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미카 7,14-15.18-20
복 음 :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며느리가 요즘 성당에 다니는데, 글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하대.”
이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들이 “아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험하게 죽었대?”라고 묻자,
할머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어.
글쎄 우리 며느리가 매일 십자가 밑에서 가슴을 치면서 ‘제 탓이오’를 외치는 거야.
이 모습을 보니까 며느리가 이 죽음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지? 신고해야 할까?”
잘 몰라서 하는 대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은 며느리의 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역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이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탓이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탓을 외치면서 울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에 쉽게 빠져드는지,
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 것을,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 말씀을 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의 모습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이 비유 말씀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작은아들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을 떠나서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큰아들 역시 방황 중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고 스스로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우리입니다.
외적으로도 방황하지만, 내적으로도 큰 방황의 삶을 삽니다.
아버지 집이 그렇게 좋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삶만 살려고 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황을 멈추고 이제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 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 갑니다.
그리고 작은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다인이 큰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한다.
아버지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이러한 삶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며, 아버지를 떠난 삶이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린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15절)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절).
그는 죄인이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 즉, 다른 민족 형제들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후배 신부님들과 뉴욕에서 댈러스까지 자동차 여행을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제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까지 가는 길에 동행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운전해 주었고, 가는 길에 숙소를 예약해 주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던 것처럼
먼 길을 가는 제게 신부님들이 함께해 주니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여행 중에 교회에 관한 이야기, 정치에 관한 이야기,
사제 생활에 관한 이야기, 문학에 관한 이야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기에 여행은 순조로웠습니다.
숙소를 예약한 신부님은 그동안 쌓아 놓은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저렴한 가격에 업그레이드된 숙소를 잡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도 업그레이드된 항공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저의 마일리지를 보고서 저도 얼마든지
업그레이드된 숙소와 항공을 예약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비로소 보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에도 업그레이드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일리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저는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능력이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맬지라도
회개하면 밝은 광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방탕하여 하느님과 멀어졌을지라도
회개하면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오로 사도는 회개하였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니교에 심취했고,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개하였고, 위대한 교회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회개하였고, 쓰러져 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상을 간직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회개하였던 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회개를 보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모두 ‘회개’하여 업그레이드 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면서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업그레이드된 신앙을 선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까?
아들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
돌아온 아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아버지의 집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지 못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잘해 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아들이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던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큰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것은 잘못한 이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태도입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집을 나간 둘째 아들들 생각하였습니다.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몸은 비록 하느님 나라에 있었어도 마음은 둘째 아들과 함께하였습니다.
그것이 관심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몸은 천국에 있다고 해도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멀리 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 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 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같았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살았으니 오랫동안 아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사람을 살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누군가가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명료하게 소개하는
성경 구절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루카 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이른바 ‘탕자의 귀향’ ‘돌아온 둘 때 아들의 비유’를 선택하겠습니다.
둘째 아들의 행실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 종종 있는가 봅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앞당겨 받는 그런...
둘째 아들은 재산을 분배받자마자 이게 웬 떡이냐며, 멀리멀리 떠나갔습니다.
갑작스레 생긴 돈은 그 행방이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흥청망청 유흥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중의 돈이 사라지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친구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도움을 청해도 언제 봤냐는 얼굴입니다.
완전 상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마침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동물, 불경스러운 동물로 여겨지던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만나면 드릴 사과의 말씀을 되뇌면서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저 멀리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죄인인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이 복음 구절의 주인공이요 주체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탕자의 귀향이라기보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
같은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탕자에만 시선을 지나치게 고정시킵니다.
탕자가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동료 사제 한 분이 이 복음 구절을 주제로 미사 강론을 하는 중이었는데,
탕자의 그릇된 행동에 필이 확 꽂혀 탕자 야단치느라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흘렀습니다.
탕자가 돌아와야 강론이 마무리 될텐데, 안 돌아오니 다들 마음을 졸이던 중, 한 형제가 외쳤습니다.
“신부님! 음식 다 식는데, 이제 그만 탕자 돌아오게 하시죠!”
우리도 많은 경우 그릇된 행동을 한 둘 때 아들에게만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의 죄목을 나열 하는데 신경을 씁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신구약 성경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비유의 주인공이신 자비하신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는 처절한 변화(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복음 15장에는 세 편의 비유가 실려 있다.
그것은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이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마태오복음(18,12-14)에도 있으나
나머지 비유는 루카복음 고유의 특수사료에 속한다.
예수께서 세 편의 비유들을 연이어 들려주신 이유는 15장의 도입 부분에 밝혀져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하였기 때문이다.(1-2절)
세 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이는 곧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시 찾으신 후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ㅐ유’가 선포된다.
이는 루카 고유의 사료이면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로서
때로는 ‘탕자의 비유’로, 때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로 소개되기도 한다.
당시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세리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께 모여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앉혀 말씀의 음식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해명이다.
탕자와 그에 대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는 세부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충격과 감동의 차원에로 聽者들을 초대한다.
비유는 크게 작은아들의 타락, 아버지와 탕자의 관계 회복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탕자의 처절한 깨달음이, 그 마지막에 회복의 불가능을 시사하는
큰아들의 正義가 각각 그 고유의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① 타락의 단계 : 타락의 과정은 작은아들의 자기 고집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로부터의 이탈은 放縱을 초래하고, 방종은 곧바로 육신의 욕심,
즉 放蕩과 情慾으로 치닫게 되고, 그 결과는 굶주림이다.
이는 곧 영적인 빈곤으로 표현된다.(11b-17절)
② 깨달음의 단계 : 영적인 빈곤을 깨닫게 되면 이제 회복과 복귀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회복과 복귀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결심과 회개이다.
진정한 결심과 회개는 때때로 인간성 자체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각에 그 뿌리를 둔다.(18-19절)
③ 복귀와 화해의 단계 : 이제 복귀가 진행된다.
진정한 복귀는 肉과 靈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 변화는 처음부터 이탈된 장본인(아ㅓ지)에 의한 수용을 필요로 한다.
수용은 변화를 전제로 하여 화해와 화목을 조장하지만,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보여준 인내와 기다림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인상적이다.(20-24절)
④ 제3자의 입장 : 이제 큰아들의 입장이 표명된다.
큰아들이 전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제 3자는 아니지만,
타락과 회복의 과정에서 용서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正義를 대변한다.(25-32절)
어제는 우리가 마태오복음의 ‘악독한 포도원 소작인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마태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소작인의 악행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끝장을 내야 하는 정의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카복음은 정의보다는 慈悲를 강조한다.
루카에게 있어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은 정의라기보다는 자비이다.
즉 심판이기보다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인에 비유된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회개함으로써 벌어들인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아버지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다.
오늘 비유에서 보듯이 탕자인 작은아들(죄인)과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한 큰아들(의인)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의 태도는 두 가지로 드러난다.
작은아들에게는 용서와 기쁨의 태도를, 큰아들에게는 설득과 달램의 태도를 보인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잘못을 응징하려는 태도는 正意를 대변하는 것이며,
흔히 제3자인 우리들의 입장도 이와 같을 수 있다.
무릇 죄인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은 응징하려 든다는 말이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21절)는 점이 變數이다.
사실, 이 변수에 관계없이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인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32절)는 데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생명에 대한 기쁨은
그 어떤 것도 不辭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인 것이다.
혹자는 인과응보 정당한 심판도 정의도 불사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탓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탕자의 입장이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줄 아는 탕자 또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기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줍니다.
작은아들의 행동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멀어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멀어지려고’ 자기 것을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이 멀어짐의 결과는 짐승보다 못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라는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 다가오는 아들을 발견하고
오직 “가엾은 마음”으로 달려가 그를 껴안습니다.
그 어떤 분노나 훈계도 꾸짖음도 없습니다.
그저 열렬한 환영과 ‘받아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 독서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선언합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멀어진 존재를 돌아오게 하는 것은 ‘정직한 사랑’뿐입니다.
그리고 그 정직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그 온전한 사랑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사순시기가 우리에게 주는 은총입니다.
그분께 돌아갈 때 우리는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