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촌집의 존재가 조작 혹은 허구라는 증거들이 차고 넘칩니다
(1) 명숭정(明崇禎) 13년에서 청 옹정9년 까지 경촌집 제작년도를 추정한다
서광 치의 손녀가 이곳에 저택을 구입하고 1640년(통칭 13년)에 스춘당을 경일당교회로 고치고 청 옹정9년(1731년)에 경일당을 페쇄 당한다
第十六代 明思宗 朱由检/年号 崇祯 通称 崇祯皇帝/제16대 명나라 숭정황제, 연호 숭정, 통칭 (1628년2월5일 ~ 1644년4월25일)
경촌집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경촌집의 제작을 명대말을 근거로 한 이유가 경일당 존속기간에서 영감을 얻어 결론을 낸 것이다. 즉 경촌집 최초의 발견자가 경일당의 존속기간을 보고 예측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왜냐하면 경일당 출판사는 경일당교회의 부속기관이기 때문이다. 곧 천주교재단이 신도들의 헌금으로 모은 돈으로 불경, 역경책을 제작할리가 없는 것이다. 고로 최소한 경일당교회가 존속하는 기간 중에는 경촌집이 제작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경일당은 후에 청/옹정 9년에 폐쇄되었다가 훗날 복권이 된다.
[비공식적으로 역술에 관심있는 사제들이 주역공부를 할 수는 있다. 주역을 유럽에 전했다는 사제도 그와 관련된 동료들이 출판하여 알린 것이며 교황청이 주체가 되어 출판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큰일이다 왜냐 하면 마녀사냥하던 시절인데 교황청에서 마법같은 주역을 출판 홍보할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으로 운영이 되는 선교자금을 가지고 경일당교회에서 경촌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다. 이건 사후에 회계감사에서 된서리 맞는다]
그러므로 이 계산에 의한다면 경일당교회가 폐쇠가 되었던 시기인 청 옹정 9년 이후에나 경촌집이 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경일당교회는 폐쇄가 되었지만 그 부속기관인 경일당출판사는 살아남아 다른 종교출판활동을 제작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면 거의 건릉 왕정으로 넘어가는데 이건 심효첨이 활동하던 시대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 책이 원조라고 단정하기 어려워진다.
[참고] 경일당의 연혁.
명나라 통칭 13년 ( 서기 1578년 ) ,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판국광이 상하이에 왔고, 서광기의 손녀 판 마르티나가 고향 상하이 현에서 전 쓰촨 사절 판윤단의 안인을 구입하는 것을 도왔다. 이곳에 십춘전(十春殿)을 건립하였고, 십춘전은 구세주 예수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경일당이라는 교회로 개조되었으며, 동시에 안뜰에는 별 관측소를 세웠습니다. 옹정 9 년 청나라 (서기1731년 ) , 옹정제는 천주교 금지령을 선포하고 각지의 천주교회를 압수했으며 상하이 경일당을 관제사로 바꾸었습니다. 중국기독교문서총서지 ( 명말청초 ) 에는 경일당이 기독교 가르침에 초점을 맞춰 간행하거나 손으로 쓴 많은 책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경일당이 공개적으로 책을 출판했으며 시기가 2000년 총진 13년부터임을 입증합니다. 명나라부터 청나라 옹정 9년까지로 보아 경춘지사본은 옹정 9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2) 명대말에 출간한 경촌집이라면 자평진전은 아직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 시기이다
그런데 경촌집 중앙에 자평진전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책의 중앙에 낙인이 찍히는 경우는 거의 목차, 순서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평진전은 목차도 아니고 책의 제목도 아니며 고사성어도 아니다.
그런 용어를 중앙에 낙인 직혀 경촌집이라는 책 제목이 분명이 존재하는데에도
책 중앙에 자편진전이라는 제목이 또 낙인이 되어 있다
책 위쪽과 중앙에 책의 제목이 2개가 낙인이 된 점이다.
다른 자평진전의 책 제목을 낙인한다는 점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평진전을 중앙에 낙인을 찍었다는 것은 경촌집 제작 당시에 해당 관련자들이
자평진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고로 이것은 경촌집 출판할 당시에 자평진전의 출처를 공개적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3) 심효첨이 최초 출판한 자평수록39편은 취운편을 분리하지 않았다
고로 취운편이 분리된 경촌집 47편과는 구성이 전혀 다르다. 경촌집은 취운편을 분리하고 있다. 따라서 취운을 분리한 증보판이 나오던 자평진전 44편에 이르러서 경촌집 47편과 거의 유사한 내용과 구성 목차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추측하건대, 경촌집의 등장은 자평진전이라는 중앙 낙인이 찍힌 관계로 살펴보면, 증보판 44편이 나온 이후로 경촌집이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심효첨의 원저서는 39편이었는데 후세 사람이 취운편(取運篇)을 따로 분리하는 등 44편으로 증보하였다. 이 책의 제1부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는 후세 사람이 첨가한 부분이 많이 있다. 서락오는 또 다시 첨부하여 54편으로 만들었다. [부론]이라고 붙여진 장(章)은 서락오가 임의로 넣은 것이다.[참고]
(4) 최초 자편진전 원본에서는 책의 제목이 없었다고 한다
심효첨의 살아 있을 적에 만난 제자라고 인식이 되었던 호곤의 증명에 의하면 최초 판본에는 제목 자체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경촌집의 중앙에 자평진전이라 낙인까지 직혀있다. 누군가 그런다 호곤이 경촌집의 중앙 낙인을 보고 자평진전이라 이름하였다고. 그런데 호곤은 말하기를 "책 원본에는 제목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앞뒤가 안맞는다는 점이다.
(5) 경촌집의 활약이 이와같다면 호곤, 원수산, 서락오, 위천리, 자강, 도계등이 모를리가 있겠는가
경일당 출판사라는 규모있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경촌집이라면 당시만하더라도 수천권 이상 팔려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 입에서 경촌집의 이야기는 언급조차 안나오고 있다.
최소한 서락오, 원수산등은 청나라 말렵의 사람이므로
경촌집이 모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촌집 중앙에 자평진전의 낙인이 찍혀 선명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내놓더라도 자평진전이 원본임을 공개하고 있는 책이 경촌집인 것이다.
따라서 서락오, 원수산등이 이를 모작임을 모를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언급할 필요도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6) 보관중인 사진의 보존물이 청대 초기라면 거의 400년전이다
그런데 보존 상태가 거의 100년도 안된 책으로 보인다
[책은 나무로 제작이 된 물건이라 오래되면 변색이 된다 이걸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첫번째 시대감별이다 요새는 약물 투여로 좀 오래유지한다고는 하지만 당시로는 불가하다]
만약 디지털화 된 사진이라 해도 너무 깨끗하다[흠이라던지 변색 등은 나타나야 한다]
(7) 대만 도서관에 기록물에는 출판년도가 청나라 라고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에도 대만 도서관으로 이메일 질문한 결과 명대출판물이라는 이상한 답변을 내놓고 있다
[ 이러한 앞뒤가 안맞는 도서관측의 답변이 오히려 의구심이 중폭이 되는 셈이다]
차라리 [명대출판물은 존재하지 않고 명대의 원본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합니다]
라는 답변이였다면 좀 수긍할만하겠지만 이건 아니다.
(8) 경촌집의 진위여부는 직접 확인하는 수 밖에 없다
훗날 중국 천주교 경일당 재단을 찾아 경일당 출판물에서 경촌집이 존재하는지 혹은 출판된 왕정의 년호를 확인하면 이 사실의 진위여부는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천주교의 역사는 깊기 때문에 자료물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수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촌집을 출간한 사실이 없다고 확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경일당은 종교재단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건 조작된 책이라는 사실도 염두해 둬야 한다.
(9) 앞으로 [경촌집 역사 탐방기]라는 역사물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
경일당에서 찾아 낸 경촌집의 역사적 기록물을 가지고 경촌집의 존재 여부가 증명이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 증빈 된 자료를 가지고 대만도서관을 방문하여 시정 조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