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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 창세 9,8-15
제2독서 : 1베드 3,18-22
복 음 : 마르 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 다녀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순례 코스 중에서 광야 체험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몇 시간을 보내면서 광야가 어떤 곳인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광야는 사막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매우 덥고 따가운 햇빛을 맞으면서 살아야 했지만,
약간의 풀도 있고 또 물도 구할 수 있기에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와 같은 풍요로움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몇 시간 체험은 가능해도, 며칠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하느님 체험을 위해 많은 은수자가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고 하니, 사람들은 하느님 체험을 위해 광야로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광야에서 하느님 체험이 가능할까요?
단순히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장소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요?
세상과 동떨어진 이곳에서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볼 것이 너무 많습니다.
즉, 정작 하느님을 보는 데는 소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볼 것이 없어서, 하느님께 집중하는데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수자가 이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광야는 피해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찾아가는 곳이 되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이스라엘을 찾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도 세상에 파묻혀서 광야처럼 고통과 황량함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도 광야로 가셨습니다.
가뜩이나 불편하고 황량함이 가득한 광야인데, 여기에 사탄의 유혹까지 받게 되십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40일 동안을 말이지요. 어려운 장소에서 더 어려운 시간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싶은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유혹받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도 광야에 가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역시 유혹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장소로 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받으신 것을 왜 나는 안 된다고 말할까요?
그 시간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일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기쁜 소식이지요.
그런데 정작 그 주인공인 우리는 광야와 같은 곳을 피하면서
철저하게 쉽고 편한 것만을 쫓았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새로운 때”와 “그 때에 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끝부분을 들려줍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홍수의 물로 씻겨 진,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게 됩니다.
곧 “새로운 때”, “회개의 때”를 알립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노아의 방주를 ‘세례’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로 말하면서,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1베드 3,21)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새로운 때”,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바른 양심을 입을 때”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시어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마치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광야’에는 사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활동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시험을 받는 장소임과 동시에, 은총의 장소이기도 하고,
“은총의 때”를 몰고 오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모세에게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에서 나와 주님께 제사를 드린 곳이요,
주님의 자비와 보호를 체험한 곳이었고, 엘리야에게는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한 곳이요,
호세아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끌려 나갔던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광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그야말로 ‘광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순례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사랑의 외침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발설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것은 “때”가 찼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요,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이후
줄곧 준비해 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제시해 주는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가까이 있다’는 말로 이미 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과 함께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져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루카 11,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믿음에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이미 먼저 선사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회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는 선사 되었습니다.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며, 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 ‘회개’란 이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 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에서의 ‘회개’란 ‘뉘우치고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인 뉘우침과 동시에, 돌아오는 인격적인 행위를 포함합니다(슈브. 메타노이아).
그러니 단지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곳을 먼저 알아야 진정한 회개는 가능해집니다. 그
것이 바로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인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로의 돌아옴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건설되도록 자신을 수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느님 사랑 안으로의 전환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가 아닌,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다스리고 실현시키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 들이는 일이요,
하느님의 의로움과 뜻에 전적으로 돌아서는 일, 바로 그 일 말입니다.
단지 도덕적인 참회와 윤리적인 통회만이 아니라,
생각과 태도와 가치관과 삶의 전인격인 전환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제 삶 안에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사순절은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더 깊이 느끼며
파스카의 빛을 향한 광야의 고달픈 길을 가는 여정이다.
이 시기는 참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광야의 시련, 하느님께 대한 체험, 마음의 정화 등이 오늘의 주제이다.
독서에서는 노아의 홍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아와 그 아들들은 홍수의 물로 씻긴 새로운 인류를 의미하며,
하느님께서는 무지개(창세 9,13)라는 평화의 징표를 통해
이 인류에게 생명과 사랑을 영원히 베풀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창세 9,14-15).
베드로 사도는 홍수가 많은 사람에게 멸망의 원인이 되었지만,
비록 소수라 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1베드 3,21).
세례의 물을 통하여 묵은 인간을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이며 우리의 파스카이다.
사순절은 세례를 통해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충실성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함을 재확인하고 노력하는 시기이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사탄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 동시에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따름으로써
내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광야에서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12-13절)와 첫 번째 복음의 선포 이야기(14-15절)이다.
이 둘을 연결하면 사순절의 총체적인 의미가 나올 수 있다.
다른 복음에서와 같이 마르코 복음에도 예수님의 유혹이 나오지만,
다른 복음과는 달리 간결하게 표현하면서 풍부하고도 효과적인 면이 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유혹은 예수께서 광야에 있는 사십 일 동안 계속된 것같이 보인다.
이것은 그 유혹이 극복하기가 힘들고 피곤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악의 세력과의 격렬한 싸움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에 걸쳐
악의 세력과 싸우시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사탄을 거슬러 하는 싸움은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께서 당하신 유혹이 어떤 것인지는 전해주고 있진 않다.
그 유혹은 십자가를 통해야 하는 어렵고도 험난한 메시아사상과는 반대로
쉽고 승리감에 넘치는 메시아 상으로 바꾸려는 술책이다.
이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후에 사탄이라고 크게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3) 하신 것과 같다.
이 유혹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될 것이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당신 자신을 맡김으로써 극복하실 것이다.
이러한 유혹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올 유혹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곯아떨어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 사순시기에도 우리에게 하실 것이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
오늘 복음에서 광야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광야는 무한한 고독의 상징처럼 다가오지만,
광야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이루게 하는 곳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모든 자신감을 털어버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신의 무능력, 나약성, 무력감을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되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광야에 머무시는 동안에
하느님과 더욱더 깊은 만남을 체험하신다.
광야에서 예수께서는 사탄의 정면 공격을 물리칠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더욱더 강한 현존도 체험하신다.
이 광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보내신 분이
바로 성령이심을 마르코 복음에서도 강조하고 있다(12절).
이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셨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 상으로 거룩한 숫자이며 광야의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이 사십일이라는 기간의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존재가 무엇임을 깊이 깨달을 때야
하느님께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가졌던 그 자세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느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새롭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침묵의 공간을 즉 광야를 만드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 속에서 왜곡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쳐 이기심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하고 평화를 주시며 인간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다.
천사들의 시중(13절)은 바로 이 승리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변화도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광야 체험을 하신 후에 제일 먼저 선포하시는 내용이
사탄과의 싸움을 통해 당신 안에 실현하신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사순절이 요구하는 회개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탄을 몰아내고
하느님을 우리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길고도 험한 광야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유혹은 은총의 시작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용기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유혹에 관해 묵상하며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시조 한 수 읊어 드리겠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는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창건하려는 야심을 품은 이방원이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시조 한 수를 들려주면서 마음을 떠본 내용입니다.
칡덩굴처럼 서로 얽혀서 옛 왕조, 새 왕조 따지지 말고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에 정몽주가 시조 한 수를 지어 변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정몽주는 이런 충절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100여 년의 박해 속에만 여명이 넘는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온갖 유혹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임 향한 일편단심”을 버리지 않은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청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온갖 허례허식과 마귀를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서약을 잘 지켜야 합니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주님보다 세상의 소유와 지배, 재물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온갖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신부가 된 지 10여 년 만에 사회복지 공부를 했습니다.
조치원역에서 서울로 야간열차를 이용하며 대학원에 다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충남 조치원역에 새벽 0시10분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역 앞을 나오기가 무섭게 아가씨들이 달라붙어 말합니다.
“오빠, 따뜻한 방 있어요, 쉬고 가세요!”
그러면 제가 “내 방도 따뜻한데요!”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로만 칼라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들은 여전히 달라붙었어요.
요즘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기분이 좋았을까요? 한번 가고 싶었을까요?
여러분 좋은 대로 생각하십시오.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지쳐서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따듯한 방 있어요!”하고 아가씨가 달라붙는다면 한 번쯤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니 남편에게 바가지 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내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는 사람이야 어디다 한눈을 팔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악의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내가 약해졌을 때를 이용하는 법입니다. 교묘하기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간교한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데
“여자가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다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다 주었다”(창세3,6). 고 했습니다.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게 문제입니다.
다른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재물이나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밟고 올라서게 하는 죄로 이끕니다.
시기 질투하는 마음, 이기심, 미움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식욕이 때로는 탐식하게 만들고 성적인 욕망이 음란의 죄로 이끌고,
휴식에 대한 욕망이 게으름에로 젖어 들게 합니다.
잠언에 보면
“달콤한 말로 꾀고 꿀맛 같은 말로 유혹하자 젊은이가 따라나서는데
마치 푸줏간에 끌려가는 소와도 같이 올가미에 걸려드는 사슴같이
제 발로 창애에 걸려드는 새 꼴이 되어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따라가다가
결국 간에 화살이 박히고야 말리라”(잠언 7,21-23)하고 말합니다.
결국 유혹이란 부정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를 꼬이는 것을 의미하고,
올바른 생활 원칙에서 돌아서게 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첫째로 자만해서입니다.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엔 나밖에 없다’고 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이사47,10).
둘째로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1역대28,9).
집회서를 보면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42,20).
잠언서에는
“사람의 길은 주님 앞에 펼쳐져 있고,
그분께서는 그의 모든 행로를 지켜보신다”(잠언5,2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남이 모른다고 생각할 때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욕심에 끌려서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면 좋겠는데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심이 우리를 흔듭니다.
정말이지 그칠 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야고 1,14-15).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해 가정이 파탄되기도 하고, 재물에 눈이 어두워 속이고,
뇌물 받고 그러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뇌물 받아 망한 사람 많지만 요즘 대통령 주변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국회의장, 국회의원, 경찰청장 대기업 사장 등 모든 명예를 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술과 도박, 권세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분도 많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카드 빚 쓰다가 감당 못 해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긍정적으로 볼 때 은총의 시작입니다.
이 유혹을 통해서 나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내 자신의 상태를 결정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유혹은 주님께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유혹에서 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6,11-13).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마태26,40-41)한탄하셨습니다.
결국 기도함으로써 유혹을 극복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 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0-17)하고 권고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히브2,18).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혹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유혹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유혹은 더없이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대답하길 원하십니다.
따라서 어떤 유혹 앞에서도 분명히 대답하십시오.
“좋은 일에는 ‘예’, 나쁜 일에는 ‘아니오’.
하느님의 뜻에는 ‘예’, 인간의 뜻에는 당연히 ‘아니오’”,
대답은 이렇게 하시면서도 속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열차를 타고 의자에 앉았는데 옆자리에 할머니께서 앉으셨답니다.
할머니께서 피곤하신지 꼬박꼬박 졸다가 젊은이에게 기대서 주무시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어느 날 복이 많은지 예쁜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앉는 겁니다.
여인도 피곤했는지 졸더니만 급기야 젊은이 어깨에 기대어 자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혹 우리의 마음이 아닌지요?
세례를 받은 후 더욱 더 심하게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될 때,
왜 나에게는 이런 유혹이, 시련이 오느냐 투덜대지 말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신 후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았고
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루카복음을 4,1-1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1). 돌 더러 빵이 되게 해 보라는 악마의 경제적 유혹 앞에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셨습니다.
2). 내 앞에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정치적 유혹 앞에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떠받쳐 주리라고 하며
자신을 위해 기적을 남용하라는 유혹 앞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시며 유혹을 멀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습니다.
다음 기회를 노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도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힘을 입어
얼마든지 유혹을 극복할 수 있고 은총의 기회로 만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바닷가에 가보면 벼랑 끝의 소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고 가지를 튼튼하게 뻗었습니다.
우리도 유혹과 시련의 시험을 통해 더 강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곳에 구원해야 할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목마르고 배고프고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온갖 유혹이 있는 이 세상이 광야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몸소 유혹을 받으시고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그분이 유혹을 받으셨기에 유혹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쉽게 유혹에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유혹 당할 수 있는 기회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 비쭉, 작심삼일입니다.
아무쪼록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지 말고,
주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여 은총으로 만드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란 지옥의 원인이 나 자신임을 확실히 아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왜 복음을 믿기 위해 회개가 필요한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유혹은 한 순간 받는 무엇이 아니라 매 순간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유혹은 매 순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것이 유혹이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유혹을 이기셨더니 세상을 구원하는 자가 되시고
결국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따르라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은
나 자신을, 그것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회개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의 결단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랑에게 지옥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쓴 『닫힌 문』(No Exit)이란 연극에서 왜 타인이 지옥이 되는지 설명합니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지옥의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 죽어서 이 방으로 들어왔지만,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고 인정받으려 하고 사랑을 갈망하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공간이 됩니다.
하지만 혼자 외롭게 되는 게 더 큰 고통이라 여기기에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삽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세상이 지옥이라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지옥이 타인의 탓일까요?
타인에게 집착하는 자기 마음 탓이 아닐까요?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느님이고 나는 그 사랑에 내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러면 부활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죽음의 보상을 줄 신의 존재를 거부할 때 의미를 잃습니다.
인도 영화 ‘삼사라’에서 사람은 누구나 물 한 방울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마르지 않게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도를 닦는 것임을 말합니다.
결론은 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바다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에 투자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마치 사막의 펌프처럼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그 한 방울의 물을 지키려는 마음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펌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된 주유소가 있고
그곳엔 물 펌프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목이 말라 실신할 지경에 이른 나그네가 주유소의 물 펌프를 발견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엔 바가지의 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 펌프 밑에는 엄청나게 시원한 지하수가 있어요.
누구든지 이 펌프 물로 갈증을 해소하세요.
명심하세요. 펌프 앞에 놓인 바가지의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이것은 ‘마중물’.
잊지 마세요. 다음 분을 위해서 ‘마중물’을 꼭 채워 놓고 가세요!”
이 한 방울의 물을 바치는 게 에덴동산의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뱀입니다. 지옥은 이 뱀, 곧 나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에게서 탈출시키려 합니다.
모세가 오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파라오 때문에 지옥을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가 곧 지옥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모세를 믿게 됩니다.
가나안 땅, 곧 하느님 나라는 자기 안의 파라오를 배신함으로써
얻는 에너지를 갈아 넣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일이고 생명은 곧 피입니다.
돈도 피이고 음식도 피이며 명예도 피입니다.
이 피를 갈아 넣지 않으면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회개는 지혜의 빛이 요구되고 그 지혜의 빛으로 사랑의 삶을 살겠다는
착한 뜻을 만들고 착한 뜻은 그것과 반대되는 나의 뜻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뜻에서 휙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을 향하게 될 때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나를 가만히 두면 지옥에 머물게 되어
나자신을 사랑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마르지 않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복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이 지옥의 땅이고 복음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1982년 서울 가톨릭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동창 중에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이 있습니다.
두 신부님 모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분입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지난 5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전임 신부님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전에
7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신부님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저와 초등학교 동창이고, 같은 본당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함께 했기에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죽마고우입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신학생들을 위한 영신수련 피정을 함께했습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영적으로 훌륭하십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사목의 경험이 풍부하십니다.
한 분도 아니고 전임 신부님 두 분이 모두 저와 동창 신부님이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부족하기에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성전 신축이라는 씨를 뿌렸습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깊은 영성으로 물을 주었습니다.
저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표징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표징을 통해서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로도, 불로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곳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할 수 있는 표징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댈러스 교구로부터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할 수 있다는 공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로부터 댈러스 한인 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하라는 파견을 받았습니다.
저의 표징은 서울대교구의 파견과 댈러스 교구의 임명이라는 공문입니다.
공적인 표징은 그렇지만 제게는 또 다른 표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예수님처럼 착한 목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또 다른 표징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바른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바른 양심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큰 덕목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부끄러움을 몰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던 자캐오는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식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원리와 기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廣野로 나가셨다고 말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신앙 초기에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임을 자각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이 당신 생애의 어느 시기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가셨다는 것은
그분이 그때부터 하느님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40이라는 날의 수는 옛날 모세가 40일동안 시나이 산에서 단식했다(탈출 34,28)는 사실과
엘리야 예언자가 40일을 걸어가서 호렙산에서 야훼를 만났다(1열왕 19)는 故事들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들과 같이 하느님에 대해 깊은 체험을 하는 기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을 오늘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말하면,
율법과 성전에 예속되어 살던 때는 지나갔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삶 안에 하느님이 일하시게 살아서,
하느님이 우리의 자유와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적이라 말하던
율법과 성전 의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처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實勢인 율사와 사제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과 제물 봉헌을 절대화하여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왜곡시킨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어느 날, 율사 한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그가 슬기롭게 대답한다고 하시며
“당신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마르 12,34)는 말로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친밀한 관계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부모 앞에 자녀는 지키고, 바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아 출생하였고,
돌보아 주고 가르치는 부모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모로부터 은혜로운 베풂의 흐름이 있어 시작된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 은혜로움에 대한 자각을 儒敎 문화권에서는 孝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에 대한 효를 넘어 자녀는 부모로부터 베풀어진 은혜로운 사랑을
부모와 주변의 모든 이에게 실천해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부모의 은혜로움에 비추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아듣고,
배워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밭에 익어가는 곡식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셨습니다.
모두가 은혜로운 하느님이 베푸신 결과였습니다.
그 은혜로움을 자유롭게 실천해야 하는 우리 인간이라고 예수님은 믿었습니다.
베풀고 살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실천하라고 주어진 우리의 자유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자유롭게 배우듯이,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 자유로이 실천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겁내지 마시오, 작은 양 떼들!
그대들의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에게 기꺼이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루카 12,32)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來世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하느님이십니다.
현세에서 하느님의 자녀이면, 내세에서도 그분의 자녀일 것입니다.
내세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내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성서는 그분이 하느님과 함께 살아 계시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더 말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넘어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깨닫는 길은 그분의 베푸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悔改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과거를 샅샅이 성찰하여 죄를 찾아 아파하는 自虐的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는 과거를 돌아보고 부르짖는 절망의 ‘내 탓이오.’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뒤를 돌아보고 살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눈, 코, 입, 귀 등 우리의 감각 기관들이 모두 앞을 향해 있습니다.
뒤는 잠시만 돌아보고 앞을 향해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 과거를 잠시만 보고, 앞에 계신 하느님을 향한
자기 삶의 궤도를 수정하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단편적입니다.
우리는 속단하고, 미워하고, 분노합니다.
회개는 이기적이고, 단편적인 우리의 行步를
하느님의 은혜로운 사랑에 비추어 조정하는 작업입니다.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의 자유 안에 살아있게 하는 작업입니다.
이기적 욕심으로 복음을 읽으면, 복음은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없습니다.
복음은 지혜도, 깨달음도 주지 않습니다.
복음에 접근하는 사람은 이기심의 수위를 낮추어야 합니다.
「성거」가 말하는 유혹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하느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대단한 고행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단편적입니다.
자기만이 正義를 다 알고 있는 듯,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은
결국 그 정의 때문에 사람들에게 횡포하고 피해를 줄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신앙인은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려 노력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헌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황량한 사막을 당신의 거처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이웃에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빌며 사는 자유로운 신앙인의 행보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잘못된 우리 자유의 궤도를 수정하여,
베풀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일이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순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과거만 보고 가슴을 치자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등지고 작심하여, 살벌하게 살자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여 주변을 기쁘게
또 살맛 나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박 에끌레시아 수녀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
이는 마하트마 간디의 통렬한 성찰로 새겨진 일곱 가지 악덕이다.
이 일곱 가지 악덕에 송경동 시인은
“저항하지 않는 인민”을 더하여 <8대 죄악>이라는 시를 썼다.
사순 제1주일을 맞이하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회개 없이 복음을 믿을 수 있을까?
복음 없이 기쁠 수 있을까?
기쁨 없이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을까?
에바그리오의 여덟가지 악한 생각을 되새겨본다.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나태, 허영, 교만...
이 악한 생각들을 끊어버려야 하는 40일의 여정!
회개 없는 사순은 기쁨없는 부활이 될 것이다.
오늘도 사순 봉재장을 눈앞에 두고 성호경을 긋는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