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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에제 18,21-28
복 음 :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10년 심리학자 줄리안 홀트 룬스태드가 동료 학자들과 다음과 같은 조사 연구를 했습니다.
암, 심혈관 질환, 신부전 같은 만성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의 비율과 이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종합 분석한 것입니다.
그 결과 힘이 되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있으면
사망 위험성이 50%까지 감소한다는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담배를 끊어서 얻는 효과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체질량지수(BMI)를 건강하게 유지할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효과였습니다.
이렇게 이웃은 나를 지켜주는 지원 체계였습니다.
건강과 행복, 삶의 만족도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이웃으로 이루어진 양질의 사회적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세상 안에서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 도움 등의 유용한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뇌의 신경화학 물질이 면역계의 효율적인 기능을 촉진하기 때문에 건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건강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도 운동하고, 또 몸에 좋다는 각종 영양제를 복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영양제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이
단순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금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열심함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감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열심한 생활로
그 모습을 통해서도 다른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열심, 자기만족을 위한 열심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령하시지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고, 욕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는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하늘나라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인 나의 이웃이 이 세상 안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늘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뭇잎이 가을에 노랗게, 빨갛게 물이 들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단풍’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가을도 ‘단풍’이 물들면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면 나무는 이제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파란 감도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어갑니다. 빨간 홍시는 맛이 별미입니다.
빨간 감이 떨어지면 감나무도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나무는 단풍이 든다고 하고, 감은 익어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이가 들면 늙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늙음’을 아쉬워하고, 멈추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도 이제 ‘환갑’이 되었으니 예전의 기준으로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신체의 기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늙음을 익어감으로 받아들이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면
이제 주님께 의탁하며 익어감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원하였듯이
사람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진시황제가 원하였던 ‘불로초’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노화를 방지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혈액’을 젊은 사람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물 실험의 결과 젊은 ‘피’를 수혈했던 동물이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젊은 피’를 공급한다는 의미는 신인 선수를 투입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도 ‘젊은 피’를 공급하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드라큘라의 전설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사람의 대장에 있는 미생물을 나이 든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생물은 소화 흡수가 잘되도록 돕고, 원활한 배설이 되도록 돕기에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유전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포는 재생되지만, 그 재생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유전자의 변환으로 재생의 숫자를 늘리면 건강한 몸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습니다.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일찍 죽은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품격보다 자본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신앙의 차원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고 해도, 좋은 미생물을 주입한다고 해도, 유전자를 변환시킨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길이도 분명 중요합니다.
남들이 사는 만큼의 수명을 누리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원하는 만큼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강은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과 같이 인간으로서
정말, 정말, 정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최악의 선으로 그어 놓고,
그것을 어기지 않으면 의인이고 어기면 죄인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응분의 벌이 주어지는 게 정의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태 5,20)고 하시며
'형제에게 성내는 것, 바보라 하는 것, 멍청이라 하는 것'까지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율법에는 그런 행위에 대한 규제나 징벌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물리적으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살인뿐 아니라,
모독이나 모욕, 과도한 분노처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도를 넘는) 갈등의 표현에 대해서도
이웃을 해치는 죄, 인격 살인의 범주에 포함시키십니다.
의로움은 법적으로 깨끗한가의 문제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모욕과 상처를 주는가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벗님 여러분은 참으로 의인인가요?
사실 우리 대부분은 십계명이나 교회법, 국법을 명시적으로 어기며 살지는 않습니다.
아니, 대부분은 무슨 법이 있는지조차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기준에 따르면 의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에 따르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다른 이웃을 내치고 모욕하고 무시하고 빨리 없어지기를 내심 바란다면,
그런 심보가 더 큰 죄요 악이 됩니다.
인간 사이에 다툼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는 걸 예수님도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진정 형제를 사랑한다면, 아무리 작은 상처나 아픔이라도
그것이 야기될 수도 있는 순간에 한 박자 멈추고
당신의 가르침을 떠올리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한쪽이 아니라 서로의 존엄과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3-24).
형제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보다, 속죄예물을 바치거나
죄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함으로써 법적으로 해결하고 끝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과 예물로 율법이 요구하는 응당의 대가를 치렀으니,
스스로 의로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소위 면피했다고 손을 씻는 짓이지요.
마음 깊이 '미안해'라고 하지는 않고 돈이나 선물 등으로 때우려는
우리의 모습은 없는지 한번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서 상처 입은 그 형제에게, 용서를 받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얻고,
그러고 나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쳐 그분의 마음도 얻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사자들이 서로 주고받아야 할 용서와 화해의 장에서
상대를 소외시키고 건너뛰어 버리는 교만을 범하지 않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에는 "돌아서서"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성서에서 돌아선다는 표현은 '회개한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돌아선다고 다 같은 게 아니라,
악인이 선으로 돌아설 때와 의인이 악행으로 돌아설 때가 다릅니다.
회개와 그에 따른 축복은 전자에만 해당됩니다.
"악인도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에제 18,26).
과연 돌아서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돌아서는지 그 방향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기억력이 별로이신 것 같습니다.
아니, 나약한 인간을 위해 일부러 당신 기억의 능력을 잠재우신 것 같습니다.
죄인인 우리의 허물을 등 뒤로 던져버리시고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시니,
돌아서기만 하면 그 덕에 죄인인 우리가 다시 일어서고 돌아오고
빛을 받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만, 배신한 의인의 경우라면 사정이 좀 다릅니다.
그가 실천했던 정의는 기억되지 않을 거라고,
예전에 행했던 정의 때문에 봐주지는 않으시겠다고, 곧 '지금'의 너를 보겠다고 하십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화해와 타협을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급하고 자기 조절 능력이 부족하며 자기 위주로 사고하는 우리가
사람 사이에 부대끼고 살면서 아무 갈등 없이 지내기는 어렵습니다만,
이미 입힌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고
사랑과 위로의 말, 행위로 치유해 줄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이때는 해를 입혔던 사람만 애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피해를 당한 형제 역시, 과거를 잊어주시는 '선택적 기억 장애'를 가지신
하느님처럼 지난 일을 잊어주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노력해야 합니다.
'과거'의 미웠던 형제가 아니라 '지금' 진정성을 가지고 손을 내미는 형제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가 일어나고,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실 흠 없는 예물을 함께 바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한계를 확장 시킵니다.
살인만, 간음만, 도둑질만 하지 않는 것으로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요구에 섬세하게 응해야 하고, 최소한의 악을 피하며 살기보다
최대한의 선을 행하며 사는 삶이니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보다 무겁고 어려운가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법은 성령의 법, 사랑의 법이기에
문자에 묶여 있지 않고 이미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사랑의 법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누구에게 묻거나 판례를 뒤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의 사랑이, 마음이, 양심이 잣대가 되어주고 믿음이 등대가 되어주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내가 잘 못한 게 뭐가 있어. 나는 열심히 기도 시간 지켰고,
나름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문제없어.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 내가 좀 미워하고 짜증내고
화를 좀 낸 것은 당연한 것이야."라고 생각말고,
"아, 그래 나의 말 한마디, 냉정한 눈빛 하나가
저 벗의 마음을 저렇게 아프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좀 고쳐먹으라고. 제발 돌아서라고. 제발 회개하라고.
그게 진정 네가 살 길이라고. 그게 진정 네가 의인이 되는 길이라고.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 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형제와 화해: 하느님과의 화해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보다도 인간적 영광이라는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찬사라는 역겨운 의로움보다
거룩한 의로움의 행실과 믿음의 공덕을 더 귀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시고,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에’가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라고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선,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에로 가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에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죄값을 모두 치루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자.
뿌리를 다스려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 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 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6,6).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용서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 (코헬10,13).
아무리 조심해도 마음 한 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귀가 둘이고, 눈이 둘인데 입은 하나일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