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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8 부활 제7주간 토일
제1독서 : 사도 28,16-20.30-31
복 음 : 요한 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이제 지난 7주 동안 계속된 부활 시기가 끝나 갑니다.
독서와 복음도 각 책의 마무리 부분이 봉독 되는데,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맨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사도단의 대표들이 부활 시기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요한복음서의 마지막은
이 책의 저자와 저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두 번이나 되풀이되며 이질감을 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 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는 이 물음이,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는 데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옮긴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그것이 너에게 무엇이냐?”입니다.
주변과의 비교나 경쟁, 불필요한 견제에 휘말림 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삶의 자세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지만, 불안과 공포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는 모범을 누구보다도 훌륭히 실천한 것입니다.
“남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책을 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나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날마다 그날의 말씀을 붙잡고 나의 길을 가는 것,
비교에 휘둘리거나 경쟁하느라 소모되지 않는 것,
내 삶에 집중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길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대 그리스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인가가 창조되는
‘목표’, 또는 ‘목적’을 뜻하는 ‘텔로스’에 대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도토리가 자라나 떡갈나무가 되고, 새끼 고양이가 자라서 성인 고양이가 되면
그것들의 텔로스가 달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텔로스는 무엇일까요?
즉 우리 삶의 목표, 목적은 무엇일까요?
가톨릭 교리를 보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고,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행복인 것이고, 우리 삶의 목표이며 목적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야 ‘인간의 텔로스’를 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이 길을 벗어납니다.
신앙생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인데도, 자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할 수 없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결국 우리 삶의 목적에 다다를 수 없게 됩니다.
삶은 많은 유혹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화려하고 편한 것들 사이에서 그와 반대로 볼품없고 힘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있습니다.
문제는 화려하고 편한 것만 자기 삶의 첫 번째라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나의 텔로스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도 떠올려 보십시오.
자기 텔로스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후회와 슬픔만 간직하지 않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 유명한 요한 사도를 가리키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보기에, 요한 사도는 특별한 지위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부활의 순간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미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미래가 중요했습니다.
즉, 남의 텔로스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의 텔로스를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자기의 목표, 목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은 모습만을 보이면서 자기의 목표와 목적을 잊어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따르면서, 특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나의 목표, 목적에 완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미래가 훨씬 밝아집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인생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 각자에게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고유함이 있습니다.
각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해 많은 관심을 지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
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
‘너는 너대로 사랑을 받으면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따름의 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예수님만을 따르는 추종의 길을 걷고,
베드로는 뒤를 돌아보는 주저함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지만 사랑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이랍니다.
당신이 없으면 시간도 사랑도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누구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하지 말고 실제로 행복하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게 된 것이 복입니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아 힘들어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서로에게 주어진 고유한 인생을 주님의 마음에 들게 사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그의 장래를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에게는 베드로와는 다른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각자에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베드로에게는 ‘증거’의 몫이,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오는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증언’의 몫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선포’(kerygma)와 ‘증거’(mariteria)라는 예수님의 예언직의 두 가지 형태입니다.
곧 말씀의 선포와 행위의 모범을 통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이 둘은 서로 경쟁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 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친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 잘 나타나고 있음을 말하고,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씀의 선포를 증언으로 추종하며,
말씀의 증거를 모범으로 삼으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 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 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있으면 끝이 가까울수록 아쉽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그렇습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못내 아쉽습니다.
헤어짐이 아쉬워서 서로, 상대방의 집으로 데려다주기도 합니다.
예전에 중곡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제가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던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어느덧 직장인이 되었고, 자동차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중곡동에서 식사하고, 저는 봉천동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봉천동에서 입가심으로 한잔 더하고, 돌아오는데 저를 중곡동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였습니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이 이럴진대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더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50일 동안 주님의 ‘부활 시기’를 지냈습니다.
부활삼종기도를 하였고, 부활 성가를 불렀습니다.
7주 동안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갈망, 믿음, 말씀, 착한 목자, 포도나무와 가지는 우리가 부활 시기에 들었던 주님 말씀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님 승천 대축일에는 또다시 ‘갈릴래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 시기에 우리는 ‘사도행전’을 독서로 읽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면, 교회에 위기가 찾아올 때면
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려움과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님 부활의 체험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었던 베드로 사도,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서, 요한이 전한 편지, 요한 묵시록’을 남겨 주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은 마귀를 쫓아냈고, 병자를 고쳐주었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월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전화위복(轉禍福)’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품 성구도 시편 126장을 정했습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아담의 죄를 ‘복된 죄’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아담이 죄를 지어서 우리에게 ‘원죄’가 주어졌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모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쩔 수 없이 로마의 법정에 상소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당시 가장 힘이 센 로마의 심장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망하면 원망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들이 생깁니다.
2024년 부활 시기는 이제 연중시기에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2025년 부활을 기다리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 놓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됩니다.
아, 보니 저는 참 한심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돌아보니 저는 참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날카로운 시선이 항상 가까운 이웃에게 머물렀습니다.
저 자신의 허물이나 약점은 조금도 성찰하지 않고
이웃들의 부족함에 가슴치고 분노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느님 보시기 다 그놈이 그놈인데,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 나무란다고,
그렇게 사는 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웃으셨을까 생각하니
큰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한 수도원에 공공의 적처럼 살아가는 수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몸집이 육중하다 보니 동작도 굼뜨고, 공동 작업 시간에 사고만 치지 별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들 조용히 침잠해 있는 묵상 시간에 코까지 골면서 잠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식사 시간만 되면 얼굴에 활기가 되살아났습니다.
다른 수사들은 더 먹고 싶어도 꾹 눌러 참고 딱 밥 한 공기만 먹는데,
이 수사는 평생토록 삼시 세끼 단 한 번도 안 빠지고 꼭꼭 밥 두 공기씩 챙겨 먹었습니다.
겉으로 대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다른 수사들은 주님 앞에 이렇게 여쭙곤 했습니다.
“주님, 저 베드로 수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은 쥐꼬리만큼 하고 밥은 나발처럼 흡입하는 베드로 수사에게 구원이 가당한 일입니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들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토록 주님 안에 갖은 고행과 보속을 다해온 까닭에 삐쩍 마른 다른 수사들이,
그 결과로 천국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 멀리 맞은 편에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오는데, 얼굴이 낯이 익은 것입니다.
가까이서 봤더니, 아니 글쎄, 베드로 수사였습니다.
화가 벼락같이 난 수사들은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 수사가 천국이라니,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람마다 지닌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몫이 다르고,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사실 살아있을 때 저 베드로 수사는 사실 매끼 네 공기씩 밥을 먹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절제하고 또 절제해서 두 공기씩만 먹은 것이란다.
평생 그런 노력한 베드로 사도가 천국에 오지 않으면 누가 천국에 오겠느냐?”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서서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 공생활의 절정기도 지나가고 예수님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들 떠나가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 사도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경쟁 관계 속에 살아가던 예수님의 애제자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를 지목하며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시원시원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사랑받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 베드로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 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시선은 언제나 이웃들의 결핍과 실수에 가 있습니다.
이웃을 향했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어 우리 자신의 발끝을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남의 인생은 본인에게 대폭 맡겨두고, 우리 각자의 인생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추종의 방식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의 경우 평생토록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했지만,
성모님의 노년을 동반해 드리면서, 순교가 아니라 자연사하였습니다.
모든 길이 다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지금 막 시작된 구원은 주님께서 오실 때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라고 하신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
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말씀을 읽고 실천해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성령강림 대축일을 기다리는
부활 제7주간의 마지막 평일 복음은 요한 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의 대화가 막 끝난 뒤의 일이지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방금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소명을 들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거취에 대해 의문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사람 심리가 다 그런 걸까요?
수위권을 인정받은 제자면서도 예수님께 각 별이 사랑받았던 제자에게
모종의 경쟁의식을 가졌던 걸까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요한 21,22)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방금까지 오갔던 따사로운 사랑의 분위기를 냉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분위기, 언젠가 비슷하게 겪은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 하는지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기가 막히게 빼어난 대답을 해서
엄청난 칭찬과 함께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약속받은 일이 있었죠.
이어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다가 "사탄"이라는 모진 소리까지 들었던 일 말입니다.(마태 16,13-23 참조)
베드로의 패턴일까요?
으쓱할 만큼 잘 나가다가 인간적인 부분에 발목이 잡혀
곤두박질치면서 분위기를 냉각시키는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도록,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며
경계선을 그으신 후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방금 전, 사랑의 대화가 오고 간 뒤에 하신 말씀,
"나를 따라라!"에 주어 "너는"을 강조해 붙이셨네요.
"~는"이라는 조사에서 강세가 느껴집니다. 개별성, 특화, 고유성을 강조하시려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무안하고 서운했을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성령을 받아 교회 공동체를 꾸려나갈 그리스도 몸,
그 지체들의 주축이 될 사도들에게 예방주사가 될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 하시는 주님의 초대는 그 양상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구수만큼 다양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하지요.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개성이 다른 만큼 그분께서
우리 각자를 필요로 하시는 부분과, 채워주고 싶으신 빈 곳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각자 부르심과 소명이 다른 것이고요.
하지만 이 당연한 진리가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 사이에서 걸림돌이 되곤 해왔습니다.
카인과 아벨 때부터 비교 의식이나 시기 질투가 존재했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이라 여겨야 할까요...
예수님 부활 체험까지 했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누가 더 높으냐 하는 문제로 티격태격하던 그들입니다.
진정 높아지는 길의 진수를 보여주셨던 스승 앞에서 이제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그 욕망이 뿌리째 사라진 건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오늘의 베드로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비판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비교 의식이나 시기, 질투를 합리화하거나 옹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저 베드로를 통해 비추어진 우리 모두의 민낯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로마 체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동족을 이교 법정에 고발할 의도가 추호도 없었던 바오로는
유다인들의 계속되는 공격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로마까지 오게 됩니다.
바오로는 로마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새로운 길을 전파하지요.
당시 세계 권력의 변방 이스라엘이 아닌 힘의 중심지 로마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초를 닦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꽃길만 펼쳐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박해와 순교의 핏빛 역사가 쓰여 질 것이고,
그로 인해 오히려 더 세찬 신앙이 불일듯 일어날 것이니,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말이 실감 납니다.
또 이 길은 그야말로 바오로에게 허락된 그만의 길임을 알겠습니다.
그의 로마 시민 자격과 성장 환경, 지식, 기질과 성정 등
딱 그에게 맞는 부르심이고 소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 계획 안에 먼지 만 한 한 점도 못 되는 우리,
우주와 역사의 날줄 씨줄 전체를 조망할 능력이 없는 우리가
당장 눈에 보이는 나와 너의 외피에 집착하게 되면 중요한 걸 놓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주님과 각자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주님과 그(그녀)의 관계에 호기심을 갖느라 정작 주님께서 나와 관계를 맺으시는
색깔과 온도와 향기, 농도와 밝기를 놓쳐버리는 우(愚)를 범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바오로에게는 바오로에게 맞는,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에게 맞는,
요한에게는 요한에게 맞는 것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내게 허락된 환경, 내가 받은 은총, 선물, 사랑, 자비가
나에게 꼭 맞는 맞춤형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에 대한 겸허한 평가와 겸손한 자존감이 필요하니 주님께 간절히 청해야 하고요.
간혹 주님께로부터 나만 소홀히 대접을 받는 것 같이 느껴져,
주님께 "이게 저에 대한 당신의 최선이냐?"고 당돌히 여쭙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곁눈질하지 않는 우직하고 단순한 믿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일단 인생이라는 경주에 들어선 이상,
누가 더 뭘 얻었나 살피느라 발을 헛디디거나 목표를 잃지 않도록,
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나의 주님"께만 집중해 달려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솔직담백한 질문 덕에
우리가 성령강림을 앞두고 새로이 심기일전할 기회를 얻은 것 같습니다.
자기의 고유성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나를 포기한 게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나를 창조해 가시는 하느님께 협력하고 있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최선임을 믿고 새롭게 파이팅 합시다!
부활시기의 에필로그(맺음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님의 부활시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에 걸맞게
오늘 미사에는 요한복음의 끝부분이 봉독된다.(21,20-25)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이 15-17장과 더불어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단독으로 내세워 사랑의 다짐을 받았고,
그 사랑 위에 당신 양 떼의 司牧을 맡기셨으며, 아울러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암시하셨다.
“나를 따라라.”(19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따라나섰다.
그 뒤를 愛弟子가 따르고 있었다.(20절)
자신의 미래를 계시받은 베드로는 애제자의 미래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하고 예수께 물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首弟子와 愛弟子가 차지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位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앞서간 복음에서 공동체의 首長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은 베드로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한 애제자의 위상도 알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는 호기심뿐 아니라 경쟁심도 다소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인다.
역사적 사실을 따져볼 때, 이 호기심이 베드로의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 공동체를 포함한 후기 편집자의 호기심이다.
역사적 사실과 시간상의 간격을 따져볼 때,
원래의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점에 베드로는 이미 순교하였고(64-67년경),
요한은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 스승의 사랑을 받던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요한이 영원히 불멸한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다.(23절)
그런데 애제자 요한도 결국은 100년경 도미씨아누스 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래서 21장의 후기 편집자는 애제자가 뒤따르는 장면에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통하여 바로 잡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성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호기심과 경쟁심을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리셨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예수께서는 애제자의 미래가 베드로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추종만을 요구하신다.
사실 제자들의 제각기 갈 길은 예수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다.
제자는 오직 스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제자 됨의 본성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공동체의 일치를 바라셨고,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구성원 모두의 강압적이거나 획일적인 추종은 원치 않으셨다.
즉 내가 이러하니 너도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劃一은 예수님의 願意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서로의 比較나 競爭 등, 優劣 가림을 통한 획일적인 시도의 발상이 적지 않게 있다.
자신의 信心을 기준으로 삼아 타인의 신심을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점은 믿음의 공동체가 각별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神父로서 이렇게 사는데 저 신부는 왜 저렇게 사는 것일까”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남을 험담하면 그것은 일치를 깨는 일이며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고
그 안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이는 일치를 도모하는 일이다.
어떤 모양으로 살던 삶은 자신의 몫이다.
그저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데 익숙해야 할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은 무릇 각자의 몫이겠지만, 天上의 삶은 公有하는 삶이다.
거기에는 差別도 列外도 없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이미 천상의 삶을 공유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오시는 성령의 다양한 恩師가 꼭 필요한 것이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불태우소서.”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