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때는 하릴없는 청춘들이 모여 시간 죽이기 스포츠(?) 취급을 받던 당구가 인기몰이 중입니다.
그러다보니 당구 용어가 거의 왜색 짙은 것이고 외국어나 외래어 일색은 아니어서
‘토종’이나 ‘국산’으로 보이는 용어도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공끼리 부딪치는 상황은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이를 가리키는 말인 ‘키스’는
일찌감치 ‘쫑’으로 국산화되었지요.
아무래도 소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당구장 밖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일정이 쫑나다’와 같은 본래 의미를 넘어 ‘인생이 쫑나다’와 같은 확장 의미로도 쓰이지요.
공이 빗맞아 듣기 싫은 소리가 나는 ‘삑사리’는 더 극적입니다.
공이 빗맞을 때 이 소리가 나니 이 용어는 틀림없이 당구용어로 보이는데
어느 순간 노래나 말소리에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의 음 이탈이나 말할 때 성대의 오작동에 의한 높고 거슬리는 소리가
당구에서의 그 소리와 비슷하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도 했을 겁니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나 음 이탈이 일어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
이런 상황까지도 ‘삑사리 나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지요.
'삑사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명장 봉준호 감독의 입과 프랑스의 세계적인 영화잡지를 거치면서
‘예술 용어’로까지 자리를 잡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괴물> 관련 인터뷰에서 화염병 투척 장면에서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난 것에 대해
“화염병을 던졌는데 삑사리가 나서”라고 표현했거든요.
이 말에 사용된 ‘삑사리’에 감독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은 듯한데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기사 제목을 ‘삑사리의 예술’을 뜻하는 ‘L’art du Piksari’라고 뽑아
‘삑사리’를 벼락출세시켰습니다.
천덕꾸러기 당구 용어에 불과해 보이는 ‘쫑’과 ‘삑사리’의 사례는
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정체 모를 당구 용어, 많은 이들이 꺼리는 된소리로 된 단어, 동네 건달들의 노름 용어는
그에 대한 비난과 견제를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상황에 꼭 맞는 새로운 표현의 필요성에 따라 그 영역이 확장되었지요.
나아가 어찌 보면 거장의 입에는 어울리지 않는 ‘비루하고 속된’ 표현일 수도 있는데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받게 됩니다.
이렇듯 말은 단순한 순화나 통제 이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지난 총선에서 나타난 정치인의 말, 말, 말 중에서
순화되어야 할 낱말과 통제되어야 할 낱말도 가려내야 하지 않을까요?
고맙습니다.
-우리말123^*^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