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장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궁정동 안가에서 가수와 모델을 좌우에 앉히고 술을 먹던 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 전에 경호실장 차지철은 일발을 맞은 후 화장실로 도망가 경호원!을 부르짖다가 다시 총을 맞았고 그가 애타게 부른 경호원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사살당한 뒤였다. 이 경호원들과 경호원을 죽인 중앙정보부 요원들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킬 때 한강다리를 앞장서서 건넌 것이 해병대였는데 묘하게도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날 박정희를 경호하고 있던 사람들도, 그들을 죽인 이들도 해병대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즉 박정희의 채홍사 노릇을 했던 박선호는 해병3연대장 출신이었고 그는 역시 해병대 출신인 중앙정보부 요원 이기주, 김태원 등과 함께 역시 해병대 출신인 정인형 경호처장 (박선호의 동기였다고) 과 안재송 경호부처장을 향해 총을 겨눈다. 박선호는 이때 “같이 살자!”고 부르짖지만 정인형 경호처장은 권총을 빼려 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총은 불을 뿜는다. 1979년 10월 26일 밤은 그렇게 여러 사람의 피로 물들었다.
이 거사를 주도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온순한 성격이면서도 자기가 보기에 사리에 맞지 않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우 불처럼 흥분하는 기질이었다고 한다. 일본 순사에게 달려든 적도 있었고 해방 직후 국방 경비대 시절에는 자신의 부하를 체포하려는 미국 헌병에게 칼을 빼들었다가 면직된 적도 있었다. 부사단장 시절에는 사단장의 비리에 분노하여 계급장 팽개치고 나가려다가 육군 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종찬 장군 (이승만의 계엄 선포를 거부한)에게서 설득으로 그 예하로 간다. 김재규는 이종찬 장군을 평생 은인으로 따르는 추종자가 된다.
1960년 4월 혁명이 났을 때 김재규 준장은 이종찬 장군,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장성과 함께 술자리를 갖게 되는데 “총칼이 누구를 위한 것인데 선량한 학생들을 죽이는데 쓴다 말인가?”라고 입을 모아 통탄한다. 그때 자리에 함께 있던 키 작고 목소리 카랑카랑한 장성은 김재규의 고향 선배이자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이었던 박정희였다. 그 1년 뒤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김재규는 잠깐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제거되었다가 복귀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후 18년간 사람됨은 괜찮지만 능력은 조금 떨어진다는 평이 있던 김재규를 끝까지 밀어 주었다. 언젠가 남해고속도로를 지날 때 건설 기념탑 앞에서 무심코 비문을 읽은 적이 있는데 흡사 김일성에게 보내는 북한의 찬사 같은 문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추켜세우던 비문을 지은 이는 건설부 장관 김재규였다. 날짜는 1974년 11월 14일
그렇게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한편으로 그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만도 키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군단장 시절 국정감사를 위해 방문했던 장준하 의원에게 깊은 존경심을 품었고 유신 선포 후에는 박정희가 군단을 방문할 경우 군단장실에 가두고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일종의 중국 서안사변 (장학량이 장개석을 가두고 국공합작을 요구했던)식의 병간(兵諫)을 하려 했다고도 주장했으니까 말이다.
능력은 조금 떨어진다는 평이었지만 고향 선배 박정희는 김재규를 챙기고 밀어주었고 유신 체제의 마지막 중앙정보부장으로까지 임명한다. 당시의 중앙정보부는 그야말로 하나의 작은 정부였다. 언론기관과 학교, 각급 기관 사무실에는 그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있었고 법관들은 중앙정보부가 매긴 형량을 읊는 녹음기에 불과했으며 각하의 밤 행사를 위해 여인들을 데리고 오는 임무까지도 떠맡고 있었다.
김재규는 영락없는 공작정치의 총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한다. 김형욱의 실종은 아마도 그의 지휘 하에 벌어진 일일 것이고 동일방직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부은 배후에도 중앙정보부가 있었을 것이며 YH여공들의 신민당 농성 사태를 박살내는 기획도 그의 중앙정보부가 최종 결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장준하의 가족들에게 은밀한 지원을 하고 있었고 그 아들에게는 “자네 아버님의 죽음의 진상은 밝혀질 것이네.”라는 말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유신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2인자를 허용하지 않았던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에 이은 또 하나의 권부로 경호실을 키웠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최고 권력자의 광기를 돋웠다. 부마항쟁을 ‘일종의 민중봉기’로 평가하는 김재규 앞에서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2백만을 죽였는데 우리는.....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았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의 물러터짐을 질타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총을 들었다.
이미 유신 체제는 종말로 치닫고 있었고 그가 아니었더라도 유신 체제는 몰락하고 박정희는 처단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10.26 이후 11월 3일 국장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국민들이 흡사 김일성 주석의 죽음 뒤의 북한 인민들의 태도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만 봐도 그렇거니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전 대통령과 달리 박 전 대통령은 노쇠하지 않았으며 군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다.”(서중석 교수) 아마 박정희가 그날 죽지 않았더라면 부산은 80년 광주에 앞서 피바다가 됐을 것이다.
쿠데타라고 하기에는 너무 엉성했고 우발적이라고 하기에는 계획적이었던 대통령 암살 후 체포된 김재규는 자신의 행동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사실 그는 박정희를 쏘는 것 이후의 후속 조처나 정권 장악 기도 노력 등을 한 흔적이 별로 없다. 끝까지 자신을 믿고 따른 부하들에게 “자유를 회복시킨 것은 진리를 회복시킨 것이니 죽을 때에는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10ㆍ26혁명 만세만은 부르고 가자. 지금 우리는 가지만 10ㆍ26혁명만은 언젠가 빛을 보게 마련이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렇듯 그는 자신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평가받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의 유언 가운데 하나는 “국민에게 자유가 떠나지 않도록 잘 지켜 달라.”는 것도 있었다.
그가 유신의 수족이었으며 공작정치의 총사령관 중앙정보부장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정권 욕심보다는 분명 다른 모종의 열정에 휩싸여, 하지만 냉정하게 10월 26일 밤하늘을 총성으로 갈랐다. 그의 전적과는 별도로 10월 26일 김재규의 행동은 역사 속에서 일정 정도 평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10월 26일 김재규는 몇 명을 죽임으로써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