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쇠의 후예
서류상의 착오인지 아니면 확인 절차의 잘못인지 칩은 항구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변강호는 나긋나긋한 민성희의 목소리를 듣자 그나마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그럼, 어떡해요. 자정까지는 물건이 들어와야 한다는데."
변강호는 그제야 다시 긴장이 되었다. "변 대리님, 천상 내려오셔야 할 거 같은데요. 공장장님이 잔뜩 열이 받아서 내려오시라는데요." "그럴까요?"
변강호는 공장 가동이 중단될 위기보다 모처럼 대구로 나들이 떠난다는 기분에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제가 어쨌든 총알같이 내려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에스테틱에 근무하는 검은 원피스의 여자를 공략하는 건 하루 더 늦춰야 할 것 같았다. 과장은 어쩔 수 없이 변강호의 출장을 승낙했다. 대신 출장비는 없었다. 출장비 없다고 사무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낭만과 사랑 빼면 시체인 변강호가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변강호는 사무실을 벗어나자마자 미용실로 달려가 머리를 다듬고
사우나에서 간단하게 샤워까지 마쳤다. 속옷도 새로 사 입었다. 수염은 깎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는 약간 수척한 모습이 어울린다는 걸 변강호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를 사로잡으려면 언제나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 늘 바쁘지만 바쁘게 사는 건 좋은 거다. '미스 민아, 기다려라. 변강호가 간다'. 변강호는 KTX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 대구역 렌트카 회사에 미리 준비시켜두었던 마티즈를 렌트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스 민을 차에 태워 같이 부산 하역장까지 가겠다는 게 변강호의 계산이었다. 변강호가 소형차를 빌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공간이 협소하다보니 여자의 냄새를 한껏 느낄 수 있어 좋다.
또한 소형차는 야릇한 분위기가 잡힌 후 손만 뻗으면 어느 부위든 공략이 가능할 만큼 실내가 작았다. 게다가 도망갈 공간도 없는 게 소형차다.
여자와 분위기를 잡으려면 크고 좋은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건 결혼할 여자를 사로잡을 때나 필요한 차다. 하지만 변강호는 한 여자에게 목 매고 살 생각이 없다. 변강호가 공장에 도착했을 때 공장장과 직원들이 정문까지 나와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 대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공장장은 변강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물었다. 변강호는 마중 나온 직원들 중에 미스 민을 먼저 살폈다. 늘씬한 키에 쭉 뻗은 다리, 손에 쏙 들어올 것만 같은 가슴.
변강호가 그녀를 무엇보다 마음에 두었던 건 늘 허벅지를 반쯤 드러낸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다닌 때문이었다. "부산에 다녀와야겠습니다. 하역장 사무실과
통화를 했는데 담당자가 직접 와서 확인을 해줘야 한다는 군요. 세부적인 서류 처리를 해줄 사람이 같이 가야겠는데 공장장님이 가시렵니까?" 변강호는 능청스럽게 공장장의 일그러진 얼굴을 쳐다봤다. |
환갑이 다 된 공장장이 과장되게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변강호가 계산한 대로였다.
"나야 여기 공장에 있어야지, 아무래도 서류 처리나 그런 걸 하려면 미스 민이 가야겠는데…."
공장장이 미스 민의 눈치를 봤다.
"그럼, 빨리 갑시다. 시간 없으니까."
변강호도 이마를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 다급하게 미스 민의 팔을 잡아 조수석 쪽으로 끌고 갔다.
"핸드폰이랑 지갑이랑 다 공장에 있는데…"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빨리 가봐라.
오늘 자정까지 칩이 안 들어오면 공장 가동 중단되는 거 잊지 말고."
원단을 뽑아내는 공장은 24시간 풀 가동이었다.
중간에 멈추기라도 하면 녹아서 기계에 달라붙어 있는 칩을 떼어내는 데만
하루 이상이 소요된다. 피해가 막심해진다는 말이었다.
변강호는 부산까지 거칠게 차를 몰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변강호는 그녀를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공략을 해야할 지
고민하느라 머리 속이 팽팽 돌아갔다.
"피곤해 보이세요."
미스 민은 면도하지 않은 변강호의 턱을 보면 말했다.
절대로 침묵을 먼저 깨지 말 것. 물론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자신이 상급자일 때는 그게 효과적이라는 걸 변강호는 동물적으로 알고 있다.
변강호는 못 들은 척했다.
"피곤해 보이세요."
미스 민은 면도하지 않은 변강호의 턱을 보면 말했다.
절대로 침묵을 먼저 깨지 말 것.
물론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자신이 상급자일 때는 그게
효과적이라는 걸 변강호는 동물적으로 알고 있다.
변강호는 못 들은 척했다.
"뭐라고?"
"피곤해 보이신다구요."
"본사 일이란 게 그렇지 뭐, 야근 밥 먹듯 하고 일요일도 없이 출근하고."
미스 민에게서 적당한 측은지심이 슬슬 깨어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변강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가능한 심각한 얼굴로 부산 하역장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문제는 변강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다.
하역 시간이 지나 하역 담당 직원들도 퇴근했고 담당 세무관 역시 자리에 없었다.
숙직 직원에게 서류를 내밀고 아무리 설명해도 물건을 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늘 일처리가 깔끔했던 변강호가 벽에 부딪혔다.
변강호는 하역장 방파제 길 가에 차를 세웠다.
까만 바다 위에 대형 수송선들이 불빛을 반짝이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변강호가 바라던 분위기였는데 일이 이처럼 꼬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미스 민은 불안한지 손만 만지작거렸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집중력이 필요한데 도무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몰아치는 돌풍처럼 몰두할 일이 필요했다.
변강호는 슬그머니 미스 민의 어깨를 잡았다.
장소도 좀 불완전하고 이른 감도 없지 않지만 절차를 밟아 그녀를 유혹할 때가 아니었다.
"미스 민, 정말 비참하군. 이대로 내가 쌓아올린 성이 무너지는 건가?"
미스 민은 변강호의 손을 떼어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미스 민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
"운동도 하고 많이 먹기도 하고…. 그런데 그건 왜요?"
첫댓글 즐독입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