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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제1독서 : 탈출 34,29-35
복 음 : 마태 13,44-46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 변했어.”
상대방이 인상 쓰며 변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말을 듣는 대상인 본인은 어떻습니까?
자기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났으니 생물학적 변화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내 마음이, 내 성격이 변했다고 말하는데, 도저히 인정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사랑 호르몬이라고도 부르는 도파민의 분비는 남성의 경우에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를 향해 “변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호르몬 분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정확하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 역시 계속해서 호르몬이 변합니다.
외적 변화뿐 아니라 내적 변화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잘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주님께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주님의 평화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해방에 맞춥니다.
이런 분명한 기준에서 잘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짧지만 강력한 내용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와 같다고 하시지요. 소비를 촉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명품과 같은 귀하고 비싼 물건에 욕심을 내어도 괜찮다고 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사실 비윤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종이 주인의 밭에서 일하다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물을 주인에게 갖다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하던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인에게도 또 경찰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절대 윤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와 같으므로,
이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전혀 관심이 없었어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데 어떻게 외면하겠습니까?
그 가치를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며, 반드시 가야 할 곳입니다.
남의 이목을 신경 쓰고, 체면을 따질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변화입니다.
하늘나라를 최고로 여기는 마음의 변화가 가장 필요할 때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현미경으로 물을 보면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사실 현미경을 통해서 물을 보면 그 안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의 시각은 그것들을 보면서 물을 마시도록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지는 질병 중에는 지나치게 청결하기에 생기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듯이 우리의 몸은 유익한 것도, 무해한 것도, 유해한 것도
어느 정도는 함께 거주하도록 진화했다고 생각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순례 중에 짐 가방은 꼭 필요합니다.
버스에 짐을 넣고 내리는 것을 도와 드리다가 그만 왼쪽 손목에 무리가 갔습니다.
열정도 좋지만, 요령이 필요한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별것 아니겠지 생각하며 지냈는데 손목이 점점 아파왔습니다.
왼손의 고마움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병마개를 열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왼손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컴퓨터의 자판을 입력하는 데도 왼손의 도움은 컸습니다.
우리의 귀도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귀도 피곤한지 잘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손목이 아파서 일찍 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전에는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렸습니다.
벽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거실에 있는 냉장고의 소음도 들었습니다.
이왕 이리된 것 잠을 뒤척이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차피 곧 새벽은 올 것이고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니 두 가지 것이 마음에서 떠났습니다.
손목이 아픈 것에 대한 짜증이 사라졌습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도, 냉장고의 소음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음악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이야기하였고, 아버지의 권위를 지켜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자리에 계시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물건과 아버지의 자리는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는 마치 ‘성소(聖所)’와 같았습니다.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어쩌면 이해 못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모세가 너울을 쓴 것도 어찌 보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은퇴하신 원로 신부님과의 대화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 같습니다.
들어야 할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습니다.
신문의 지면을 보고서 노부부가 가슴에 전대를 차고 오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큰 금액을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내어놓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대를 차고 오시는 분은 별로 없지만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눔’에 함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주 소개되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을 보고 많은 분들이 정성을 보내 주십니다.
분기별로 소개를 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능기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악가들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건축가들이 홀로 사는 어르신들의 집을 새로 수리해 주기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이 나환자 마을을 방문해서 치료해 주기도 합니다.
성무에서는 은퇴하였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시는 신부님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 중에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외로운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왼 손목이 아파 잠 못 이룬 밤에 저도 생각의 ‘재능기부’를 잠시 해 보았습니다.
밭에 묻혀있는 보물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절)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이 보물을 가지려면 밭을 사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라도 밭을 사야 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보물은 세상의 것을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세상의 것이란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들로, 우상숭배를 버려야 한다.
밭이란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밭으로 오는 사람은 그 안에서 보물인 지혜를 찾는다.
신앙인은 성경을 알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을 따르려 애쓰는 가운데 보물을 발견한다.
보물을 숨기고 있는 밭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즉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것이다.
거기서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합당한 비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게 된다.
값진 진주는 율법과 예언서보다 더 귀한 살아계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영원한 삶이라는 진주를 찾는다.
하느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은총으로 하느님을 알아보고는
과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고 그분만을 따르게 된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속된 욕망에서 돌아서게 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면 나머지 모두도, 즉 율법과 예언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거룩한 삶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그 진주와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은 하찮을 뿐이다.
그 마음은 하늘의 것, 오직 값진 진주의 광채, 즉 그리스도만을 원한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 한다.
영원한 삶에 대한 불타는 열망은 물질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게 한다.
하느님께 깊이 빠진 사람은 속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찾아야 하고 가져야 할 값진 보화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보화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파헤쳐서
그 보화를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 얻는 기쁨을 가져야 한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희생을 해야 하는 것처럼,
구원도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참 기쁨을 우리에게 주며,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며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 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13,46).
그리고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마태복음 19장 이하의 부자청년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젊은이는 결국 주님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흩으러뜨리지 말며 무엇 때문에도 놀라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차지한 자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놓았던 성녀 엘리사벳 씨튼은 고백합니다.
“하느님만이 나에게 남은 피난처이십니다.
저는 다른 모든 피난처들을 잃어버리고 주님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데서
오히려 영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재산은 무엇인가?를 살펴야겠습니다.
보물은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있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가9,62)
내 삶의 자리에서 참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2사무22,29).
이제 당신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와 하늘 나라의 만남을 보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모세가 두 번째로 십계명 판을 들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장면을 보여 줍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였다."(탈출 34,32)
모세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 뜻의 전달자이고 중개자입니다.
그의 역할은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하느님 백성답게 살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성조 때부터 하느님에게 선택되었으면서도 그분 소유의 하느님 백성이 되는 길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스라엘에게 그 가치를 보여 주고 증명하는 존재입니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이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탈출 34,30)
하느님과 마주한 모세는 그 얼굴에 빛이 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덕이나 영적 자질들이 대개 감추어져 있는 반면,
모세 얼굴의 빛은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실제적입니다.
백성이 가까이하기 두려울 정도로 물리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빛입니다.
긴 광야 여정에서 모세를 오해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할 백성이지만
이 빛은 그들이 하느님을 감지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하늘나라와 우리 상호 간의 극적인 발견과 소유 과정을 간결히 보여 줍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이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하늘나라는 숨겨져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눈에 띄지 않지요.
모세가 빛나는 얼굴을 너울로 가렸다는 것도
보물이 함부로 노출되지 않고 감추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밭과 관련이 없는 이는 보물을 발견할 확률이 적고, 주인이라면 다시 밭을 살 필요가 없으니,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아마 밭 주변을 맴돌며 뭔가를 찾고 탐색하고 뒤지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보물만 몰래 챙겨서 떠나지 않고 제자리에 다시 숨겨 둔 뒤 밭 전체를 삽니다.
그렇게 하려니 가진 재산을 다 팔 수밖에 없지요.
하늘나라는 딱 그것만 도려내듯 소유할 수 없고,
그것을 품고 있는 밭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비록 거칠고 메마른 박토여도 그래야 합니다.
아마 흥정할 때에 보물을 발견했다는 말은 빼고 밭에 매겨진 시세를 치렀을 겁니다.
어쩌면 보물에 대해 밭 임자에게 말을 했어도
결국 그 밭을 얻었을 것이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기도 하지요.
그 보물이 누구에게나 보물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하늘나라는 이를 간절하고 열렬히 추구하는 이에게나 전 재산과 맞바꿀 보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 13,45)
밭에 묻힌 보물로 비유한 하늘나라는 수동적입니다.
발견되길 기다리며 감추어져 있기에 존재적이고 신비적이지요.
그런데 두 번째 비유는 하늘나라를 최상의 값진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견합니다.
상인은 뚜렷한 목표 의식 아래 부단히 찾아다니며 흥정하고 쟁취합니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매우 역동적이고 진취적이며 적극적입니다.
하늘나라는 자신의 가치를 아는 이가 자기를 찾아주길 기다리며 인내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그를 찾아다닙니다.
또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이도 부단한 노력으로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동시에,
그 자신이 하늘나라에 의해 발견되고 지명되어 소유됩니다.
이 과정에는 과감한 배팅이 요구됩니다. 버림과 투신이 뒤따르지요.
하늘나라를 발견한 이나, 가치를 아는 이는
발견한 하늘나라나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다 버려야 보물을 쟁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세상 것을 다 움켜쥔 채로 곁들여 소유할 수 있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늘나라에 소유되었지요. 주님께서 큰 희생을 치르고 우리를 얻으셨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늘나라와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 하늘나라는 우리를 어렵지 않게 알아봅니다.
그리고 기꺼이 값을 치러 우리를 소유하지요.
창조 때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하늘나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늘나라를 알아보고 그 가치를 추구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복음 환호송에 들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복음 환호송)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중개자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보고 그분 뜻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신을 다 내놓아 아버지를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 역시 우리에 대한 성자의 보증과 대속으로 우리와 화해하십니다.
우리가 아드님의 친구니까요. 값진 진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우리를 얻기 위해
하느님(하늘 나라)은 당신 자신을 죽음에 넘기시는 어마어마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숨겨진 보물, 하늘나라를 찾기 위해 각자에게 허락하신 삶의 여정과
지금 지나고 있는 광야를 주의 깊게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박토까지 떠안아야 할지라도
그 깊이에 하늘나라가 감추어져 있다면 모든 것을 걸 이유는 충분합니다.
하늘나라를 찾고 있는 여러분, 또 하늘나라에 의해 발견된 값진 진주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값진 진주 하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13장에 있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일곱 개 중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는
일반 군중에게 하신 앞의 네 개의 비유와는 달리,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로 마태오복음에만 전해집니다.
이 비유들은 '대체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의 ‘일터인 밭’에 묻혀있고,
‘진주를 찾는 행위’ 안에 깃들어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 사들여야 할’만큼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임을 깨우쳐줍니다.
오늘은 이 두 비유의 서로 다른 특성에 주의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보물의 비유'는 품꾼 혹은 소작인이 남의 밭에 나가 일을 하던 중에,
묻혀있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일하다가 갑작스럽게 횡재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을 파내게 되면 당시의 법에 따라 주인의 것이 되기 때문에,
그 보물을 파내거나 몰래 가지고 돌아가지 않고,
다시 묻어두고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곧 법과 도덕을 넘어서는 이 품꾼의 태도는 보물의 가치가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을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보물을 얻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치러라”는 강력한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마르 10,21)고
강력한 희생을 요청하셨듯이 말입니다.
한편 '진주 상인의 비유'는 우연히 밭을 갈다가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주를 가진 장사꾼이 마치 진리를 찾아 나선 수도승처럼,
더 값진 진주를 찾아 나섰다가 애써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하나'(ενα)란 ‘여럿 중의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 곧 ‘하나뿐인 유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곧 최상의 것으로서, 그것 ‘하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요,
다른 모든 것을 합해도 그보다 나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값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다른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도 이 값진 진주 하나를 차지하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마치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가 10,42)인 것을 요청하셨듯이 말입니다.
결국 이 두 비유에서 지칭하는 '밭의 보물'과 '값진 진주 하나'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앞서 가장 먼저 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우리는 이 '보물', 이 '값진 진주'를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서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당신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보물, 하나뿐인 진주’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보물’이신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소중한 진주로 여기시고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4)
주님!
밭을 일구는 제 손길이 당신의 나라를 찾아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고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값진,
모든 것을 합해도 그것보다 나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것,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기에 목숨을 내어 주고서라도 얻게 하소서.
아멘.
보물과 진주에 비유된 하늘나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께서는 군중을 떠나 다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밀과 가라지가 성장 기간에는 서로 섞여 자라지만
추수 때가 되면 철저한 추수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가라지 비유의 설명 안에는 마음의 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성장하는 동안에 주어지는 가능한 모든 여건과 조건을 잘 활용하여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경고와 독려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밀알이 좋은 밭에 뿌려졌다 하더라도 그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추수 때 따로 묶여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가라지의 신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따라서 신앙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잘 깨닫고,
깨달은 바를 실제로 실천하며, 그 나라를 세상의 무엇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또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마태 25,34) 모든 것을 다 바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강제나 의무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강요되는 나라가 아니라
죄와 악으로부터 해방된 백성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선물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만이 그 진실을 알 뿐이다.
이런 백락에서 오늘 복음의 두 가지 비유는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비유 설교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마태오 복음 고유의 비유로서
아주 짤막한 문장으로 비유가 원하는 명쾌한 뜻을 전달하고 있다.
‘보물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고는
가진 것 다 팔아 보물이 묻혀있는 그 밭을 산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란 하루의 노동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가난한 소작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地主의 밭을 갈다 보물을 발견하고는 다시 묻어둔다.
보물이 묻혀있는 그 밭이 자기 소유가 아니므로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자기 소유로 만든다는 것이다.
‘진주의 비유’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다가 좋은 진주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떤 장사꾼’은 앞의 소작인과는 달리
장사를 통해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진 부자일 수도 있다.
그가 늘 좋은 진주를 찾아다닌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구도자에 비유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보물과 진주가 하늘나라에 대한 比喩言語라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가 보물이나 진주 그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참고로 비유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원관념)을
다른 대상(보조관념)에 빗대어 나타내는 것을 말하며, 그런 방식을 비유법이라 한다.
比喩法에는 直喩法, 隱喩法, 換喩法, 提喩法, 代喩法 등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직유법은 “대나무처럼 키가 큰 사람”, 은유법은 “내 마음은 호수다”,
환유법은 “나는 괴테를 모두 읽었다.”, 제유법은 “바다에 돛이 떠 있다.”
그리고 대유법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백의 천사” 등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비유를 대하면서 조심해야 할 점은,
자칫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귀한 보물이나 값진 진주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을 그런 보물이나 진주, 즉 귀한 물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그런 보물과 진주에 빗대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다고 하셨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은유법임을 알아야 한다.
하늘나라와 보물(진주)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보물이 귀한 것이고 좋은 것이므로 하늘나라를 보물에 비길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결코 인간의 소유 가능한 대상물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소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더욱 더 그렇다.
하느님은 事物(res)이 아니라 位格(persona)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위격이시라는 말은 마치 인간이 가진 人格과 흡사하다.
인격은 인간에게서 비교적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성격이나 경향,
또는 자아의식으로서 하느님의 위격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이 돈으로 몸을 살 수 있어도 마음을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느님의 위격도 그런 것이다.
하느님의 위격은 오직 그분과의 친밀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그 공동체 안에서 그분의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느님 나라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보다 더 귀중하고 소중하게 깨닫고 사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 깨달음을 얻은 자는 가난한 소작인처럼 보물을 발견하고
그렇게 기뻐하면서(44절)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마리 에바 수녀
호스피스 병동에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이들은 주 1회 병동에서 환자들의 발 마사지, 목욕, 기도와 정서적 지지를 한다.
환자들은 환자 특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고, 또 아프면서 링겔줄과 소변줄 등
여러 개의 줄을 달고 있어 자주 씻지 못할 경우가 많이 있다.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여러 달만에 씻은 환자와 보호자들의 기쁨과 만족감도 높지만
요즘 같은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여름에는 봉사자의 노고가 이루 말할 때가 없다.
그러나 나는 단언컨대 땀으로 절여진 목욕 후
봉사자들의 미소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본 적이 없다.
더운 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다 보니 기온은 엄청 올라가고
습기가 높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도
붉게 물든 봉사자들의 얼굴은 오늘 1독서에 나온 모세만큼이나 얼굴이 빛난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을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처분하여 산다’는 내용이다.
자원봉사자들과의 프로그램에서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비싼 것, 가장 소중한 사람.. 등을 적고
죽음이 다가와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남기는 프로그램에서,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하느님, 신앙’을 남겼다.
이들은 사제나 수도자가 아니지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또 그것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들은 교회에서도 전례봉사나 레지오, 연령회 등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나는 하늘나라를 산 사람들을 만났다.
[출처] 마태 13,44-46 연중 제17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