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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 1사무 3,1-10.19-20
복 음 : 마르 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폭의 넓이가 1미터인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바깥쪽으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걷는 것을
그 누구도 어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1미터 넓이의 길 양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안전 펜스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도 이 길을 걷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때는 너무 힘든 일이 되고 맙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길도 걸을 수 없는 길로 만듭니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을 가지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모를 경우를 생각하며 불안과 걱정 안에서
앞으로 한 발 내딛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4층 높이의 계단에서
지하 1층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운데가 뚫려있는 회전형 계단으로,
자그마치 5층 높이로 거의 15미터 정도가 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합니다.
혹시 초능력자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취된 상태에서
실수로 계단 아래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취한 상태여서 몸에 어떤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떨어져서 찰과상 입는 정도로 그쳤다고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의식이 있어서
온 힘을 줬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불안과 걱정도 온 힘을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몸에 힘을 빼고 주님께 모두 맡기는 믿음을 통해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더 기쁘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을까요?
이 불안과 걱정으로 자기 상태를 더 나쁘게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원망이 더 많았을 것이고,
다른 이를 향한 사랑보다는 자기를 배려하지 못한다면서
미움이 더 컸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걱정과 불안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바쁘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잊지 않고 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치유와 구마의 권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그분과 일치하는 기도가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더 열심히 기도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 활동과 치유 구마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관련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데,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기도하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며,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라고 알려줍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시고,
먼저 외딴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하고,
예수님 삶, 곧 이 3중 직무를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뼛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식당에서 조기구이를 먹었습니다.
큰 가시는 조심해서 버리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가시 하나가 걸렸습니다.
껌을 씹고, 양치질을 해서 없어졌지만, 순간 당황했습니다.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냉담하는 분들이 무슨 큰 이유가 있어서,
큰 사건이 있어서 냉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냉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약속이 있어서 한 주 미사에 빠졌는데
그다음부터 주일 미사에 빠지는 분도 있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오는 분이 사정이 생겨서 한 주 같이 오지 못했는데
그다음부터 주일 미사에 빠지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악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지 말고,
선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여라.”
오늘 독서에서 엘리는 사무엘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든 이렇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엘리의 말을 들은 사무엘은 이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교육(敎育)이라는 말은 가르치고 육성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찾아온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르치고 육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하느님 나라의 지식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에 대해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표징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겸손하셨고, 먼저 십자가를 지셨고,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육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지식을 전하면서 본인들은 모범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였지만 본인들은 십자가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교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말하면서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단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데
율법과 계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묻지도 않으시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시고, 눈먼 이는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십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곳으로 가자고 재촉하십니다.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반영억 라파엘 신부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쫓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한 후 하느님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하느님께 알리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의무입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는 나에게 따뜻한 이웃이 있는가?
아니면 나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이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 하여라.” (마태6,6)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며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이라고 했습니다.
혹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도하지 않고 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없습니다”(유광수).
우리가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경을 읽고,
성체 조배를 하며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원망과 미움 대신 감사와 찬양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치유하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 표현에 따르면,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간의 정황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답니다.
그 부인의 사정! 이라는 표현을 묵상하면서 속으로 좀 웃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은 다름 아닌
사위 시몬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멀쩡하던 사위 시몬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란 사람이 잔뜩 매료되어,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딸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올랐던 것입니다.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가출 하다시피한 사위 시몬,
그런 상황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결국 열병을 앓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람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그런 마음 상태를 어찌 모르셨겠습니까?
미안한 마음, 송구한 마음을 담아
장모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마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장모님! 죄송합니다. 널리 이해 해 주세요.”
그러면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니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
성공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주님 뜻에 맞게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노고와 땀방울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자상함과 부드러움 앞에 부
인의 굳게 닫혀있는 영혼의 물꼬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꽉 막혀있던 흐름이 열리니
그간의 분노와 걱정, 원망과 화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이제 일말의 미움이나 적개심도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예수님 일행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친히 아파 드러누워 있는
시몬 장모의 침상으로 다가오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가능한 일일 터인데,
황공하게도 그녀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누워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거룩한 호의입니까?
그 찰라 같은 순간에 시몬 장모는 열이 가시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딸이 뒷전이 된 것에 대한 원망도,
사위를 강탈당한 것에 대한 미운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오늘도 친히 우리에게 다가와 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자상하고 친절하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 앞에
우리가 앓고 있는 모든 영적·육적 질병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
조욱현 토마스 신부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아파서 누워있는 우리의 침대 옆에 이미 와 계시다.
그분께서 와 계신 데도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의사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셨던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다.
당신 손으로 그 여인을 고쳐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어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 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해당하며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기억되고 사랑받으시고 찬미와 감사를 받아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하루의 마감과 시작인 기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도 아직은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9)에 속한다.
아직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거기 있던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께서 회당을 막 나서시자 하셔야 할 일들이 태산같이 그분을 반겼다.
우선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러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님을 고쳐 주셨고,
해가 저물어 문밖에 모여든 수 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늦게까지 일하신 예수께서 잠시 눈을 붙이시고 먼동이 트기 전에
외딴곳에서 기도하신 후 복음 선포의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셨다.
회당에서의 예배, 예수님의 설교와 구마활동이 끝났을 때가
이미 늦은 점심시간쯤 되었을 것이다.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생각에 점심을 드실 곳이 마땅치 않아 시몬의 집을 찾아가신 것 같다.
그런데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 있다고 한다.
熱病이라면 온 몸에 열이 나서
두통, 한기, 식욕부진, 수면 부족 등 증세를 보였을 것이다.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어떤 장면에 이르러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많은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이 구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시몬이 누구인가?
이미 결혼을 하여 처자식과 장모까지
변변찮은 어부의 직업으로 먹여 살려야 했던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웬 낯선 사람의 “나를 따라 오너라”(1,17)는 말에
즉각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졌으니, 장모의 마음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이 火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절)고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두 사람의 마주친 시선과 짧은 접촉은 늘 많은 생각을 주는 장면이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을
시몬의 집 앞에 데려왔고, 동네 사람들까지도 모두 모여들었다. (32-33절)
해가 지고 난 뒤에 사람들이 이 일들을 한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라.”(출애 20,8)는 모세의 율법은
안식일에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어야 하며,
병자들이나 짐을 들것에 실어 옮기지 못하는 등
많은 安息의 규정을 두고 있다.(예레17,21-22; 요한 5,10)
그런데 유다인들은 해가 지고 나면 이미 다음 날이 되는 관습을 따른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우리가 두 손에 무엇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더 받을 수 없으나,
빈손으로 있다면 가득 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수께 몰려온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는 ‘빈손의 사람들’이었다.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그것은 해가 지고 밤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루는 새벽까지 계속된다.
바로 동이 트기도 전, 이른 새벽까지가
예수님의 하루 마감이며, 동시에 새날의 시작이다.
그 기준은 바로 기도이다.
하루종일 가르침과 치유 활동으로 지친 몸은 휴식과 잠으로 풀 수 있겠지만,
복음 선포의 원동력은 아버지와의 만남과 대화, 즉 기도로 회복된다.
이점을 예수는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견인하는 원동력이며, 하루의 마감이자 시작이다.
시몬과 그 일행도 예수님을 찾아다니지만 말고(36절),
제자 됨의 기본인 기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의 자녀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제자는
배우고 익힌 것을 삶으로 증명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이는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을 찾는 지속적인 부르심에
그저 예하고 주인에게 달려갑니다.
의심을 하거나 불만 불평을 하기보다
주인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합니다.
이에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로 이끌었고
사무엘은 하느님의 종이 되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이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외딴곳에서 기도하셨을 뿐
예수님을 찾는 이들에게 나아가십니다.
그 일을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며 우리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일까요?
그렇다면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일까요?
배우고 익힌 것을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일까요?
하느님이 맡기신 일을 그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었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가에 피어나는 꽃과
그 길에 동행하는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며
그저 하느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주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 희망을 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