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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8일 성주간 목요일 - 주님 만찬 성목요일
제1독서 : 탈출 12,1-8.11-14
제2독서 : 1코린 11,23-26
복 음 : 요한 13,1-15
1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2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4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6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7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8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9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11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넘길 자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13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14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여름방학이 되면 제 바로 형님과 함께 시골에 가곤 했습니다.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또 배를 탄 뒤에 한참을 걸어가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계신 시골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먼 거리였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 도착하고 나서는 너무 신났습니다.
개울가에 가서 놀기도 하고, 고양이, 개, 소 등의 동물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올챙이 잡고 개구리 잡던 것 역시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지요.
이렇게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았지요. 온몸에 달라붙는 모기떼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상황이 뭐가 재미있을까 싶습니다.
당시 시골에는 제 또래도 없었고
그래서 유일하게 놀 수 있는 대상은 같이 간 형뿐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면,
아마 “저는 그런 곳에서 못 살아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긴 게임에 빠진 아이의 스마트폰을 빼앗아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화가 나서 불을 질렀다는 아이도 있더군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뭐가 재미있냐?’고 하겠지만,
제 기억 속에서 시골 체험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뭐라 하셨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이분들의 음성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래도 옛날의 몇 장면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선명한 기억을 지금 흐뭇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이 자기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소중한 순간이고 미래를 잘 사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더 많은 것을 가져야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화려한 것, 멋진 것보다 오랜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장면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장면에는 늘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따뜻하고 행복했습니다.
지금 내 자리도 먼 훗날 기억에 오래 간직될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을 지냅니다.
이날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있음에도
제자들을 향해 또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주님을 봅니다.
그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느님께서 무릎을 꿇고 인간의 발을 씻겨 주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집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전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오늘의 전례를 통해 사랑을 다시금 바라보고
또다시 그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식사 자리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마지막 자리입니다.
이를 가리켜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십니다.
곧 당신의 유산으로 고귀하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명을 물려주십니다.
이름하여, 성체성사를 설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를 유산으로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쟝 바니어 표현을 빌면, 당혹스런 쇼크요 스캔들입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신 까닭입니다.
영광스럽고 드높으신 분이 권위도 없이 천박하게 겉옷을 벗어 재끼고,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노예나 하는 일을 하는 것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발 씻김’ 안에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그 무엇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몫’에 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여기에 ‘발 씻김’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곧 ‘발 씻김’은 단지 섬김의 본보기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넘어서,
무릇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성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무한한 행위요,
동시에 죄를 씻어 주는 용서와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투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가 됩니다.
성체인 이 섬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 주게 됩니다.
‘섬김’은 이렇게 구원의 성체가 됩니다.
곧 ‘섬김’은 성체성사가 현실 속에 실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인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몫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결국 예수님과 함께 구원 사업의 ‘몫’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 섬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섬김을 받은 자라야, 받은 바로 그 섬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양도가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섬김’은 예수님을 내어주는 성체가 되고, 신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생명의 전달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몫을 함께 나누고,
당신의 유산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행위요, 성체성사가 됩니다.
동시에 죄를 씻어 주는 용서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발 씻김의 성사는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화해성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발 씻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 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섬김’은 서로의 용서와 친교를 이루며, 화해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할 베드로와 유다와 십자가 아래서 옷마저 벗어버리고
도망쳐 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전에 이미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
이토록 발을 씻는 일은 깨끗함을 완성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일은 그 깨끗함의 완성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진정한 파스카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고 압도당합니다.
이 거룩한 섬김, 이 놀라운 ‘발 씻김’으로, ‘당신의 몫’을 건네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전달하는 이 놀라운 감격의 성체성사요 화해성사인 ‘발 씻김’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마침내 ‘구원의 몫’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도 이 고귀한 유산을 함께 나누고 전달해야 합니다.
형제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이 바로 그 일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주님!
제 영혼을 씻어 주소서.
당신 사랑을 입고, 생명을, 몫을 얻게 하소서.
섬김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낮아져 높일 줄 알고 작아져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쪼개지고 부서져 내어주고 파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사랑은 지치지 않고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그분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가슴을 애달프게 하고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떠나기 전에 더 잘해 주려고 합니다.
저며 오는 아픔을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헤어짐을 안타까워하시며
평소보다 더 간절히 그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생각이나 이론, 말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 행동이었습니다.
거창하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더러워진 발을 씻어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당신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발은 가장 더러운 부분입니다. 사랑이 큰 만큼 그곳을 닦아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구체적 행위입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씻어 주는 것, 닦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장 아픈 곳에 함께하는 행동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서 사랑을 하겠다고 하면
그는 평생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정체를 파악하고 난 뒤에 하느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의 정체를 다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이 깊어집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13,15)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언행일치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으니,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다 알아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안 만큼만이라도 실천하면 복이 옵니다.
그리고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았다면 아는 바를 미루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시길 바랍니다.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허리를 굽혀 발을 씻어 주는 모습에서 그 일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바닥으로 내려오심은
곧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행하는 봉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닦는 행위는 용서와 자비를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발뿐이 아니라 더 추악한 죄를 씻어 주십니다.
발을 내밀기도 전에 먼저 물과 수건을 준비하셨습니다.
항상 씻어 주시고 무엇이든 용서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며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하늘 같은 스승이 제자들의 발치로 내려오셔서
용서와 자비, 사랑과 봉사의 행위가 계속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시고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주십니다.
성체는 당신의 살과 피를 몸소 내어주시는 사랑 덩어리입니다.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이 되어 우리를 풍요케 하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으로 영원한 천상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비롯하여 다른 성사와 더불어
은총의 전달을 위해 성품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사제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당신의 살가운 사랑의 전달을 위해 사제를 선택하셨습니다.
허물과 부족함에도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를 뽑아 당신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에
하느님의 능력이 더 간절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체성사와 더불어 성품성사가 제정된 날이기에
‘사제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제를 영적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과연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권위만 내세우고 무작정 따라오라는 식의 아버지,
자기중심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열린 아버지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예수님처럼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자녀의 발을 씻겨 주는 겸손의 아버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를 품고 끝까지 사랑하는 가슴이 넓은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13,1)하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먹는 제자 유다까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밤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사랑에 사랑을 더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에 차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만큼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스승이 사랑의 길을 걸으셨으니,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모쪼록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부터 교회는 파스카 성 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성서는 파스카에 대한 의미를 3가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파스카는 ‘지나가다.’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 가서 예배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파라오는 모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이집트에 내렸습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이집트의 모든 맏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Mezuzah)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 표시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맏배를 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맏배를 구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문에는 문설주(Mezuzah)가 있는데 그 안에는
양의 피가 아니라 신명기 6장의 ‘들어라, 이스라엘아!’가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넣어놓은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
그렇습니다. 파스카는 단순히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 아닙니다.
파스카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파스카는 ‘건너가다.’라는 의미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뀌어서 파라오는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앞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홍해바다’가 있었습니다.
뒤에는 막강한 파라오의 군사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로 바다를 치니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무사히 홍해바다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파스카는 지팡이로 바다를 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할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세 번째 파스카는 ‘넘어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지나가고, 건너가는 것은 장소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굳이 지나가고, 건너가지 않아도 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땅 위를 기어다녀야 했던 애벌레는 죽음과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차원의 삶을 만나게 됩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실 때 ‘부활’의 존재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장소를 의미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신약의 파스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가 바뀌면 세상은 그만큼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장소로 이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굳게 간직한다면
이 땅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조욱현 토마스 신부
교회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다.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이 만찬을 미사로 재현한다.
탈출기에서는 야훼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한 파스카,
즉, 죽음의 재앙이 건너간다는 과월의 축제로,
이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 대축일로 지내라고 하신다.
사도 바울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최후 만찬 때에 행하신
성체 성혈의 의미와 그 의식을 우리가 행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밀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되는 이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1절)
예수님께서 건너가심은 세상에 계실 때,
하느님의 고귀함을 벗고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으며,
우리에게 맞추어 당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필리 2,7) 우리와 함께 계시던 분이
당신의 충만함(참조: 콜로 1,19; 에페 1,23)으로 돌아가신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을 곧 떠나야 할 때가 오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보여 주신다.
그분은 그 일로 그들의 사랑이 더욱 커지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아
그들이 장차 닥칠 끔찍한 일들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절)
여기서 끝까지는 그리스도다움을 뜻한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이 사랑은 만찬 때,
악마가 이미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은 후에 표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3절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4절).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5절).
말씀이신 분,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분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려고 무릎을 굽히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일은 그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손수 부으셨다.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는 겉으로만 보이는 행동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르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행위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황송했다.
그래서 당황해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7절)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8절) 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8절)
베드로가 나중에 알게 되는 신비는
그들의 발은 곧 기쁜 소식을 전할 발이므로
그 발을 씻고 당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닦음으로써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는 길이요”(요한 14,6)라고 하신 분께로 갈 수 있게 되었고,
또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깨끗한 발로 사람들에게 갈 수 있도록
아름답게, 제자들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비를 아직은 깨닫지 못하지만, 나중에 그것을 알고 나면
그 신비를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9절) 하자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10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다.
예수님은 그를 다른 제자들처럼 영예롭게 대하시며 그에 대해서도 특별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발을 씻어 주시는 그 사랑을 십자가의 못으로 갚아드리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12절) 하신다. 그리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4절)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주인으로서 종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더러움도 씻는 것이다.
형제의 발 앞에 몸을 숙일 때, 겸손해지며 더욱 확고해진다.
이 겸손으로 교만해지려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15절)
예수께서 먼저 당신의 모습이 사랑하고 봉사하는 모습이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웃으로부터 멀리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가까이할 때이다.
이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 거룩한 밤에
이 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상 식탁에 앉을 때까지
당신의 말씀과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기억이 끝나는 순간, 사랑도 끝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표시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
더러운 발까지 씻어 주시는 사랑이고,
그 발로 도망칠 제자들의 죄까지 용서해주시는 사랑이며,
아무리 죄를 짓고 도망쳐도 포기치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이고 그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얘기는 안 나옵니다.
대신 두 번째 독서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얘기를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데
성체성사를 세우신 얘기는 요한복음엔 없지만 공관복음에는 모두 나오지요.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또 하나의 표시가 바로 성체성사이고,
이때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함은 남김없이 다 바치는 사랑입니다.
주다주다 더 줄 것이 없으니, 목숨까지 다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 다 내어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남김없이 다 내어주는 사랑이지만
다른 한편 당신의 사랑을 남기시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까지 남김없이 다 내어주시지만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도 남을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 사랑의 표시로 유언과 유산과 유물을 자식들에게 남기지만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재현되도록,
곧 끝까지 계속되도록 성체성사를 남기신 겁니다.
그런데 재현되도록 그리고 끝까지 계속되도록 성체성사를 남기셨는데
그것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지 않고 그래서 계속되지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어도 주님 사랑은 우리 안에서 끝까지 계속되지 않겠지요.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자들을 위해서만 남기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이라고 하셨는데
그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람들에서 우리가 제외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그 주님의 사랑을 재현해야 할 것이고,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그런데 만일 우리가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주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니고,
끝까지 남는 사랑도 아니며 그야말로 끝난 사랑입니다.
기억과 기념은 주님의 사랑을 재현케 하는 것이고,
주님 사랑이 내 안에서 계속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죄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 지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 지향적인 것이고,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끝나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되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이 끝나는 순간 사랑도 끝나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도 끝납니다.
내일과 모레 강론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성주간 잘 보내시고
부활 대축일에 기쁘게 만나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로 하신 만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하신 離別의 식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식사 중, 제자들에게 聖餐 儀禮를 남기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로 우리가 들은 「코린토전서」는 그 성찬의 의례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빵과 잔을 각각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 잔은 내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말씀으로
그 의례가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서간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긴 성찬 의례를 중심으로 한, 오늘의 미사 의례입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복음서를 비롯한 「성경」말씀을 듣고, 성찬으로
주님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깨달은 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어떤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내어주고 쏟는다.’는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며, 그들을 고쳐주고 살리면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일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언어에서 몸은 인간관계를 말하고,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스스로를 내어주는 인간관계,
스스로를 쏟아서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생명을 살라는 성찬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좁은 視野에 갇혀서 삽니다.
그 시야 안에서는 자기 자신이 소중하고,
재물과 권력만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錯視 현상도 일어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노력도 하지 않게 하는 착시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나의 생명이고, 나의 이웃들입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하며 살아서
그분의 자녀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요약해서 성찬의 의례를 남기셨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하느님의 진리를 꿰뚫어 보며 살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생존이 어떤 베푸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찾아내어 기뻐하는
牧者와 같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분의 마음을 배워 실천하며 살겠다는 決意가 담긴 아버지라는 하느님에 대한 呼稱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이 남기신 성찬에는
당신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당신의 피라는 잔을 마시며,
그분의 삶을 실천하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곧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최후만찬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성찬은 사랑하며 살겠다는 새로운 계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최후만찬의 식탁에 앉으셨다는 것만 말하고,
즉시 제자들의 발을 씻긴 이야기로 건너갑니다.
이 복음서는 그 식탁에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 잔을 들고 하신 말씀들을 생략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은 이야기를 모릅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들은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들은 그 복음서들이 전하는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성찬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잔을 들고 하신 말씀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최후만찬을 기억하여 신앙공동체 안에 발생한 성찬이
우리의 삶을 위해 지닌 의미를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성찬이 먹고 마시는 虛禮虛飾으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은 식탁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닦아주십니다.
사실, 식당은 음식을 먹는 장소이지, 발을 씻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그런 무리를 하면서,
예수님이 최후만찬의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을 이야기를 합니다.
발을 씻는 것은 그 시대에 종이나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남긴 성찬이 우리를 겸손한 섬김이라는 새로운 실천으로
우리를 부른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 씻지 못하십니다.”고 말하면서 완강하게 사양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종이 하듯이 섬기는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예수님으로 발생한 새로운 계약의 관계,
곧 하느님의 자녀로 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발 씻음이 의미하는 종과 같은 섬김을 우리가 실천할 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같은 몫을 나누어 받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더 富饒하게 만들어 주지도 않고,
더 영광스런 신분을 주지도 않습니다.
성찬, 곧 우리가 거행하는 성찬전례는 우리를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으로 초대합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삶이 섬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새로운 계약,
곧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요한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고 고백하였다고 전합니다.
그것은 미사에 참여하는 우리도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실천한 섬김은 우리 안에 커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착각과 망상은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虛無의 심연 위에 잠시 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충만히 살아계시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보잘것없은 섬김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섬김의 새로운 계약을 실천하여
그분은 우리 안에서 커지고, 우리는 작아져야 합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만찬 성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구원 역사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파스카 성삼일이 주님 만찬 저녁 미사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만찬’ 장면을 소개합니다.
제1독서는 구약의 파스카 만찬을,
제2독서는 초대 교회의 만찬을,
복음은 예수님의 파스카 만찬을 소개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권고한 만찬을 기점으로 ‘구약의 파스카’가 시작되었듯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기점으로 ‘신약의 파스카’가 시작된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만찬 이야기는
‘사랑’과 ‘섬김’이라는 주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이 가까워짐을 감지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드러내어 표현하십니다.
사랑은 감출 수 없는 것이기에 언제나 구체적 행위를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 씻김’이라는 상징적 행위로
‘사랑은 섬김’으로 드러나야 함을 알려 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손님을 초대하면, 덥고 건조한 흙길을 오래 걸어야 하였을
손님을 배려하여 먼저 발을 씻게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집안의 종이 하던 일을 당신께서 손수 하시며
사랑은 섬김으로 표현되어야 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라고 물어보시는데,
그리스 말 성경 본문에는 “깨닫겠느냐?”라는 동사가 먼저 나옵니다.
‘알겠니?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의 의미가 강조되어 있고, 그 답은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로 제시됩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한 것처럼 섬김으로 실천되는 사랑이
우리가 하여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기득권자들의 불의한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을 배신한 인간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랑은
이제 성삼일 내내 장엄히 기억되고 기념될 것입니다.
김 오틸리아 수녀
오늘 예수님은 최고의 행복과 최대의 슬픔을 한 날에 경험하시죠...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루카 22,15
당신과 함께 먹고 자고 말씀을 나누었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마지막을 보내시고,
당신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제자들의 배신과 배반을 그날밤 겪으셔야 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날을 잊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왠지 예수님이라면, 당신을 외면한 제자들의 뒷모습보다
당신께서 손수 빚으시고, 씻어 주신 제자들의 발을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인간의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도 하죠.
고통은 잊어버리고, 함께했던 추억만 간직하게 되는…
사랑하는 사이는 그런 것 같아요.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1코린 13,7-
사랑 그 자체이신 그분과 함께
누군가의 발을 씻어 주는 마음으로
오늘도 사랑하기를,
지금을 살아 가기를 바라 봅니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