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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3편(다윗의 시: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여호와여 어느 때가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가?
2: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깊은 잠속에서 "요한복음11장1~8절"이라는 소리에 냉큼 눈 뜨니 새벽 5시25분입니다
그동안 요한복음 설교도 참 많이 들었고 묵상도 했으니 무슨 내용이 11장인지 알만한도한데...라며
머릿속으로 요한복음 책장을 넘겨봅니다
생각에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향해 성큼 성큼 발걸음을 내딛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싶으니 마음이 좀 무거워집니다
이젠 제발 좀 편한 말씀을 주시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11장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힌 나사로를 다시 살린 부활장으로 이 사건 이후 유다의 종교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하냐며 탄원합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도 오빠 나사로가 죽은 것은 예수님의 부재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윗도 현재 자신의 고난 당함은 여호와의 부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생각은 점점 증강되어 전혀 하나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차게 만듭니다
혹여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니냐고? 그것도 영원히 잊으신 것은 아니냐고?
남들은 당신께서 도우시니 나보다 다들 잘 나가고 있는 판국에 도대체 나에게는 언제까지 주의 얼굴을 숨길 것이냐고?
요한복음 11장엔 예수님께서 무척 사랑하시는 베다니의 한 가족이 나옵니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 고난의 집, 괴롬의 집이라는 뜻으로 그 동네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슬픔과 고난과 괴롬의 집이라는 베다니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울 작은 딸 때문입니다
울 작은 딸이 작년 6월 말에 낳은 첫 딸이 아토피와 앨러지로 고생하는데 낮보다는 밤이 오면 아가가 가려워서
두 시간마다 깨서 울기를 일 년 넘게 하니 제대로 잠을 못잔게 일상이 되어 닥서클이 장난 아닙니다
이 작은 딸이 몇 달전 뜬금없이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날 찾으며 자기에겐 희망이 안보인다며 괴로워하는 것이였어요
남들이 보면 디게 호사스럽네 할 것이지만 사람마다 각자 고난이 절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나인지라
딸의 말에 정말 나도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잠 못자는 것이 괴롭고 밤마다 손녀가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일어나 기도하는데 마음이 심히 아프다했습니다
그러면서 건네 준 말이 요한복음 11장에 나온 베다니에 왜 예수님께서 자주 가셨을까? 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결론은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괴롬과 고난과 슬픔이 있는 집일수록 자주 자주 방문하시니 설빈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울 집에 방문하신 후 아예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 계시는 중이라는 말로 피차 위로를 받았습니다
다윗이 만일 매사에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렸다면 이리도 간절히 여호와를 기다렸을까요?
다윗이 여호와를 기다리는 심정을 시어로 생각해보노라니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떠오릅니다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우린 어느정도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다윗은 오시지 않은 여호와로 인해 자신이라도 먼저 여호와를 맞을 등불을 밝히 들고 나가야겠다는 작심으로
자기 눈을 밝혀달라고 구합니다
행여 여호와께서 오시는 것도 못 느끼고 사망의 잠을 잘까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그렇게 잠드는 것을 가장 기뻐할 대적을 생각하니 도무지 치가 떨립니다
지난 주 수요 예배 시 목사님께서 운전하시다가 한 찰나 잠들었다 깨니 차가 3차선에서 1차선으로
이동되어 있었는데 하마터면 담에 부딪쳐 큰 사고가 날뻔 했노라는 말씀을 들으며 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우리가 얼마나 목사님을 위해 기도를 안했으면 그런 일이 있었을까? 싶어 죄송스럽기도 했습니다
다윗에게 부어진 기름부음은 그의 심령 깊숙한 곳에서 늘 운행하며 하늘 보좌로 비상하는 것만큼
이웃과 열방에게까지 그 기름부음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시편을 묵상하노라면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웃과 열방을 보는가하면 그들가운데서 활동하는 원수 마귀를 보기도 합니다
성도들도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 즉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그 은사를 소멸치 않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인격체로 존중하며
그의 은사를 귀히 여기며 동행하다보면 영안이 밝아져서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닌 정사와 권사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에 대함이라는 것을 현실만큼이나 인지하며 살게 됩니다
때문에 모든 교회들과 남녀종들은 우리들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과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 오류와 오해로 인해 묶여지지 않고 풀어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영적 무기인 성령의 능력과 은사로 하지 아니하고 혈과 육의 종교적인 혼의 생각과 뜻과 의지로
싸우려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며 오히려 사단의 세력을 돕는 종교세력만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약교회는 구약의 다윗교회처럼 원수가 이길 염려는 안해도 좋습니다
왜냐면 신약교회는 이미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지 승리하려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선재적인 승리의 확신만큼 마귀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위의 말씀을 읽는 순간 지난 겨울 목사님께서 수요 예배시 미가서 강해를 해주실 때
가장 생동감 넘치게 지금까지 파장을 일으키며 움직이고 있는 말씀을 설교해주셨는데 미가서 7:8절이 그렇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작은 딸이 우범지대에서 일하고 있는 연약한 엄마를 도와 자신의 학문과 청춘의 꿈을 뱅쿠버에
다 내려놓고 해밀톤의 내 곁에 날아와 엄마와 함께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 때 늘 내게 들려주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미가7:8~9
아멘!
마라타나!
첫댓글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