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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에 친일 안 한 사람이 있냐"는 헛소리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법'이 정한 20가지 기준
미군정기 '민족반역·부일협력자 특별조례'가 원류
반민특위 '반민족행위처벌법'도 극히 제한적 규정
규명위 발표 1006명뿐, '친일인명사전'도 4776명
조선일보의 '친일파 청산' 호소, 윤 정권 명심해야
김호경 시민언론 민들레 에디터‧편집이사
얼마 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 출신인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취지로 주장하며 점점 열을 내다 흥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 제가 묻겠습니다. 백선엽이 스물몇 살 때 친일파라고 한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인 문용형 그분도 나이가 거의 똑같습니다, 1920년생. 그 당시에 흥남시 농업계장을 했습니다. 흥남시 농업계장은 그러면 친일파가 아니고 백선엽 만주 군관학교 소위는 친일파입니까? 어떤 근거로 그렇게 한쪽은 친일파가 되어야 하고 한쪽은 친일파가 안 되어야 합니까?"
검사 출신인 박 장관은 윤석열 정권의 뉴라이트 사관을 보훈 행정에 그대로 구현하며 '역사 뒤집기 전쟁'의 선봉대 역할을 해왔는데, 특히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데 장관직을 걸겠다"면서 백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행태가 역사적 사실에 반한다는 민주당 측 지적에 거칠게 맞서다 급기야 "백선엽이 친일파면 문재인 부친도 친일파"라는 잘못된 유추의 오류를 전개한 것이다.
이에 문 전 대통령 측은 "아무 근거 없이 친일을 했다고 매도했다. 부친이 흥남시청 농업계장을 한 것은 일제 치하가 아니라 해방 후의 일"이라며 박 장관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박 장관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감수해야 할 영광으로 생각하겠다"면서 조금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울러 "일제강점기라는 아픔의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는 같은 기준, 같은 잣대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30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대회'에서 축사하고 있다. 2023.6.30. 연합뉴스
"백선엽이 친일파면 문재인 부친도 친일파"라는 물타기 논법
문제는 이 같은 판에 박힌 스테레오타입, 즉 "일제시대에 친일 안 했던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명제가 상당수 국민에게도 깊숙이 주입돼 있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우익세력이 내세웠던 '식민지 환경론'을 뿌리로 수구보수 진영이 오랜 세월 전파한 이 조악한 프레임은 "당시 친일파를 청산했으면 나라 운영이 안 됐을 것"이라는 더욱 과감한 비약으로 발전해 친일 옹호의 논리로 널리 자리잡았다.
친일파의 범주를 밑도 끝도 없이 광범위하게 잡는 이런 주장이 노리는 바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2000만 명이 다 친일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대국민 세뇌인데, 이는 친일파 개념을 오도하는 전형적인 물타기 논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박민식 장관이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으로 보이는 "흥남시청 농업계장도 친일파 아니냐"는 발언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사전적으로 친일파는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2. 일제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약탈 정책을 지지‧옹호하여 추종한 무리, 이 두 가지로 정의된다(표준국어대사전). 우리가 "백선엽이 친일파냐 아니냐" 등으로 일반적으로 쓰는 용례가 후자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즉, 일제강점기 이후 친일파의 의미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조선 침략을 도운 매국노나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한 반민족행위자를 일컫는 것이다.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19일 한국기자협회(회장 정일용) 제1회 기자의 혼상을 수상한 뒤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06.5.19. 연합뉴스 자료사진
리영희가 구분한 친일파…"민족 구성원 자격 없는 사람들"
고(故)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저서 <自由人, 자유인>에서 제시한 분류도 참고할 만하다. 물론 첫 번째 유형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친일파의 개념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이 겨레가 갈 길이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가장 쉽고 편한 이기주의적인 삶 – 적(일제)에 붙어서 동포를 먹이로 삼아 입신영달하는 길이 있었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
둘째로 무의식 또는 체념으로 현실에 순응하는 삶 - 적극적으로 민족의 처지에 서지도 못하지만 적극적으로 적을 돕는 일도 하지 않는 길이 있었다 (소극적인 일제 지배 방조자).
셋째로 적어도 민족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삶 - 각기가 처해 있는 현장에서 제한된 행동으로나마 반일 독립운동에 기여하려는 길이 있었다 (소극적인 민족 해방 운동자).
넷째로 자기를 희생하는 삶 - 민족의 해방과 자신의 인간적인 해방을 일체화하는 길이 있었다 (국내외 혁명 및 독립 투쟁 열사).
민족이 처한 같은 운명, 같은 시간, 같은 조건 속에서, 첫째의 삶을 택한 사람과 넷째의 삶을 택한 사람의 사이에는 상통할 수 없는 극단적인 도덕성의 차이가 있다. 첫째 범주의 인간들은 식민 통치 아래에서도 그렇고, 광복한 신생 독립 국가에서는 더군다나 민족의 구성원의 자격을 누릴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27일 일제 강점 막바지인 3기(1937∼1945)에 친일 행각이 확인된 김성수 보성전문 교장과 소설가 김동인 등 704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2005년에 4년 한시기구로 출범한 위원회는 보고서를 각 대학과 공공 도서관 등에 배포하는 것을 끝으로 30일 모든 활동을 종료한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성대경(가운데) 위원장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노경채 상임위원장, 오른쪽은 김명구 조사기획관. 2009.11.27.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이 정한 20가지 기준
법률적인 분류는 훨씬 엄정하다. 지난 2009년 11월 27일 백선엽을 포함해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을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약칭 반민규명위)는 앞서 2004년 3월 22일 공포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발족한 기구였다. 이 특별법은 제2조(정의)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일본제국주의의 국권 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며 유형을 20가지로 매우 상세하면서도 제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예를 들어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체포한 행위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등이다. 2005년 12월 29일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명확한 조항에 따라서 백선엽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반면 문재인의 부친은 (설혹 일제 치하에서 농업계장을 했더라도) 해당이 안 된다는 귀결이 자명하다. 요컨대 우리가 사회적·법률적으로 친일파라고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은 수구보수 진영이 주장하듯 "일제에 세금 납부한 모든 조선인" 또는 "관공서 계장 이상은 자동으로 친일파"라는 식의 터무니없이 포괄적이고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중대한 부역 행위를 한 사실이 개개인별로 입증된 극소수만 해당이 된다는 얘기다.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독립전쟁, 그 위대한 여정'을 찾은 아이들이 독립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를 살펴보고 있다. 2015.8.7.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군정기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 특별조례>가 원류
이처럼 친일파를 제한적으로 특정하는 방식은 해방 이후 미군정기인 1947년 7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처음으로 친일파 처리 방향을 명문화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에서부터 나타난다. 비록 우익 의원들의 방해로 당초 '특별법안'이던 초안이 수정안, 재수정안, 최종안을 거치며 '법안'이라는 명칭도 바뀐 채 추상화‧형식화하는 등 후퇴했다고는 하지만 이 특별조례는 정부 수립 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 등 후대 친일파 관련 법안의 기초가 됐다. ☞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
특별조례는 제1장 제1조에서 '일본 또는 기타 외국과 통모하거나 영합·협조하여 국가와 민족에게 화해(禍害)를 끼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를 민족반역자로 함'이라고 정의하고 ▲한일보호조약, 한일합방조약 기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각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爵)을 받은 자 ▲일본 제국회의의 의원이 되었던 자 ▲일정시대에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학대·살상·처벌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 등으로 제시했다. 제2조에서는 이들을 사형, 무기,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을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박탈하도록 했다.
제2장 제3조에서는 '일본 통치시대에 일본 세력에 아부하여 비적행위로 동포에게 해를 가한 자를 부일협력자로 함'이라고 정의하고 ▲작위를 받은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가 되었던 자 ▲칙임관(일제 때 관료 중 최상위에 속하는 1·2등 고등관으로 총독부 각부 장관, 판·검사, 국장, 참사관, 경무관 등) 이상의 관리가 되었던 자 ▲밀정행위로써 독립운동을 저해한 자 ▲독립을 저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정치단체의 대표 간부되었던 자 ▲일본 군수공업을 대규모로 경영한 책임자 ▲개인으로 일본군에 10만 원 이상의 현금 또는 동 가치의 군수품을 자진 제공한 자 등으로 분류했다. 제4조에서는 이들을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0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재산을 전부 또는 일부를 몰수할 수 있도록 했다.
서울 중구의 한 은행 건물 주차장 입구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자리임을 기념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1999년 세운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2015.3.1. 연합뉴스 자료사진
반민특위 근거인 <반민족행위처벌법> 역시 최소한도의 적극 부역자들만 규정
반민규명위 발표 명단은 1006명에 불과…최다 수록 <친일인명사전>도 4776명
이 특별조례는 수정을 거듭하며 과도입법의원을 어렵게 통과했지만, 친일 경찰‧관리들을 중용하고 우익세력에 경도돼 있던 미군정 측이 4개월여를 시간만 끌다 결국 인준을 거부하는 바람에 사장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는 소장파 의원들이 주축이 돼 우선 헌법 제101조에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한 뒤 1948년 9월 7일 본회의에서 재석 141명 중 찬성 103명, 반대 6명의 압도적 지지 속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반민특위 설치의 근거가 된 <반민족행위처벌법> 역시 ▲한일 합방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또는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를 비롯해 앞서 특별조례의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규정과 대동소이한 반민족행위자 조항을 열거하고 있다. ☞ 반민족행위처벌법
친일파 척결 여론이 들끓었던 해방 직후에도 그 대상은 일제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다수 대중이나 소극적 방조자들이 아닌 최소한도의 적극 부역자들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반민특위가 당초 조사 대상자로 삼았던 인물은 대략 7000명이었는데, 검찰부에 송치한 숫자는 559명에 불과했다. 근래 시점으로 봐도 위에 언급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에서 발표한 숫자는 1006명뿐이고, 가장 최근인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그간의 조사 결과를 집대성해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인물도 다해봐야 4776명이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22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반민특위 발언과 관련해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의원직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당시 나 원내대표는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해방 후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실 것이다"라고 발언했다..2019.3.22. 연합뉴스 자료사진
반민특위 명단에 없으니 친일파 아니다?…이승만 정권 탄압으로 8개월 만에 좌초
박민식 장관은 백선엽 장군이 반민특위 피의자 명단에 없다는 점을 이유로 친일파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1949년 1월 5일 업무를 시작한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반대와 갖은 탄압으로 겨우 8개월밖에 활동하지 못한 사실을 고려하면 어불성설이다.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민특위의 주동력이던 소장파 의원 집단이 공중분해되고, 다음 달엔 '6·6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라는 경찰의 원초적 테러까지 자행돼 반민특위의 집행력이 파괴된 점까지 감안하면 실질적인 활동기간은 더욱 짧아진다.
반민특위가 송치한 559명 가운데 검찰부가 기소한 건 221명이었으며, 재판부의 판결 건수는 겨우 40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 40건의 판결에서도 징역형 이상을 받은 자는 14명에 불과했는데 그중에서도 5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실제 형을 산 자는 단 7명뿐이었다. 그나마 이들도 이듬해 봄까지 재심 청구 등으로 감형되거나 형집행정지를 받아 모두 석방됐다. 반민특위는 그 역사적 사명과 구성원들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강고한 친일 기득권 세력의 반격에 의해 무참한 실패로 끝난 것이다.
해방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친일파를 제대로 처벌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사형 집행이 전무한 데 반해 2차 대전 후 프랑스에서는 나치 부역자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돼 1500여 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유죄가 선고된 9만 8000여 명 중 3만 8000여 명이 징역형으로 수감됐다. 그밖에 유럽에서 나치 점령을 경험한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에서도 각각 수만 명의 자국민이 징역 판결을 받았다.
5일 오후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서 열린 고 백선엽 장군의 동상 제막식에서 박민식 보훈부 장관, 백선엽 장군의 장녀 백남희씨, 이철우 경북도지사, 이종섭 국방부 장관,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등이 제막하고 있다. 2023.7.5. 연합뉴스
'토착 왜구'의 창궐…윤 정권이 명심해야 할 조선일보의 '친일파 청산' 호소
대한민국은 침략국의 부역자들을 제때 단죄하지 못한 처절한 후과로 윤석열 정권 들어 자생적 친일파, 즉 '토착 왜구'들이 본격적으로 창궐하는 처참한 광경을 연일 목도하고 있다. 100년 전의 민초, 의병, 독립운동가들 심경이 어땠을지를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실재로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박민식 장관을 비롯한 정권의 '역사 전쟁' 주역들에게 이제라도 친일파 청산이 얼마나 중차대한 과제인지 일깨워줄 격문 하나를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반국가세력'과는 가장 거리가 먼, 윤석열 정권의 지극한 우군인 조선일보가 일찍이 친일파 득세의 전도된 현실에 개탄을 금치 못하며 쏟아냈던 '방성대곡'을 실로 엄중하게 음미해보기 바란다.
"멀리는 친일 세력의 형성 과정, 조선인의 자치론, 신간회 파괴 공작, 학병 동원 운동에서 해방 후의 반민특위, 토지개혁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대사가 고비를 돌 때마다 우리는 수많은 이단(異端)으로 인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굴절을 겪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조선 말기에서 4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의 민족사의 내측(內側)에 숨어있던 친일 계보는 속속들이 파헤쳐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항용 특정 계파의 일방적 자기 미화의 논리로 잘못 기술되곤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친일 및 부일 세력과 항일투쟁 세력을 역사적 가치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일제하의 친일이 해방 후의 지배 세력으로, 그리고 반민족적 반민주적 세력이 민족 세력으로 둔갑하는 오류를 반복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1985년 4월 19일, 조선일보가 신문 3면에 게재한 <우리의 입장 : 동아일보의 본보비방에 붙여>라는 사고(社告) 중에서. 개인 칼럼도 아니고 '조선일보사' 명의의 공식 입장으로 천명한 이 성명문은 독재자 이승만의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 25주년이 되는 날 발표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서로를 친일 신문이라고 짐짓 준엄하게 비판하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기'식의 이전투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러다 공멸의 위기감을 느낀 탓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꼬리를 내리고 흐지부지 싸움을 끝냈다. 여러 가지로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출처 : 박민식의 궤변…'친일파'라는 기준은 무엇인가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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