하나 뿐이로다 연소문 내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랴.
기봉 백광홍(白光弘, 1522-1556) 선생이 34세 때, 평안도 평사(評事)라는 벼슬을 하면서 지은 관서별곡은 은일가사(隱逸歌辭)→유배가사(流配歌辭)→기행가사(紀行歌辭)→내방가사(內房歌辭) 등등으로 맥을 잇는 ‘가사문단’에서 그 위상이 특별하다.
관서별곡은 정송강의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구성 표현 어귀배열 등)을 비롯하여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청출어람 할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는 450년 전 선비들이 평생을 공부하는 ‘학생정신’을 견지하면서 ‘불치하문(不恥下問)’ 하는 정신을 한 점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한 측면에서 유추할 수 있을 법하다.
관서별곡의 가장 큰 장점은 호남지방을 조선조 시가문학의 ‘선도지역’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참여 계층의 다양성(양반 사대부에서부터 판소리의 서민층까지)이 특징인 호남문학 풍토에서 ‘기행가사문학’의 양대 산맥인 관동별곡과 더불어 ‘호남을 예술과 문학의 본고장’으로 격상시켰음이 분명하다.
관서별곡은 또한 ‘남도 끝땅’ 장흥을 문향으로, 수원 백씨 집안을 문반(文班)가문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점 또한 부인할 수 없을 성 싶다.
장흥은 대한민국이란 국가 간판 아래 송기숙(녹두장군), 이청준(서편제), 한승원(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국보급 문인을 배출한 ‘남도 최대 문인촌’으로, ‘문림의향 장흥’의 이름을 팔도강산에 널리 알리고 있다.
고려말 두문동 출신 중시조를 둔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수원 백씨 집안은 기봉의 동생 백광훈이 ‘옥봉집’에 500여수가 넘는 시 등을 지어 남기고, 광홍 광안 광훈 3형제와 사촌 광성 포함 백씨 종형제 4명이 ‘1문 4문장’으로 추앙받아 오면서, ‘남도 먹물부자 집안’으로 배가 부를 정도이다.
장흥(長興)이란 지명의 풀이는 ‘길고도 길게 판단하고 오래 견디다 보면 반드시 흥한다’는 ‘기다림의 미학과 내일에 대한 희망’ 의미가 녹아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장흥골은 한때는 왕비를 배출한 ‘지엄한 고을’에서 반란과 민란이 연속된 ‘몹쓸 지방’으로 오락가락했던 흥망의 역사가 유별난 곳이다. 지엄한 고을은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고향이 이곳이어서 유래됐다. 몹쓸 지방은 고려말 왜구 침입, 조선말 동학란 당시 ‘새야 새야 파랑새’의 한 서린 노랫가락이 남도에서 가장 오래 울려 퍼져, 초래됐다.
흥망이 오락가락하는 세상사 이치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음지 다음 양지라는 인생철학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처절함 속에서 희망을 잉태해내는 ‘생존법칙’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장흥골에서‘자으흐응’해야 할 것만 같다.
관서별곡 형식은 8단락 172구 1156자로 돼 있다. 기산별곡과 향산별곡을 합친 관서별곡은 서사(序詞)-관서평사의 명을 받음, 본사(本詞)-평사 부임과정과 관서지방 경치, 말사(末詞)-임금님과 어버이에 대한 상념, 으로 크게 3구분 할 수 있다.
서쪽 시냇가에 얼음과 눈이 깨끗해 있고 사흘 밤을 서로 그렇게만 보냈다오 혜초가 심어진 두둑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오동나무 강가에 봉황이 훼훼하는 소리 들리고 있다오 기풍과 도량은 그전부터 훌륭한 것을 알았으니 백두산 아래에서 근원이 발하기는 두 강이 똑 같다네(중략).
시인이 친구를 보내면서 ‘영중으로 가는 상황을 운중으로 가는 것‘으로 비유하여 높은 시적 감각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처럼 백광홍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작품성은 작가 특유의 기상과 낭만적인 자기 심취 등이 곳곳에 담겨있는 점이 장점이다.
기봉의 창작활동은 30세 전후가 절정기로 추정된다. 그 당시 지은 '동지부'라는 기봉의 작품은 영호남 등 기라성 같은 대가 작품 중에서도 장원시로 뽑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장원상으로 명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선시십권‘은 기봉의 장흥 생가에 현존하고 있다.
시인으로서만 기봉의 생애를 가늠해 본다면 28세 이전에는 고향 장흥에서 자연시를, 28세 이후에는 사친, 취락, 애민, 송양시 등 ‘참여시’를 창작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작가적 측면에서 백광홍의 위대함은 기행가사라는 장르에다 단순한 노정과 있었던 사실만을 기록한 게 아니라는 측면에서 도출된다. 호남지방에서 생의 대부분을 살아내고 관서지방을 2년 동안 여행하면서, 백 작가는 그 대상에다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절묘하게 심을 수 있었다.
경(景)을 보고 그 경에다 정(情)을 접합시킬 줄 알았다. 자연미에다 인간성을 접목할 줄 알았다. 당시 선비들의 세상사는 ‘주재미’인 풍류 등을 여행하는 재미에다 덧붙여 ‘문학적 상상력’을 추가시키고 문학성을 진화시킬 줄 알았다.
그런 관서별곡의 문학성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으로 ‘맥이음’됨으로서 기봉 백광홍의 ‘기행문학’이 한국의 문학세계를 확장시켰던 일등공신의 공로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기봉의 시문학성이 위대해 보이는 기산 마을 기행이었다.
기행 길에서 들은 기봉 백광홍의 ‘2004년 6월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소식은 장하면서 기다리다 보면 흥하는 이치를 깨닫게도 했다.
백광홍의 ‘흥소식’은 ‘문과에 급제, 조선의 8대 문장가로 가사문학의 효시인 ’관서별곡‘을 남기는 등 가사문학발전에 큰 업적을 남김. 주요저서로는 ’기봉집‘ 등이 있음’으로 함박웃음을 오래 띄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