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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3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탈출 40,16-21.34-38
복 음 : 마태 13,47-53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시아 최고의 갑부이자 홍콩 재벌인 이가성 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회장은 30년 동안 자기 차를 운전해 준 운전사를 치하하고자 퇴직할 때 200만 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억 6천만 원의 수표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운전사는 “필요 없습니다.”라며 그 큰돈을 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회장님 덕에 이천만 위안(약 36억) 정도는 모아놓았습니다.”
회장은 깜짝 놀라면서
“자네 월급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거액을 모을 수가 있었지?”라고 물었고,
운전사는 대답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제 뒷자리에서 전화하시는 걸 듣고, 회장님이 땅 사실 때 저도 조금씩 사고,
주식 살 때 저도 조금씩 샀더니 어느새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또 누구를 따르느냐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가성 회장보다 더 훌륭하고 더 힘센 주님을 만나고 또 따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앞선 이야기의 운전사는 회장의 말을 듣고 따랐기에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만 하느님 나라 안에서 진짜 부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특별한 이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익보다, 또 순간의 만족보다 더 중요한 것을 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쫓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가성 회장의 운전사는 지금의 만족이 아닌, 은퇴 후의 만족을 쫓았습니다.
그 지혜로움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고르지 않지요.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던져 버린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세상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 고기로 평가될까요?
그릇에 담길 좋은 고기일까요? 밖으로 던져 버릴 나쁜 고기일까요?
좋은 고기로 평가받는 모습은 주님의 뜻을 듣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쫓는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최후 심판 때에 우리 자리가 결정됩니다.
과연 어디로 가야 할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년 동안 열심히 나오던 형제님께서 2달 정도 성당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모두들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기타 반에서 활동하였고, 본당 행사에 기타연주 봉사를 하였습니다.
사진에도 조예가 있어서 본당 행사에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사진을 찍어 주었고, 가끔은 액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형제님이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추측들도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보내는 문자를 확인하지만, 답변은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단톡방에서도 나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형제님의 답변은 교우들의 추측과는 달랐습니다.
5월부터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지만 별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몸은 계속 안 좋아서 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건강이 좋아지면 다시 나오겠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는 맛과 사는 멋’이 있다면 그런 것 같습니다.
걱정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사는 맛과 멋입니다.
저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준 형제님이 건강을 회복하여
밝은 모습으로 공동체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안식년 중인 후배 사제가 신문사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냉장고에 보니 과일이 가득 있어서 물어보았습니다.
‘웬 과일이야?’ 후배 신부님에게 과일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작년에 사랑하는 딸을 먼저 세상에 보낸 부부가 있었습니다.
사목회장으로 봉사하였고, 매일 아침미사에 참례하였는데
딸을 먼저 하느님 품으로 보낸 후에는 상심이 크셨는지 한동안 두문불출하였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어찌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부부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조카 이야기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조카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몸의 반이 마비가 와서 재활치료 중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신부님은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부부는 신부님의 방문에 큰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부부를 알았지만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성당의 교우분도 아니고,
직접 찾아가서 위로할 수 있는 성격도 못 되었기에 걱정의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안식년 중임에도, 전혀 연고가 없음에도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하였고, 직접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사는 맛과 사는 멋’이 있다면 그런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분들이 하느님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이웃을 위로하고 과일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고,
악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제 마음에 죽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우리는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지만 그 신앙은 교회의 것이지 아직 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할 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성당 문을 나서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이 ‘교회의 것’으로 머물러 아직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의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믿거나 미사 참례와 기도의 의무 등을
준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삶의 비전과 가치관에 동의하는 것이고,
공동체가 제시하는 윤리적인 삶을 자기 것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란 과거의 삶과의 결별을, 과거에 쫓았던 이념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냉담을 접고 다시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 미사에 다시 참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새로운 삶이며, 과거와 결별하는 고통을 동반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오늘 나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천사들에 의해서 의로운 삶을 인정받아 하느님의 대전으로 초대되는 삶인지,
쭉정이 삶이 되어서 마지막 날에 버려지는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경고와 질타의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형제들이나 피정객들을 위한 식자재 마련차 가끔 밤낚시를 나갑니다.
작년 늦가을 10만원 내고 타는 배낚시 가서나 잡을 수 있는
팔뚝만 한 녀석들이 폭풍처럼 입질하던 순간을 기억하며, 낚싯대를 드리웁니다.
아직 사이즈가 제대로 안 나옵니다.
손바닥 미만이 대부분이라, 조심스레 바늘을 빼고 놓아주며, 한 마디씩 외칩니다.
“더 자라서 오거라.” “다음에는 엄마 데리고 와라!”
그러다가 가끔 후두둑 하는 손맛과 함께 월척이 올라올 때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입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리고는 녀석을 조심스레 어망에 담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 47-49)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끔찍한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똘똘 뭉친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어떻게 이렇게 소름이 끼칠 정도인가,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묵상해보니, 이런 스타일의 말씀조차 그 배경에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자비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부모가 있다면, 언제나 칭찬과 격려만 늘어놓지 않습니다.
자녀가 그른 길을 걸어갈 때, 죽음을 향해서 뛰어들 때,
아무리 경고하고 부르짖어도 들은 척 만 척할 때,
부모는 눈물을 머금고 강력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강력한 진노와 경고성 발언조차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경고의 말씀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건네집니다.
때로 형제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때로 엄청난 자연재해를 통해서,
나와 결코, 맞지 않는 이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전혀 원치 않았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경고와 질타의 목소리는 무엇인지?
어디에서 오는지, 잘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라는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다 들어 있으며, 온갖 고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모든 민족이 다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물은 세상이라는 바다의 파도 속으로 던져진다.
파도는 세상이라는 바닷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뒤흔들고 있다.
그물은 복음서와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안에 사는 이들을 그물처럼 모아들이셨다.
그물은 물속에 사는 온갖 고기들을 모아 물 밖으로 끌어내듯이,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참 빛이신 주님 안에 데려다 놓는다.
빛 속에서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버림으로써 심판이 이루어진다.
교회는 그물에 비유된다. 교회가 어부에게 맡겨졌고,
모든 이가 세상이라는 거친 물속에서 그물에 담겨 영원한 나라로 끌어올려진다.
그물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인다. 모든 사람을 죄의 용서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물은 마지막 때, 모든 인류를 모아들일 때,
가득 차고, 어부들은 그물을 끌어 올리고 물가에 앉는다.
현세를 바다라고 하면 물가는 현세의 종말이고 심판의 장이다.
이 그물은 종말까지 모든 물고기를 모아들일 것이다.
그때 하느님께서 지명하신 천사들이 모든 것을 끌어올려 놓고, 의인과 악인을 가려낼 것이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을 살피는 이들은 그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들이다.
현세의 종말에 좋은 고기는 바구니에 담기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48절) 버려진다.
그물에 모아들여져 물가에서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항상 변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밖은 예수께서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49-50절) 하신 불구덩이를 말한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하신다.
그 사람은 하늘나라의 기쁨에 관한 새로운 것을 꺼내올 줄 알고,
구약성경의 가르침도 이야기할 수 있는 박식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으로써 그것들을 꺼내오는 것이다.
마음의 곳간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신의 직무에서 그것들을 꺼내온다.
그가 꺼내오는 옛것들은 새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빈 콩깍지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 있지만 텃밭에는 콩이 자라고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밭모퉁이에는 가로등이 밤새 켜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 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 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 개인적으로는 죽음 앞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 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 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다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인 '그물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까지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들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강조하시면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무리 지으십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사실 그물 속에는 '온갖 것'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마치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
'세상의 끝 날'이 오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밀밭에서
가라지를 따로 뽑아 묶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하느님의 곳간에 거두어들이듯이,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어부들이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올려
쓸모없는 나쁜 고기를 추려내어 해변에 죽게 내버리고,
좋은 고기는 “하늘나라”라는 그릇에 담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그물의 비유'는 의인과 악인의 종국적인 결말이 준엄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바다에 생명의 물을 부으시어
우리를 살게 하시고, 그 물속에서 생명을 모아들이십니다.
곧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 생명의 그물에 몰아넣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당신의 그물 속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는 욥을 찾아와 충고했던 친구(빌닷)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모르겠는가?
나를 이렇게 억누르는 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를 덮어씌운 것이 그분의 그물이라는 것을!”(욥 19,6)
시편 작가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실족하여 죽을세라 염려하여 주시며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 주셨다.
~ 우리를 그물에 몰아넣으셨으며 짐을 등에 지우셨다.”(시 66,10-11)
이처럼 ‘그분의 그물에 든 물고기’인 우리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바다에 처져 있는 그물', 곧 이 세상에 쳐놓은 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바다에 처져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비유 일곱 가지를 마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의미를 깨닫고, 또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곳간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주님!
하늘나라의 그물에 저를 몰아넣으소서.
당신 말씀의 그물로 덮어씌워 당신 뜻 안에 가두소서.
세상의 바다에 저를 던지시어 당신의 그물이 되게 하소서.
온갖 고기를 모아들일 뿐 제 입맛에 맞게 고르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물일 뿐 주인이 아니듯 고기의 주인도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사탄이 비유에 약한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으로 하늘 나라의 길고 긴 비유 말씀이 끝을 맺습니다.
결국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이들만 그물에 걸려
어부의 집으로 가는 물고기처럼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늘 비유의 특징입니다.
하늘나라 비유의 목적은 하늘나라이기에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의 명확한 심판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것으로 사탄의 유혹을 구분해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의 행복만을 말하지, 끝은 흐립니다.
사탄이 제일 두려워하는 질문은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되는데?”입니다.
사탄은 구체적인 질문을 제일 싫어합니다.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Gloria Polo Ortiz)는
콜롬비아의 치과의사이자 저서 『벼락을 맞았습니다』를 썼습니다.
그녀는 성당에 다니기는 하였지만, 미사 시간에도 껌을 씹고 가정에서는 사제를 비판하며
자신의 다리와 가슴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속세의 사람이었습니다.
글로리아는 박사논문을 위해 남편과 같은 의사인 조카와 함께
의대 쪽으로 책을 가지러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벼락이 쳐서 사촌은 즉사하고 자신도 겉과 속이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몇 시간의 심정지가 있고 난 뒤 간신히 심장이 뛰기는 하였지만,
간과 폐와 신장, 그리고 내장 기관이 완전히 타버려서 회생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반면 즉사한 사촌 동생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고
특별히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글로리아의 모든 장기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몇 시간 동안 심정지로 있었지만,
뇌 손상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녀가 회복될 때 다리는 신경이 돌아오지 않아 절단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수술이 다가오자 자신이 얼마나 외모에만 치중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은 젖꼭지가 사라지거나 움푹 들어가 버렸고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기 위해 굶기를 밥 먹듯이 했던 그 다리에는
감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두 다리로 걷게 해 주신 것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리까지 치유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랬더니 신경이 돌아왔고 의사들은 두 발로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체험을 간증합니다.
하늘나라의 비유는 다 이런 식입니다.
밭에 씨가 뿌려지고, 그 진주의 가치를 알게 된 이는 이전의 자신을 죽이게 만들며,
다른 이들이 쉴 수 있는 겨자 나무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마치 좋은 물고기나 밀처럼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담긴 비유를 할 수 있다면
이제 하늘 나라 신비를 깨달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그도 비유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누구나 하늘나라를 체험한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를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할 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 당장의 쾌락을 보게 만들지만, 하느님은 장시간, 그리고 마지막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 비유에 반드시 부활의 결말이 있는 이유입니다. 사탄에겐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무당을 하기 위해 신내림을 받으면 당장은 돈도 들어오고 신병도 낫지만,
결국엔 이용당하고 버려집니다. 이것이 사탄이 속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비유도 잘 쓰지 않지만, 굳이 행복의 사례를 댈 때
전 생애나 내세에 어떻게 되는지는 절대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비유는 다릅니다. 항상 끝은 심판이 있습니다.
사탄의 옷 벗기는 법은 단순합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해서 잘 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라고 하면 됩니다.
그놈은 직설법밖에 쓰지 못합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면 행복할 것이라느니, 자신에게 절하면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느니,
뛰어내리면 주님께서 바쳐주셔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라는 유혹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그의 유혹을 받아치지만,
사실 사탄도 성경 말씀으로 유혹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으로 싸워봐야 우리는 승산이 없습니다.
서로 자기주장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례를 댈 수도 없겠지만, 만약 비유를 든다면 그 끝을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어떻게 끝나는데?”
제가 군대에 갔더니 거기서는 여자와 잠을 자본 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휴가를 다녀오면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여자친구가 면회하러 와서 외박을 다녀오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합니다.
누가 성적으로 치우쳐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아무도 대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의 운명은 좋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이러저러하면 행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행복을 말하되 여러 비유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 다 좋으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강론도 비유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는 항상 끝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로 끝나지 않는 비유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비유도 싫어하고 그 끝까지 좋은 비유는 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끝을 감추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7개의 비유들 중 마지막인
‘그불의 비유’로서 마태오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바다에 그물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47절)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친척 간이다.
바다에 그물이 쳐져 있는 동안에는 온갖 것이 그물에 걸려드는 이치와 같이
수확 때까지는 같은 밭에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된다.
그러나 추수 때에 밀과 가라지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고 운명을 달리하듯이,
그물을 끌어 올리고 나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가려진다.(48절)
이미 율법이 명시하고 있듯이 식용이 금지된 것들은 따로 골라 아쉽지만 버려야 하는 것이다.
(뱀장어, 메기 등: 레위 10,10-12 참조)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의 ‘그물의 비유’는 종국에 펼쳐질 종말 심판을 암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는 천사들이 심판관이신 人子의 명을 받들어
善人들 속에 끼어 있는 惡人들을 솎아낼 것이다.
악인들에게는 불구덩이가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며,
거기서 하는 일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다.(49-50절)
비유들을 다 알아들었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모두가 “예”라고 대답한다.(51절)
예수께서는 비유법을 통한 하늘나라 교육이 내심 잘되었다고 흡족해하신 모양이다.
제자들을 바로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52절)라고 칭하시니 말이다.
곳간에서 새것을 꺼낸다는 것은, 이제 새로이 등장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헌 것을 꺼낸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해석하는 기준은 예수님의 정신이다.
예수님의 정신 또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박 마리 안젤로 수녀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13,49-50)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실 때까지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이신데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당신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주님께서 세상 끝날에는 다시 악인을 가려내신다니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이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 막 끌어올려져
온갖 것이 뒤섞여있는 어지러움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선택되어 그분 곁에 있고 싶은 희망을 가지게 하기도 합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달려있는 문제라면
그동안 성체를 얼마나 모셨는데 악인이 될 순 없다고 다짐합니다.
아... 착하게 살아야지...
[출처] 마태 13,47-5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