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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3일 금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코헬 3,1-11
복 음 : 루카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한 소년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날, 쪽지 시험을 봤는데 망쳤습니다.
소년은 “다음 시험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시험에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간고사를 봤는데 망쳤습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지만, 기말고사도 망치고 말았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자.”라고 결심했지만, 다음 시험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재수할 때도, 취업 시험을 보고 나서도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겠다”라고 결심했지만 늘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 조그마한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이 회사에서 하는 일은 너무 하찮은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걸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다 보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을 한탄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 생은 틀렸어. 다음 생에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뒤로 미루기만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지금 이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면서 당신의 신원에 관한 질문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말하는 인물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자랑스럽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답을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시지요.
정답을 알기에 미래의 시간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매여있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의 영광만을 떠올리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으로 이끌어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걱정 없이 큰 기쁨을 가지고 희망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삶을, 자연을 ‘렉시오 디비나(성독聖讀)’하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만34년 이곳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다보니
우리 수도형제들은 물론 많은 분들의 변화된 모습을 봅니다.
한때는 처녀처럼 젊었던 30대 분들이 이제는 할머니로 변화된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오랫동안 한곳에 정주하다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매해 체험하며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예전 오랜만에 만난 두 분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수사님은 늙지 않을 줄 알았어요.”
“수사님은 수도원에 살아도 늙네요.”
옛 사진을 보면 세월의 흐름을 절감합니다.
아무도 시간 안에서,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늙어감을, 또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 코헬렛의 주제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코헬렛 저자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하며,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이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고백합니다.
이어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으며,
우리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다 고백하며 결론 같은 말도 붙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시간에는 ‘크로노스(chronos)’ 연대기적 시간만 있는 게 아니라,
‘카이로스(kairos)’ 하느님과의 만남이란 결정적 시간도 있습니다.
육안肉眼만 있는 게 아니라, 참으로 주님과 깊은 관계 중에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에게는
지혜의 눈, 관상의 눈이란 영안靈眼도 있습니다.
세상의 크로노스 시간을 통해 카이로스 하느님의 때를 봅니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때를 분별하는
깊은 영성생활이, 관상생활이 지혜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영적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게 성서의 관상적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 성독입니다.
신구약 성서가 렉시오 디비나의 1차적 대상이지만
렉시오 디비나는 확장되어 우리 각자의 삶이나 공동체 삶은 물론 자연에까지 이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삶도, 자연도 성서가 됩니다.
이렇게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할 때 풍요로운 영적 삶이요,
지난 과거나 다가올 미래에 살지 않고,
오늘 지금 여기서 나답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자유롭게 삽니다.
이런 영적 깨달음의 은총이 참으로 우리를 흐르는 세월 중에도
내적 초월을 이루어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삶의 렉시오 디비나에서 탄생한 깨달음의 시, 둘을 나눕니다.
“눈은 있어도
‘지혜의 눈’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거의가 제정신이 아닌,
맹목의, 광신의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죄도 병도 악도 범람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가, 하느님 공부가, 말씀 공부가, 회개가
참으로 절실하고 절박하다
주님을 사랑하고 찾아 만나라.
주님은 언제나 지혜의 눈이시다.”-2022.4.20
날로 한결같은 영적 수행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주님의 시야를 지닙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주님의 시야를 지니지 못한 지혜가 결핍된
철없는, 철부지 노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가을인생은 가을인생답게, 겨울인생은 겨울인생답게 살아갈 때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간다 하여 저절로 지혜로운 삶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역시 ‘주님의 시야로 바라 보자’는 시를 나눕니다.
“넓고 멀리, 높고 깊이 바라보자
주님의 눈, 주님의 시야로
그리고
오늘 지금 여기를 바라보며 살자
삶도 자연도 똑 같다
예수님 부활상 배경의 단풍나무 사라지니
주변이 탁 트여 참 환하다
불암산이, 또 숱한 크고 작은 이런저런 나무들이
배경이 되어 주는구나
그러니
넓고 멀리, 높고 깊이 바라보자.
주님의 눈, 주님의 시야로!”-2022.4.29.
이런 주님의 시야를 지닐 때 풍요로운 정주의 삶입니다.
단조롭고 메마른 반복의 평범한 크로노스의 일상도 주님을 만날 때
충만한 카이로스의 시간, 주님의 시간이 됩니다.
요즘 수도원 쓸모없는 주변 땅에는 꽃말도 예쁜 “영원히 사랑스러워”라는 빨간 유홍초가 한창입니다.
며칠 전 써놓은 ‘하늘나라’란 자작시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곱게 꽃피어 내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나라다.”-2022.9,18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모두가 충만한 하느님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이런 면에서 수도원의 시간은 거룩한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들입니다.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시간을 성화聖化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시야를, 관상적 눈을, 지혜의 눈을 갖게 하는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의 묘사가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 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루카9,18)에서
보다시피 기도에서 발단이 되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신 후
자신의 수난과 부활의 때를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기도의 때에 이뤄진 깨달음을 나누십니다.
예수님께는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때, 카이로스의 의미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성서나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 역시
충만한 카이로스 하느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오상의 비오 수도사제 역시 똑같습니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무려 50년 동안을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을 받았습니다.
성인은 초자연적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였으며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습니다.
그가 선종하신 지 3년 후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의 거룩함과 영성은 사후 더욱 알려져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9년 5월 2일 시복되었고,
같은 성인 교황에 의해 2002년 6월16일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서
30만 명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그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겸손이며 그때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겠습니다.
참으로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 시간의 선물을
하느님의 때로 깨달아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사랑은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극 중에서 엄격한 남편에게 순응하면서 지내는 아내가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제목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입니다.
우리말로는 ‘그래 그런 거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엄격한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상한 아내는 남편을 잘 알았습니다. 자녀들의 꿈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딸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습니다.
드라마 제목처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합니다.
열흘 넘게 피는 꽃이 없고, 권력이 10년 이상 가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겸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 에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자신이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살았던 성인으로,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성인으로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고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 뒤로 그 자매님이 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 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제게 말하는 겁니다.
‘저요, 세례명 바꾸지 않을래요.’ 그
러면서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많았었고,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명예와 자리를 너무 따라갔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주보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자신의 것보다 더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매님처럼 때로 우리의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너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구원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고마운 다리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서는 군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에 ‘아버지 절대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개의 동사,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 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 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여타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복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본 회퍼)는 말을 떠올려 줍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복종은 결코 시들지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에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알고 있는지 물으신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 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빵의 기적으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 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 계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는 과연 누구인까?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 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 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들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카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 수행은 루카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카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카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 불리신 기적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권모술수’로 이루어 낸 치적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바친 ‘감사의 기도’(루카 9,16)로 이루어낸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카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카 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데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고도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神的 사면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 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 주시고 보충해 주시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