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은총의 작업
3-1 촛불과 캐석, 주교반지, 주케토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이사9:2). The people who walked in darkness have seen a great light. They lived in a land of shadows, but now light is shining on them.”
우리 대다수는 어둠 속에서 살아갑니다. 빛 속에 살았던 적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빛 속에 산 경험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우리 대다수는 빛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어둠 속에 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수시로 활동하는 불확실함과 외로움과 황량함과 피폐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둠이 늘 있었기에 인간의 삶은 어둠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인간입니다. 어둠 속에 사는 인간에게 큰 빛이 온다는 것은 모든 인류의 기대이고 큰 기쁜 소식입니다. 잠깐만이라도 그 큰 빛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한 교수신부의 강의였는데, 강의실에 들어오셔서 강의하기 직전 탁자에 초를 올려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한 후에 강의를 하셨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기도를 마감하신 후에 그 촛불을 끄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자신의 강의가 복음이기를 바랐고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처럼 자신의 강의가 세상의 빛이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촛불을 키는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강의가 복음에 적합하기를 바라시는 신부님의 강의는 무척 많이 준비하신 성실한 강의로 배우는 학생인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사제가 스스로 사제로서의 삶에 충실하고자 했던 사제의 원칙을 보게 해주셨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강의가 세상의 기쁜소식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 촛불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케석 cassock을 입고 강의를 할 때에는 탁자에 촛불을 켜곤 했었습니다. 캐석은 사제가 입는 긴 옷으로 수단이라고도 부르며 사제는 검은색 케석, 주교는 검붉은 와인색 케석, 대주교는 핑크빛 캐석, 교종은 흰색 케석을 입습니다. 일반적으로 캐석을 입을 때는 하느님의 사람이고 제사장의 의미를 많이 담을 때입니다. 로마시대의 평복이었던 케석이 지금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상징화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강의를 할 때에는 케석을 입고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촛불과 케석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그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촛불을 켜고 케석을 입음으로써 제 자신을 하느님의 품 안에 넣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너무 가볍게 사는 제 자신에게 케석을 입고 촛불을 켜는 행위는 제게 있어서 거룩한 의식으로써 신중함이 제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산만하고 흐트러진 강의는 되지 않고자 자신에게 다짐하는 의식이 되어 좋았고 하느님을 향한다는 목적이 설정되어 제게는 좋았던 것입니다. 주교로 피정의 집이나 나눔의집에서 강의를 할 때에도 캐석을 입고 촛불을 켜 놓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땅만 있는 게 아니고 하늘이 있음을 알라는 사제를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제는 제단에 촛불을 켭니다. 제단에서 나오는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빛이 되기를 바라면서 촛불을 켭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지엄한 제단 위에 촛불을 켜는 것이 제게는 제 자신이 거룩하게 되는 시간임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늘 그렇게 생각하고 촛불을 댕깁니다. 사제를 돕는 복사는 늘 아름답고 거룩하게 보입니다. 복사를 서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순번에서 영순위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돕는 삶이 하느님을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제단 위에 촛불을 켜는 사람이 되어 보시면 마음이 거룩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단에 놓은 성경을 부제가 가지고 집전주교에게 다가가 성경과 사제 입술을 향하여 강복 降福(하느님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는 일)을 받고 신도들 가운데로 나오면서 이런 기도문을 바칩니다. “저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인데 하느님을 뵙다니 이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이사6:5). 천상의 불을 가지고 와서 제 입술을 대시어 악은 가시고 죄는 사라지게 하옵소서(이사6:7). 제 입술에서 나오는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세상에 나아가게 하옵소서(이사6:9). 아멘.” 복음선포 바로 직전에 이 기도문을 바칠 때 부제가 가장 거룩해 보이는 시간입니다. 감사성찬예배에서 제 일 독서자와 시편 낭독자와 제 이 독서자와 복음 낭독자는 이러한 기도를 하느님께 바친 후에 독서를 하게 되면 성령에 휘감긴 상태로 천상에서 울리는 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강의할때에도 성경말씀을 낭독할 때에도 이런 기도문을 먼저 속으로 바친 후에 낭독합니다. 그러면 독서자와 함께 이를 듣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거룩함에 들어가게 됩니다. “천상의 불로 제 입술에 대시어 악을 사라지게 하시어 복음을 온전히 전하게 하시옵소서. 아멘.”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의 교회들은 대평원 위에 나무로 세워 흰색으로 칠해진 교회들입니다. 지금은 그러한 나무로 세워진 교회들이 붉은 벽돌과 시멘트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야생의 열정들이 제도화하는 듯합니다.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 지역에 있는 성공회 성당을 방문했을 때가 토요일 오전이었습니다. 성당에 들어가 제단 아래에서 기도를 바친 이후에 관할사제를 만났습니다. 성당사제는 한 방으로 저를 안내하면서 주일성경낭독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내일이 주일인데 주일에 낭독할 성경말씀에 대해서 공부하고 어떻게 낭독할 것인지와 낭독할 방법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낭독할 부부를 제게 소개해 주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성당을 나올 때에 사제는 한국에서 온 주교에게 궤배를 하면서 무릎을 꿇고 제 주교반지에 침구를 하였습니다.
주교반지는 하느님과 혼인한 사람이라는 영적인 반지입니다. 달동네에서 사목활동을 20년 넘게 지냈기에 금반지가 아니고 은반지로 주교반지를 성품식 때 받았습니다. 람베스주교회의 때에 주교반지가 은반지인 주교는 저 혼자였습니다. “왜 은반지로 주교반지를 했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주교로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으려는 뜻입니다.”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져 성령이 주시는 위로와 용기를 가지고 살라는 마음으로 은으로 만든 주교반지를 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성령에 의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으니 하느님의 사람과 한 사람이고자 하는 의미로 침구를 생각하였습니다. 침례교회가 많은 이 지역에서 성공회로서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해 나아가는 미국인 사제의 주일 독서자의 신앙교육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붉은 벽돌로 세워진 성공회의 큰 성당을 보면서 하느님의 참교회의 든든함을 보고 그 믿음의 든든함을 지속시키는 사제의 독서자 교육과 침구가 오래도록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람베스주교회의 중에 한 분의 대주교께서 제게 주케토Zucchetto(“작은 바가지”라는 뜻)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머리에 쓰는 진홍색의 원형모자입니다. 성품식에 주케토를 씌우고 그 위에 덧씌우는 사각모의 진홍색 모자인 비레타Biretta를 씌우고 오른손 약지에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반지를 끼워줍니다. 예전에는 사제나 수도자들이 머리 가운데 부분을 삭발하고 나서 세속에 죽었다는 뜻으로 덮어썼던 모자이나 지금은 주교들이 씁니다. 대주교나 추기경의 주케토는 진홍색, 교황의 주케토는 흰색, 주교의 주케토는 자주색입니다. 주케토를 쓰면 머리를 반듯하게 해야 주케토가 흘러내리지 않게 됩니다. 특히 설교할 때에 몸을 흔들면 주케토가 떨어지니 몸을 고정한 채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몸을 고정하니 산만하지 않게 되나 신중한 모습이 됩니다. 신중한 자리에 가면 주케토를 써서 몸을 흔들리지 않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의장주교(대주교)시기에 서덕교구의 캐논사제가 제게 주케토를 선물로 주었기에 두 개의 진홍색 주케토가 있게 되었습니다. 주케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점검하는 신중함을 지니게 합니다.
성경말씀을 낭독할 때에는 촛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고 신학교 때 교수신부로부터 배웠습니다. 특히 복음을 낭독하는 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예를 갖춰 서 있는 거룩한 자리이기에 촛불을 크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촛불의 큰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단의 촛불이 신도의 가슴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제단에서 나온 촛불로 어둠속에 사는 사람들이 제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됩니다. 세상에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촛불이 켜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우리가 바로 어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회 신앙인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가르치지도 않아도 빛이 무언지를 태생적으로 알게 됩니다. 어두운 현실문제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희망이 됩니다. 빛이 있어야 제대로 보게 되고 제대로 된 인생길을 찾아 걸어가게 됩니다. 어두운 현실의 문제가 매우 크게 보일 때가 빛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어두운 현실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깨우치게 합니다. 자기 자신을 확장하는 데 있는 힘을 다 쏟는 세상에서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감각을 잊게 하거나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교만입니다(로완 웰리암스대주교).” 하느님이 정하신 선을 넘는 게 죄입니다. 교만은 하느님이 정해주신 선을 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해서 사는 인간이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인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입니다. 머리로 축적된 이성으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찾는 길에 익숙한 우리입니다. 몸으로 삶을 경험하는 인간은 가슴에 있는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를 말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이성이 아니라 가슴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제대로 하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 앞의 현실문제가 아주 작게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 앞의 일이 크게 보일 때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떠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무진장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눈앞의 일이 작게 보이게 하시니까요. 그렇게 촛불은 우리 삶의 과제를 작게 보이도록 하여 그 문제를 쉽게 풀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는 것은 빛 속에서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에 사는 우리에게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