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유리왕33년: 오이와 마리가
군사 2만 거느리고
양맥정벌
② 대무신왕 5년: 대무신왕이 1만 내외의 병력으로 부여공격
③ 태조왕 69년: a. 왕의 동생 수성이 3천의 병력으로 현토 요동의
성곽 불지름/ b. 왕이 선비족 기병 8천과 함께 요대 공격/ c. 왕이 마한 예맥 기병 1만으로 요동군
공격
④ 신대왕 8년: 명림답부가 후퇴하는 한의 침략군을 수천의
기병으로 대파
⑤ 동천왕 20년: 왕이 군사 2만으로 위나라의 침략군과
접전
⑥ 중천왕 12년: 정예기병 5천으로 위나라 침략군을 격파
① 미천왕 3년: 왕이 군사 3만으로 현토군 공격
② 고국원왕 12년: 왕이 정예 군사 5만으로 전연의
침공을 막게 함
① 고국원왕 39년: 왕이 2만의 군사로 백제태자 근구수의
軍과 접전
② 고국양왕 2년: 군사 4만 동원하여 요동 공격
③ 광개토대왕 10년: 군사 5만을 보내어 신라 침공하는
가야/왜군을 격파
…至是謂武藝曰:「黑水請唐家官吏,即欲擊之,是背唐也.唐國人眾兵強,萬倍於我,一朝結怨,但自取滅亡.昔高麗全盛之時,強兵三十餘萬,抗敵唐家,不事賓伏,唐兵一臨,掃地俱盡.今日渤海之眾,數倍少於高麗,乃欲違背唐家,事必不可」<舊唐書> 列傳 卷199下 列傳149下 北狄 渤海靺鞨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9년 토이토부르거발트 전투에서의 대패이후 변경의 안정을 강조하며
라인강을 국경으로 삼아 게르마니아로의
팽창을 포기하였다. 이후 라인-도나우강線은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로마의 국경으로 자리하게
된다.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寶藏王 2年
余昊奎, 「國內城期 高句麗의 軍事防衛體系」 『韓國 軍事史 硏究』(Vol. 1,
1998), P.43
표영관, 「4世紀 高句麗
防禦體系의 形成過程」 (동국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2004),
18-19쪽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9), 220쪽
安東都護府 章元年九月,司空李勣平高麗. 高麗本五部,一百七十六城,戶六十九萬七千.
<舊唐書> 志卷39 志第19 地理2 河北道 安東都護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