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9MF-bYp3vm4?si=T8svowKToTbZCFzF
SCHUBERT - Symphonies Nº7 & Nº8 “L´inachevée” ~ Neville Marriner 지휘,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이 교향곡은 최근의 레코오드나 방송에서는 ‘제9’로 표시되는 수가 많은데,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종래의 표시는 출판 연대 순이었기 때문에 작곡 연대순과는 일치 하지 않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작곡 연대순에 따라서 ‘스케치’교향곡 (뒤의 항목 참조)을 제7로 꼽는다면 아인시타인이나 독일의 표시에 따라 최후의 이 교향곡은 제10이 되어 버fls다. 이 C장조 교향곡은 교향곡 제6부터 10년 이상의 틈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걸작이다. 그 초고 (草稿)에는 ‘1828년 3울’이라 적혀 있으며, 그가 31세가 되던 해의 봄에 완성되었다. 전곡을 연주하는 데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그 방대한 규모는 베에토벤의 제9교향곡과도 비슷하다.
표제인 “The Grosse” (The Great)는 슈베르트가 붙인 것이 아니지만 그 작품의 거대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한편 제6교향곡인 C장조와 구별한다는 의미도 있다.그러나 불우했던 천재 슈베르트는 고심 끝에 완성한 대작의 연주를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완성된 초고 (草稿)를 끌어 안고 비인의 음악 애호가 협회를 찾아가 상연 교섭을 하였으나 너무 어렵고 길다는 이유로 거절 당한 채 그 해 가을 영원히 잠든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뒤 비인을 방문한 슈만이 슈베르트의 묘에 들른 다음, 슈베르트의 둘째 형 베르디난트의 집을 방문하였다. 슈만은 전부터 슈베르트를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이 위대한 작곡가의 이야기를 친형을 통해 듣고 싶어 방문한 것이었다. 그는 이 기회에 여러 가지 유품과 유고를 볼 수 있었으며 그 유고 중에 두틈한 5선지 철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페이지를 들춰 나갔다. 그 멋진 표현에 놀란 슈만은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에게 이것을 라이프찌히로 보내도록 권유하였으며 자기가 그 연주와 출판을 알선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이 초고는 라이프찌히로 보내졌고, 1839년 3월21일, 게반트하우스의 정기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역사적인 초연을 갖게 되었으며, 역시 그 곳에서 출판되었다. 비인에서의 초연은 1839년 12월 15일에 있었는데, 최초의 2악장만 연주되었다. 이와 같이 만약 슈만이 없었더라면 ‘가스타인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소실되었을 것이다. 슈만은 계속해서 1840년, 이 교향곡에 관해서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논문에서 이 방대한 걸작을 ‘장 파울의 4권의 장편 소설에 비유 할 만큼 천계 (天界)의 유장 (悠長)함’ (himmlische Lange)이라 형용하였다. 이 형용은 이 교향곡에 논의 될 때마다 인용되었다
자료출처 : 웹사이트
https://youtu.be/Ng1parLiPyM?si=Rz2xL6kp8ldd8Ije
Schubert Symphony No 7 E major D 729 Danmarks Radio SymfoniOrkestret. Andrew Manze 지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