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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와 일치(一致)
로마서 12장16-18절 /최태선 목사
➤“16. 서로를 향해 같은 생각을 가지며 높은 것들에 생각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겸손히 행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 18. 가능하다면 너희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롬12:16 KJV)
그리스도의 몸
서로 조화롭게 사십시오, 교만하지 말고, 낮은 이들과 사귀십시오.(혹은, 작은 임무들에 매진하십시오.) 결코 우쭐대지 마십시오.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 이름이 있습니다. 교회 이름을 통해 특별히 자기 교회가 목표로 추구하는 바를 드러내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들의 명칭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이름을 통해 다른 교회들과 차별성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좋은 교회라던가 아니면 건강한 교회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런 행동의 문제점에 대해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오늘날 교회에는 경쟁이라는 세상의 방식이 너무도 당연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교회는 서로 경쟁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말을 하는 저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봅니다. 자신들의 교회, 자기 교회 목사가 최고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경쟁할 수 없는 곳이라는 저의 말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끼고 그런 말이 '약자의 변'이라는 이해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방식의 차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경쟁입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경쟁하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누구도 경쟁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경쟁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지배관계를 구축하고 경쟁에 패한 낙오자들을 양산하기 마련입니다. 경쟁에 이긴 사람들은 패자들을 무시하고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승자들을 증오하게 됩니다. 더구나 공정한 기회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습니다. 가진 자는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자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을 역전시키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추앙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어렵고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러한 사회는 불공정이 정의가 되는 사회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 나라는 경쟁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상대방의 약점을 대신 지는 나라입니다. 아무도 지배하거나 군림하지 않고 능력이 있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은 섬김과 희생이 요구되는 나라입니다.
높은 자는 스스로 낮아져 두드러짐이 없는 평평한 정의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세상의 일반적인 통념과는 정반대입니다. 능력이 없는 자나 사랑 받을 이유가 없는 자에게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이 부어지는 불합리함이 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그 은혜가 의미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조화롭게 사십시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길 잃은 양'의 비유나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모두가 하나님 사랑의 불합리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더 큰 교회, 더 많은 일을 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더 많은 힘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등에 업고 세상 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벌입니다. 그것이 사단에 엎드려 절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복음이 의도하는 바로부터 점점 더 멀리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개인의 욕망을 하나님과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면서 하나님 나라로부터 떠나 세상의 방식으로 깊이 몰입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종파와 교단 그리고 개체 교회주의로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가 부서진 것이 아니라 복음이 부서진 것이며 그리스도인 스스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또 다른 반역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합창을 할 때 여러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지만 아름다운 화음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각각의 교회는 교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내야 하고 모든 교회들 역시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음이 의도하는 바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곳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각각의 교회는 물론 모든 교회들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첫 번째로 뚜렷한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참된 조화로부터 얻게 되는 기쁨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첫 번째로 뚜렷한 의도가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아름다운 합창이 되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소리를 전체 소리와 신중히 조화시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이 공동체에 참여하려는 열의가 퇴색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됩니다. 조화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합창을 듣는 것은 부르는 이들이나 듣는 이들이나 모두 괴로운 일입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우리가 서로에게 속한 지체라는 4절과 5절의 몸 이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에베소서에서 몸은 다양한 부분들이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음'을 통해 서로에게 적절하게 어울리고 각 부분들이 제 기능을 다할 때, 비로소 전체 몸이 성장하며 사랑 안에서 세워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헬라어 동사들은 모두 분사 형태로, 첫 구절은 함께 '같은 일에 마음을 쓰는' 지속적인 행위로 우리를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사려 깊은 신중한 계획성과 목적성의 의미를 강조한 동사를 선택하여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일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강력한 목적의식을 가리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모든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추구하는 목적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방향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그분의 마음을 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에 마음을 쓰기'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특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기도 모임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좀 더 빨리 의견일치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에 서로에 대한 인내심이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더 기도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의견일치가 최우선 순위에 자리매겨지면, 우리는 분명 보다 큰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은 다수결원칙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의 의사결정이 대의기구의 결정이나 전체가 참여하는 다수결의 원칙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만장일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의견이 일치가 되지 않는다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시간이 걸리면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에도 일치가 되지 않는다면 그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진정 성령공동체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 수 없거나 모든 지체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순종할 수 없다면 그 공동체가 성령공동체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저의 이런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너무 원론적이거나 이상적인 주장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유사 공동체는 될 수 있어도 진정한 성령 공동체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공동체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최선의 경우라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주신 은사
찬양대가 아름다운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은 모두에게 훌륭한 음악적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일 역시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그분만이 온전한 일치를 창조해 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드린 대제사장적 기도에 나오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20. 내가 이 사람들만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말로 인하여 나를 믿을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오니 21.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나이다. 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나니 이것은 그들이 하나 안에서 완전해지게 하려 함이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나이다.”(요17:20-23)
다양한 구절들의 반복이 단순히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라 어떤 절정을 말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중요한 사상들을 의도적으로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절정은 바로 교회의 일치가 세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입니다. 제가 지금처럼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절정이 말하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제 마음 깊이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경쟁도 할 수 없고, 자랑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말없이 오늘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일치를 위해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범위 내에서 그것을 실천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이 그런 일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받은 그 메시지를 세상이 알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 가운데 가장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그러한 일치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은혜를 통해 그런 일치를 창조해 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이 계획하신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로의 은사를 축복해 주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지체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껏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사랑의 은사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적극성과 수동성이 결합된 역설적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믿음의 실재를 살아내는 철저한 제자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같은 마음을 품는 일은 화음을 이루는 합창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음악적 은사를 가지고 있고, 악보를 볼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 해도 아름다운 조화와 일치된 화음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완벽하게 악보를 소화하고 악보대로 완벽하게 부를 수 있다 해도 다 함께 모여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체가 하나로 녹아들어가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억제하고 때로는 온 힘을 다해 폭발적으로 큰 소리를 내야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지휘자는 성령이십니다. 그분의 지휘에 따라 혼연일체가 될 때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처럼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이 믿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감격적인 복음을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할 것입니다. 연습을 하다보면 서로 생각이 달라 부딪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역시 교회 일치에 있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타협을 통해서라도 평화를 유지할 때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평화가 자신들의 원칙을 포기하거나 모든 이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저자세를 취하는 대가로 외견상 얻어진 것이라면, 사실 그런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이미 그 공동체는 진리의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일치란 의견이 하나 될 때까지 힘겨운 씨름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타협이 아니라 일치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일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만들어가고 계시지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모난 부분들이 점차 깎여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목적을 다시 상기하며, 목표를 새롭게 정립하고 함께 새로운 기쁨을 발견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본문 말씀의 이어지는 구절은 조화와 일치를 위해 우리가 피해야 할 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높은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며'입니다. 11장 20절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을 향해 구원받았다고 자만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결국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져 나갔다는 사실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동일한 운명에 처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떤 그룹이 다른 그룹들보다 자신을 더 낫다고 여길 경우 그 공동체의 연합은 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교만은 기쁨을 파괴합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 로마의 가정들이 오만했다면 그것은 분명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관계성과 관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질책은, 교파와 교회 내의 여러 분열 조짐을 보이는 오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타나 드럼의 사용이나 예배당 건설 문제, 사회 참여가 우선인지 복음전도가 우선인지, 교리적으로 보수주의인지 자유주의인지 등을 놓고 벌어지는 여러 분열들이 있는데, 이런 분열들은 대단히 실제적인 문제들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됩니다.
교만은 서로에게 긴장만 심화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만합니다. 교만이 슬며시 그 추한 머리를 들려 할 때마다 우리는 분연히 그 머리를 내리쳐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듯이 우리의 능력은 다만 은혜의 선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만할 이유가 없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만할까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다른 이들이 베풀어주는 긍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우월감이나 자기비하 모두공동체의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낮은 이들과 사귀십시오.(혹은, 작은 임무들에 매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주의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고 그에 맞게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낮은 이들과 사길 것을 권면합니다. 그것은 '높은 것들'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그 구절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러나 낮은 것들과 관계하며'입니다. 이 구절은 '낮은' 일에 대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람에 대한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바울의 말은 작은 일들을 자원해서 하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낮은 자들과 사귐을 가지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허드렛일과 같은 낮은 일들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사람들이 없다면 공동체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의 다른 권고에서 섬기는 은사(7절), 즉 '주님 안에서 종으로 섬기는' 은사를 알아보고 사용할 필요가 있음을 이미 지적했습니다. 본문의 이 세 번째 구절은 미천한 일을 감당하는 가운데 기쁜 희열과 훌륭한 정신을 발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가 앞에서 했던 권고들을 보충하기 위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심지어 가장 비천한 형태의 죽음을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저 늘 굽실거리는 줏대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을 겸손히 하는 것, 참으로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은 실로 용기와 지혜와 굳건한 성품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태도의 특성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태도는 결코 그런 시시한 겸손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람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기로 구체적으로 결단하고 선택하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이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는 그분의 이러한 완전한 주체성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시는 그분의 전적인 자발적 헌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겸손의 정신입니다. 낮은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또한 사치와 향락에 미친 이 세상의 물질주의를 분연히 거절한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은 무조건 높아지라고만 하는 우리 문화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를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하향성의 삶을 추구하는 대안적 사회로 구별해줍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너무 화려하게 집을 꾸미지 말고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은 소유하지 말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사용하며, 좀 더 소박한 음식과 의복을 선택할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는 늘 좀 더 잘 섬기기 위해, 우리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들을 다 소유하려는 삶과 검소한 삶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 위해 늘 고민하며 분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아낌없이 나누는 삶과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선물들을 즐기며 사는, 삶의 경건한 균형을 늘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소명을 완수하고 은사를 사용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소유할 필요가 있는지, 경건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 구절의 권고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낮은 자들과의 사귐입니다. 낮은 자들과의 사귐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십여 년 전 동명의 아이들과 수련회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생각 이상으로 잘 먹고 잘 입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먹는 반찬은 정말 제가 평소에 먹는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 얼마나 큰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저는 고아원에서 살아야 하는 그들의 처지를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냈던 그 며칠은 제게 귀하고도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그 값진 경험 때문에 저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를 시작하고서도 저는 저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무심코 내뱉은 저의 말에서 사람들은 이질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저 단순히 몇 학번이냐고, 직접 나이를 묻는 것보다 유연하게 묻는 그 말을 듣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알아듣더라도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저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소득자나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남에게 구걸해야 하는 지점까지 추락한 이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그릇된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 모든 우월감을 버리지 않고서는 '낮은 자들'과 사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생필품이 없어 고생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상당 부분 우리 가진 자들의 잘못입니다. 진정한 기회균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 불의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다양한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교회당 안에서 한데 어우러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 사회의 신분질서에 비춰 볼 때 엄청난 혁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교회는 대부분 지역에서 심각한 계층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해의식은 이유 없는 반항이 아닙니다. 교회는 가진 자와 전문가들이 행세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교회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항간에 '고소영'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현상들은 복음의 포용정신과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하나로 연합해야 할 우리의 사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놀라운 것들이 있습니다. 낮은 자들과 사귐을 가지라는 바울의 권고는 우리 모두에게 겸손한 자세로 서로를 돌보라는 요청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이 되도록 기회를 주는 모든 사람들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으라는 초대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 공동체가 각종 위기사역, 노숙자 보호, 사회의 소외되고 낮은 자들을 돕는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크나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결코 우쭐대지 마십시오.
'결코 우쭐대지 마십시오.'라는 16절의 마지막 구절은 직역하면 "독자적으로 똑똑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입니다. 이 구절 역시 두 가지 방향에서 해석과 적용이 가능합니다.
첫째 이 구절은 모든 종류의 자만심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경건치 못한 야망과 씨름하는 중이라면, 우리는 낮은 자들과의 사귐을 통해 우리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바로 깨닫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완고하고 마음이 굳고 목이 곧은'의 세 가지 형용사를 사용해서 주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존 머레이는 완고한 사람은 "모든 다른 사람의 충고에 대해 닫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 구절은 독단적 가르침과 완고한 태도로 공동체의 희열을 파괴시키는 이 시대 교회들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둘째, 이 구절에서 지혜는 우리가 단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개발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 구절을 그런 식으로 번역하는 경우는 없지만, 이러한 해석은 헬라어 구절의 문맥과 일치할 뿐 아니라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는 12장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개인별 혹은 가정교회별로 유대인 따로 이방인 따로 제각각 활동하지 말고, 모두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성장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본문말씀 마지막은, 복수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에 대해 알하고 있는 17절로 넘어가기 전, 바울이 지금까지 말해 왔던 주제인 공동체에 대해 최종 결론을 내리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그의 결론은, 지혜를 우리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발견하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공동의 지혜를 발견해 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차원의 사역을 어떻게 진행할지 잘 모를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공동체에서 이야기 하고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토의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가장 좋은 해결방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종종 교회당 안에서조차 우리 문화의 완고한 개인주의를 그대로 재현해서 사람들이 제각각 단독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셨고, 그 모든 은사들이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이 이 세상에 편만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독자적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통찰력을 통해 수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의 중심을 향해 한층 더 가까이 인도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개인적 야망에 대한 훈계를 내포하는 또 다른 경고입니다. 개인의 독단적 활동은 공동체적 활동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 이유는 전체 교회의 기쁨을 세우는 청지기적인 삶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측면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적인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겠다는 경건한 야망을 품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강력한 사역의 결과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은 우리 자신을 위해 그러한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경우가 되기 쉽습니다.
문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정작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는 서로에게 비판적 질문들을 던질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참된 섬김의 정신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동기가 얼마나 쉽게 변질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동료들의 훈계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들의 격려와 훈계로 인해 우리는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으며, 자신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사를 혼동 시키려는 유혹을 극복하고, 자유와 경건한 야망을 가지고 전체 공동체의 하나 됨 안에서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는 기쁨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교회들이 우쭐대는 시대입니다.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랑할 수 없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누기 위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우쭐거리며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들이 결코 우쭐대지 않는 교회들이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귀한 권면의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옳은 말씀들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갈가리 찢어진 당신의 몸을 바라보시며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당신의 넓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그것을 은혜로 치장하는 이 시대 교회들을 바라보시며 애달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도무지 당신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무심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성령님의 안타까움도 느껴집니다. 어쩌면 그래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프란체스코와 같은 사람 열 명만 있다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핵심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먼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프란체스코와 같은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반드시 그런 우리를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일에 들어 쓰실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께서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십자가 복음을 알게 하시기를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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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잠 26:26).
감사합니다.
질 보고 갑니다.말씀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