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길은 1921년에 태어난 나 김동길의 누님이다.
남동생이 같은 지붕 밑에 태어난
자기의 누님을 흠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좀 다르다.
우리 두 사람은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에서 원남면 면장의 딸, 아들로 태어나
당시 그 시골에서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버님이 면장 일을 그만두시고 광산에 손을 대시면서 크게 손해를 보고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집안식구들은 이루말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야만 했다.
보통 가난한 집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경우는 있지만
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옛날 세월에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평양에 와서 살게 되면서 집안 살림이 어렵기 짝이없었지만
시골서 소학교를 마친 그 딸을 공장에 보내 몇 푼이라도 벌어오게 하시지 않고
평양에서 여학교에 보내셨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탁월한 결심이었다.
누님은 일제하에 미션스쿨인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 정부가 태평양 전쟁 중에 선교사들을 다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바람에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그래서 평양에 있는 서문여고에 다시 입학하여 졸업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딸을 서울에 있는 이화여전(현, 이화여자대학)에 입학 시키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일을 더 많이 하셔야만 했다.
누님은 보통사람들과는 특이하게 다른 DNA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화여전에 기숙사 사감이 되어 첫 날 밤 점호를 하면서
일일이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보고는 명단 없이 즉시 그 이름들을 다 기억하고
다음날에는 "아무개, 아무개" 라고 부를 수 있었다니 놀라운 능력 아닌가.
그런 능력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태연자약하고
무슨 문제가 생겨도 걱정하는 일이 없는 특이한 성품을 타고난 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 누님이 우리 곁에 있었을 때에는 집안의 일들이 무난하게 해결되었고
그가 이화대학에 총장이 되어서는 이화여자대학이 무난히 굴러갔던 것 같다.
18년 동안이나 더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임기를 마치기 전에
총장 자리를 후배에게 넘겨주고 문경새재 근처에 살림을 옮겨
유유자적 하는 그런 한평생을 살았다.
자기욕심이 없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무서운 힘을 주는 계기가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2021년 4월 17일, 탄신 100주년을 맞은 그를 기리기 위해 이화여자대학에서는
그를 '큰 스승'으로 모시고 사진첩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그는 하루도 자기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을 위해, 맡은 일을 위해 살았다.
아름다운 사람의 아름다운 100년이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