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N5xA0HJlbQ?si=d0Lv3EIEQzPRtiFb
Dvorak-String Quartet No.14 in A flat major op.105 | 스메타나 쿼텟
String Quartet No. 14 In A Flat Major, Op. 105 No. 193
드보르작, 현악4중주 B152 '측백나무'
드보르작의 번호가 붙은 다른 현악 사중주에 비해서 Cypresses 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고 덜 연주되고 있는 곡이다. 이 곡들은 그가 24세때 Gustav Pfleger-Moravsky의 시에 곡을 붙였던 18곡의 노래를 20여년이 지난 뒤인 1881년에 12곡을 골라서 보컬 라인을 violin과 viola로 살리면서 현악 사중주로 편곡을 하여 내놓았다.
드보르작은 생전에 이 곡에 대해서 만족을 표시했지만 생전에는 잘 연주되지 않다가 1921년 사후에 그의 사위인 Josef Suk에 의해서 발표되어 알려지고 있다.현재는 그의 곡 중에서 가장 특징적이면서도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나무는 본래 드보르작이 23세에 16세의 한 여학생을 사모해서 만든 18곡의 연가곡이었고 (청혼은 거절당했고 8년 후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함), 그중 열두 개를 후에 현악사중주로 편곡한 것으로 사랑에 빠진 청년기의 드보르작을 듣는 기분이 흥미롭다
여관과 정육점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때에 가업을 계승시키려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였다. 이 시기에 극장과 음악회를 다니며 베를리오즈와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을 감상하였다. 졸업 후 레스토랑 등에서 비올라 주자로 생활하였고, 1862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가설 극장 관현악단에 입단하여 10년동안 비올라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1866년 이곳에 부임한 스메타나의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아, 스메타나 이후 체코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다. 1861년부터 실내악을 작곡하기도 하였으며, 1865년에는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1873년 그가 30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민족적 애국시 《빌라 호라의 후계자들》을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1874년 성 아다르베르트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어 단막극 《완고한 자들》로 가설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875~77년까지 1남 2녀를 차례로 잃는 슬픔을 안게 되었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 국가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해마다 작품을 출품하였고 1877년 심사위원인 브람스로부터 작품을 높게 평가받아 베를린 출판사에서 작품이 출판되어 국내외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84년 빈 궁정 오페라 총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단념하고 조국에 머물렀고, 1884년부터 수회에 걸쳐 영국을 방문하여 대환영을 받았다. 1891년 프라하 음악원 교수에 취임하고 1892년 뉴욕내셔널음악원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음악원장 및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세계 교향곡》 등 많은 걸작을 작곡하였다. 1895년 귀국하여 1901년 프라하음악원장으로 취임하고 같은 해 오스트리아 종신 상원의원으로 추대되는 등 만년에 영예를 얻었으나 1904년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초기작품은 베토벤, 슈베르트의 음악구성에 입각한 작품을 썼으며 다음으로 바그너와 브람스의 수법을 사용하였으나 후기까지 영향을 준 작곡가는 바그너였다. 드보르작은 슈베르트와 비견될 만큼 다작으로, 샘솟듯 악상을 거침없이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음악은 19세기 낭만 음악을 대표하며 국민주의적 성향을 가지기도 하는데 즉 건전한 이념, 미래에 대한 희망, 신에 대한 경건, 자연과 조국에 대한 정열 등이 그의 작품에 기반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다양한 레파토리를 구사하고 체코 지방의 정서를 되살린 것으로 유명하다.
글쓴이 : 미술관지기
https://youtu.be/5gaxtKQpGWI?si=_KPErjvf7k7DMJ0g
Antonín Dvořák - String Quartet No. 14 in A-Flat major, Op. 105 (w/ Sc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