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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3장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껏 율법에 불순종/불신앙적인 유대인과 자연 율법으로서의 윤리 도덕을 지킨 이방인이나 그렇지 못한 자들이나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고 이야기 한 뒤 방향을 바꿉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예배 공동체가 된 "우리는 나으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제게도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배의 현장인 예배당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예배자들을 만나 함께 예배드린 후 짧은 시간이나마 얼굴과 얼굴을 보며 교제한 뒤 집으로 오면 이제부터는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산 제사가 항상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예배를 드리고 왔다 해서 저는 다른가? 질문해보는 것은 내 자녀들과 어울려 살아 가는 가정에서나 생존 현장인 구멍 가게에서나 예배의 삶을 풀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천상교회와 지상교회가 한 몸이 되여 예배드린 후 이 세상 한가운데로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파송된 제가 비예배자와 저는 달라도 한참 다른 족속이라는 마인드로 접근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님 비예배자나 저나 다 같은 죄인이라는 공감 마인드로 접근함이 옳을까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마치 지성소의 휘장이 찢기기 전과 후의 차이만큼 다르다는 걸 저는 잘 압니다. 제가 이것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의 사업 현장을 박차고 다른 곳으로 이사갔을 것입니다. 이 현장에서 저를 붙잡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께서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속죄와 화목의 피를 보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도 아들이 육체로 찢은 지성소의 휘장 밖에 있는 죄인 곁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를 묵상하면 할수록 비예배자들과 함께 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거룩성도 막힘없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친절과 사랑과 피뿌림의 용서가 흘러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에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 되어 저와 그들의 죄를 피뿌린 말씀으로 성실한 믿음의 기도로 덮어 주며, 오늘은 어제보다 심령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현상이 없다면 저는 외식에 불과한 예배를 드리는 자일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유대인(유대기독교인,유대교인)이나 양심이 바른 헬라인이나 그렇지 않은 헬라인이나 다 죄아래 있다고 선포(롬2:12~16)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예배자인 저도 비예배자들에게 다가갈 때는 이미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공감 마인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비록 의롭다는 칭의를 받았음에도 완전한 영화에 이르지 못한 현재의 저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2:12~16
생각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더이상 죄 아래 지배를 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선언하심은 기록된 말씀에 근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또한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성숙한 자일지라도 모든 성경은 폐할 수 없다는 것과 복음은 신앙의 성숙과 상관없이 항상 들음으로써 믿음에서 믿음으로,영광에서 영광으로 나가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참으로 아멘입니다. 성령이 아니면,예수님께서 먼저 찾아 오신 사랑이 아니면, 피뿌림의 말씀이 아니면,진리이시며 길이시며 생명이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가 아니면 어찌 하나님을 찾을 것이며,찾은 들 찾아질 것이며 알 수 있겠습니까? 실로 평강의 주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평강의 길을 알 수 없어 파멸과 인생의 고통속에 비참히 죽어갈 저입니다.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진실로 율법이 없다면 어찌 죄를 깨닫겠습니까? 허나 우리는 율법이 있어도 죄를 깨닫지 못할 때가 너무 많음은 어찜입니까?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가 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나이되고서야 처음 생각해 본다는 자체가 제 양심의 전부는 아닐 지라도 부분적으로나마 화인 맞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바리새인들에게 겉으로 나타난 행위 이면,즉 마음의 행위를 보시는 하나님을 말씀해 주십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이요,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입니다.
또한 아버지 집인 우리 마음 안을 만인을 위해 기도의 향을 사르는 분향과 말씀으로 채우지 못한 것을 말씀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말하지 않고 비진리를 말하는 것을 거짓증언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저는 죄지은 것이 없는데 왜 저를 죄인이라고 하시면서 이 죄인을 위해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속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십니까?) 라는 양심에 화인 맞은 저의 질문에 주신 응답입니다.
결국 죄가 저를 이겼고 아버지께서도 율법(말씀)으로 저를 항복시키셨습니다.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내 혀가 내 마음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기적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저는 성령의 권능 안에서 지옥의 뜨거운 불을 경험했습니다. 살과 뼈가 녹으면서 타들어가는 무서운 고통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를 부르는 순간 그 고통은 사라졌고 엄청난 눈물의 회개를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4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회개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제사법과 제물에 관한 말씀들은 율법에 속해 있는 것으로 번제와 속건제와 속죄제와 화목제는 거룩히 구별된 온전한 제물이 쏟은 피 없이는 드릴 수 없는 제사입니다.
이로써 율법도 장차 오실 유월절 어린 양되신 의의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증거하였고 하나님의 택한 선지자들도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셨습니다.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한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의"는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과 윤리적인 의를 초월한 "의"로서 초월자되시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자리로서의 의를 말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면 만남이 우선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만이 아버지와 원수된 우리에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시려고 화목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바울이 죄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은 의의 보편성,즉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칭의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불안케하며 병들게하며 죽이는 죄도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면 사람을 쉬게하며 치료하며 살리게 하는 의는 그 이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멘!
근데 왜 우린 이 "한 의"를 우주적인 마음으로 환영하며 적극적을 선전하지 못하는 것인지 참으로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주를 종교적인 방식으로 선택하면 육체와 관련된 고리들을 끊어내는 과정에서 사람들과 단절되기 쉽상입니다. 또한 자신의 교단외 다른 교단과의 만남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리 독선적인지,진리의 배타성은 사랑과 함께 병행하는 것으로 독선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한 아버지,한 생명을 나눈 생명과 사랑의 관계로 사람을 대하는 교회는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열방과 민족들과 함께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과 만나 교제하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후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차단되었습니다.
"24: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율법의 <속죄제물을 통한 속량>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검증이 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흘린 피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인 속량을 성취하십니다.
이를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은혜로 제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수고 하지 않았음에도 값 없이 의롭다 함을 법적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라"
또한 화목제물로 흘리신 예수 피를 믿음으로 아버지의 원수였던 저를 아버지와 만남의 자리,곧 예배의 자리로 초대받게 하사 거룩한 아버지와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었으므로 의롭다고 불러 주십니다.
이 화목케 된 의는 제가 지은 죄로 말하자면 벌써 하나님의 진노로 멸함을 받아야 당연한데 진노 중일찌라도 긍휼을 베푸사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서 인간 말종인 제게도 하나님의 의를 보이셨습니다. 할렐루야. 곧 한 의이신 예수를 믿도록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나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진실로 제게는 어디를 보아도 자랑할 데가 없습니다. 제가 의롭다고 칭함을 얻을려고 율법을 지킨 행위도 없습니다. 속량케 하며 화목케 하는 피를 믿게 된 것도 하나님 은혜이니 어느 구석을 보아도 자랑할 데가 없습니다.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니라"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율법을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로 먹는 입은 굳게 잠금니다. 대신 율법을 생명을 알게 하는 생명나무(그리스도)로 먹을 수 있도록 굳게 세웁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