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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할 때도 어떤 것에 ‘선입관’이 있으면 정확한 판단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미 가진 어떤 관념이 본문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산 말씀이므로, 우리가 말씀 앞에 나아갈 때는 참으로 존재가 비워지고(마 5:3),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마 11:29)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사도행전 10장을 읽으면서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속에 담긴 것들을 먹는 문제로 서로 의견이 대립하는 장면을 묵상하면서 많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즉 베드로가 비몽사몽 중에 “하늘이 열리면서,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땅의 온갖 네 발 가진 짐승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과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라고 하는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하였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더러운 것은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행 10:13-14)
위 말씀은 베드로가 자기에게 말씀한 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그는 주님의 말씀을 위와 같이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도대체 그의 이런 담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또 다른 말씀의 가르침에서 온 것입니다. 즉 구약 레위기 11장은 땅과 바다와 공중에 있는 동물들 이름을 열거하며 어떤 것은 먹을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먹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구약의 명령에 따라 반응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실상 ‘예표’와 ‘실재’의 구분에 눈멀어 있었고, 하나님의 더 전진된 계시에 무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골 2:16-17).
이에 관하여 신약성경 회복역 관련 각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1장에 있는 가르침과 같이,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특별한 음식은
모세의 율법에 따른 가장 강한 세 가지 규례들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더럽다고 여기는 이방인들에게서 유대인들을 구별하고 분별시킨다.
구약 시대의 이 모든 성경적인 규례들은 복음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확산되는데 장애가 되었다. (행 15:1, 골 2:16)”
지금이야 ‘복음이 온 땅 만민에게 전해져야 한다.’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만, 이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의 눈에 이방인들은 복음을 들을 자격도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주님의 특별한 ‘사전 조치’가 없었더라면, 베드로는 ‘부정한 동물들’로 예표된 고넬료가 보낸 이방인들이 복음을 전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입니다(28절). 또한 그러한 ‘베드로의 성경적인 소신’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확산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그분의 경륜에 큰 장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들을 포함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주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간의 동문서답들이 그들의 선입관 내지는 눈 멂 때문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예로 주님과 마르다는 ‘부활’에 대하여 동문서답을 주고받습니다(요11:21-26). 즉 주님은 부활을 죽은 나사로가 ‘지금’ 사는 것 그리고 그분 자신이 부활이심을 말하나, 마르다는 같은 용어인 부활을 “마지막 날 부활 때”(24절)로 생각하면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8장에서는 주님과 바리새인들이 ‘자유’(32-36절), ‘아버지’(38-44)라는 단어를 가지고 동문서답을 합니다. 이런 동문서답은 모두 사람 쪽의 선입관 내지는 눈 멂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베드로는 레위기 11장이 말하는 ‘부정한 동물들’에 대해 처음에 가졌던 관념이 주님과의 추가 대화를 통해 벗어지게 되고 다음과 같이 제대로 된 이해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속되다거나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28절).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이미 주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에게는 과연 소위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따라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면 잘 받을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복음을 전할 마음 자체를 접는 식의 차별이 여전히 존재함을 봅니다.
이 점에 관해 워치만 니 형제님은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한국복음서원, 전집, 3집 제6권)에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조언 내지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제2장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함’에서, “사람을 보고서 싫어하거나 번거롭다고 느끼거나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25쪽). 또한, 그는 “사기꾼이나 범죄자나 방종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형제자매여, 이런 이들에 있어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만 한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을 때 당신은 그들보다 좋았는가?”라고 반문합니다(35쪽).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요3:16)이라는 말씀에서 ‘세상’은 곧 ‘모든 사람’을 가리키며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의 개개인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27쪽).
이런 말씀과 앞서간 형제님의 가르침을 대할 때, 자신이 성경을 읽을 때나 사람들을 대할 때 얼마나 많은 ‘너울’을 가지고 대하는지가 그대로 폭로되는 것을 느낍니다.
오 주님, 우리를 이 상태로 그냥 두지 마옵소서!
주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모든 종류의 ‘너울’(veil)이 제거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오 주님, 특별히 당신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마음에 “너울이 제거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생명의 빛을 얻게 하소서!
이 빛이 어둠을 삼키게 하시고,
사람들을 대할 때 당신이 사람을 대하는 그 마음으로 대하게 하소서!
베드로의 실패와 그의 전진된 체험이 우리 안에서도 체험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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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 예수님,
우리 마음에 “너울이 제거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