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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80
ㅡ해방전후사 3 ㅡ
(한반도 분할, 너무나 어이없고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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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이 살고있는 한반도에는 대외전쟁과 분쟁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 때문에 일어난 대외전쟁은 고구려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를 가장 많이 침략한 나라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중국 쪽 입니다. 수당, 송원, 원명, 명청교체기 때 침략등이 그러 했습니다. 중국내부 다툼 후 정리가 되면 반드시 우리 한반도를 침략하거나 그에 향응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15세기부터는 일본까지 나서 임진왜란을 일으켜 명일이 조선 땅에서 전쟁을 하고 협상을 합니다.
그 때 협상에도 조선은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우리 민족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본이 우리 땅에서 일으킨 전쟁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한반도 분할을 우리도 모르게 논의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은 드물 것입니다. 아래 자세히 설명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민족 최대 비극인 6.25 전쟁은 원초적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도 있었고 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해방직전 한반도를 38도로 분할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이없고 슬프게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분단이 안 되었음 당연히 6.25 전쟁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당시 조선 지도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건국전쟁'이란 영화에서 신처럼 다루고 있는 건국아버지라는 '이승만'은 당시 미국에 있었습니다.
하바드, 스탠퍼드대학에서 정치외교쪽으로 석사, 박사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수재중 수재인 이승만입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도 일본이 곧 패망하리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반도 미래에 대한 고민했었야 합니다. 조선인 지도자로서 미국 지도층에 한반도 지리적 상황이나 역사등을 알렸어야 합니다.
이승만이 그토록 싫어하고 증오까지 한 공산주의 소련이 한반도에 진입할 경우 일어날 상황과 대처방안을 미국에 알렸어야 합니다.
물론 나라도 없는 한 개인으로서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탄핵은 당했지만 초대 상해 임시정부대통령이었고 미국에서도 최고로 치는 하바드, 스탠퍼드대학 석박사 출신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그런 노력을 했다는 기록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해방후 귀국하여 지도자들 중 처음으로 남한만 단독정부를 주장하여 한반도 분단을 고정화 시켜버리고 6.25전쟁이 일어나고 맙니다.
해방후 한반도 운명이 38도 선으로 분할이라는 비극적으로 결정되고 있을 때 우리 지도자들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한반도 분할, 너무나도 어이없고 슬픈 이야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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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한반도 분할, 너무나도 어이없고 슬픈 이야기! ㅡ
비극적 6.25전쟁 단초를 제공한 우리나라 한반도 분단 비극은 해방 전후 당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엄청난 무지에서 비롯 되었다. 아니 무지라기 보다는 미국은 조선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미국 원자폭탄 공격으로 일본은 급작스럽게 항복을 한다. 미국은 한반도에 들어갈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이 8월 6일과 8월 8일 두 번에 걸쳐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자, 서둘러 일본에 대해 '대일선전포고'를 한다. 이른바 소련군 ‘8월 폭풍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소련 제1극동방면군은 만주 일본 관동군을 공격한다. 일본 관동군은 아무런 방어를 하지않고 소련군에 항복한다. 그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다. 어쨌던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8월 7일, 이틀만인 8월 9일 한반도 북쪽 끝에 도착한다.
8월 11일에는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부대가 한반도 '웅기'에 상륙한다. 다음 날에는 나진항에 상륙하는데 성공한다.
소련군 제25군이 청진을 함락한 것은 해방 후 8월 18일이었다. 8월 24일 함흥, 8월 26일 마침내 소련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평양에 입성했다. 9월 4일에는 소련군이 동두천까지 진출한다.
이때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미군 부대는 일본의 남쪽 섬 오키나와에 도착해 있었을 때였다.
아직 한반도에 들어 오지도 못한 미군이 이때서야 소련군 엄청난 빠른 행보에 깜짝놀라 소련을 제지한다. 소련은 미국 제지로 곧 38선 이북으로 철수한다.
이로써 소련군 38선 이북지역 진주는 종료됐다.
미국은 그로부터도 한 참 뒤인 1945년 9월 8일 미군을 인천항에 보내 상륙시켰다.
미군과 조선인 첫 만남은 불행으로 끝나고 만다. 미군기와 전투기, 탱크 엄호 아래 4만 5000명 군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한 ‘미 점령군’은 일제경찰과 헌병들 손을 빌어 첫 임무를 수행한다. 일제경찰과 헌병대는 미군을 환영나온 인천시민을 향해 질서유지라는 이름 아래 총을 쏘아 군중 2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게 한다.
해방된 조국에서 해방시켜준 은혜 나라 미군을 환영하러 왔다가 일제경찰 총에 맞아 죽는 어처구니 없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미군사령관으로 온 '하지중장'은 일제경찰에게 잘 했다고 칭송하며 당분간 조선 치안유지를 부탁까지 한다. 친일경찰이 다시 살아날 기회를 준 것이다.
미군은 9-10일 사이 서울에 입성한다. 서울 입성으로 미국의 실질적 남한 지배역사인 미군정 시대가 열린다.
미군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38선 이남에 들어와 “승전군(미군)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는 맥아더 포고령대로 조선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그런데 미소는 왜 38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진군을 멈추었을까?
어떻게해서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고 미소가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하게 되었을까?
그 답을 알고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고 슬퍼진다.
우리나라 현재 가장 큰 아픔이자 비극적인 동족상잔 6.25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된 38선이 정말 어처구니 없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우리만 잘 한다고 한반도에 평화가 올까?' 하는 생각도 든다.
너무 가슴아픈 일이지만 이 한반도는 지리적 문제인지, 아님 우리 민족성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모르게 우리 비극적 운명이 결정되곤 했다.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던 날, (1945년 8월10일) 미군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한반도 운명도 결정되고 있었다.
1945년 년 초부터 일본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이 사실은 패전국 일본도 승전국 미국및 연합군 다 알고 있었다. 우리민족만 모르고 있었다.
우리나라 광복은 우리에게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왔다.
도둑처럼 맞이한 해방이었지만 우리 민족은 그저 좋아서 온 나라가 만세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할 때 우리나라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미군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우리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반토막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이 사실 또한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정설로 굳어져온 분단 경위는 2차 세계대전 전승국, 그 중에서 전후처리 과정에서 라이벌로 등장한 미국과 소련이 상호경쟁과 타협산물로 38선을 그었다는 것이었다.
전혀 아니었다.
38도선에 의한 분할은 미국에 의한 일방적 결정이었다.
한반도 지도를 참고해가며 한반도에 직접 38선을 그은 장본인은 미국의 딘 러스크로 알려져 있다. 선을 그은 정확한 날짜는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된 날(1945년 8월10일) 자정께였던 것으로 브루스 커밍스등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할했던 이 분단선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미국은 당시 소련의 일본에 대한 참전이 필요했다. 원폭으로 전쟁을 끝냈줄 모르고 일본 본토로 상륙하려면 엄청난 미국 군인들을 희생시켜야 했다. 그런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소련군 일본참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로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으나 원폭투하 후 소련이 그 점을 눈치채고 극동에서 아주 발빠르게 움직였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 분할협상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명ㆍ일간에, 1894년 청일전쟁 때 청·일간에, 1903년 러일전쟁 때 러·일간에 한반도 분할문제를 두고 열린 비밀회담에서 이미 거론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한반도의 분할에 대한 문제는 항상 일본에 있었다.
해방직후 한반도 분할 또한 가장 큰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한반도 분할의 단초를 연 문건이 1945년 3월13일 당시 일본 현역 해군소장이자 종전 당시 일본 해군성 교육국장이었던 '다카키 소키치'가 육필로 완성한 <주칸호코구안(中間報告案·중간보고 초안)>이었다.
즉 일본 군국주의자들 내부에서 한반도 분할을 일본이 항복하기도 전부터 항복을 예상하고 논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 1905) 전야에 툭하면 들먹거렸던 ‘38선 분할안’을 구체적인 고려대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문건 핵심요지는 일본이 전쟁에서 질 때 지더라도, 동북아에서 일본이 누렸던 기득권을 송두리째 미국에 넘겨줘 미국이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소련과 손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당시는 일본도 소련에 대해 오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소련이 참전할 때까지 항복을 늦추고 있었으며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이 100만이나 되었지만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의 스스로 무장해제하며 길을 열어 주었다.
이런 내용은 지금까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너무 충격적이다.
이것은 엄연히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앞서 말했지만 소련이 일본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 날
(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나진-웅기-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는데도 일본 100만 관동군은 꿈쩍도 안한다. 그런 관동군에 소련군이 더 어리둥절해 하고 놀랄 정도였다.
다카키는 일본 ‘제국해군’ 지도적 전략가로 활약했다.
1939년께부터 일본 세계전략으로
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과 소련을 묶어 영·미 동맹에 대항하는 방안을 입안하고 추진했던 인물이다
미국은 일본패망 당시 한반도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우리나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앞 부분에서 미국 스탠퍼드대학 정치학박사 출신 이승만 역할이 아쉽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KBS에서 제작한 '다큐 공감'이라는 프로에서 '운명의 북위 1도'라는 편을 IPTV를 통해 보았다.
그 프로에서 그 당시 미군전략기획단 일원으로 있었고 '운명의 북위1도 ' 라는 책을 쓴 에드워드 로우니 전직 미군 장성은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945년 8월중 미군전략기획단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팀은 일본이 항복 한 후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 미군 군사 전문가들은 한반도를 분할하는 것을 기정사실 화 하고 있었다. 미국은 단지 어느 부분에서 분할 할 것인지 한반도 지도를 놔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여러상황을 고려하여 북위 39도선이 최적이라고 결정했다. 그리고 그 팀 가장 상관이고 결정권자였던 '링컨장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링컨장군은 부하들이 고심 끝에 결정한 39도선을 거절하고 38도선으로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 이유가 정말 어이없다.
링컨장군이 신봉하는 '스파이크만"이라는 학자학설이 있었는데 세계 주요사적인 사건 90%가 북위 38선 부근에서 일어났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과론적으로는 링컨장군 말이 맞아 떨어졌다. 38선때문에 6.25전쟁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어처구니 없게 한 사람 고정된 관념에 의해 39도선이 38도선으로 결정되고 6.25전쟁 같은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고 만다.
북위1도 차이로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아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39도선으로 했을 경우 북쪽으로 상당부분 올라가 평양 바로 밑이다.
그 부분은 한반도 허리 부분에 해당되어 횡단으로 가장 짧다. 북쪽에서 침략이 있을 경우 방어하기에도 아주 적당하다. 미군전략기획단은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39도선으로 결정했다.
만약 미군전략기획단 처음 의도대로 39도선으로 했다면 "북한도 그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6.25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는 전쟁대신 뭔가 평화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라는 게 미국 군사전문가들 견해였다.
38도선 확정은 별도 미·소간 비밀협약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미·소 간 항복접수구획선으로 제안된 미군전략기획단 건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정설인만큼 로우니장군 주장은 사실 일 것이다.
사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은 그 당시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미국이 스스로 결정해 소련에 일방 통보했을 뿐이다.
그런데 미국이 왜 한반도를 분할 할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 생개해봐도 너무 아쉽다. 아마 그 당시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분할하지 않는다고 상정하고 소련에게 한반도에는 진입하지마라 했음 소련도 안 했으리라 본다.
2차세계대전 중 소련은 미국과 같은 편에서 독일을 상대로 싸웠을 뿐, 일본과는 겨우 1주일간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일본과 한반도에 관한 한 소련 발언권은 거의 없었으므로 38선 이남은 점령하지 말라는 미국 요청을 순순히 받아 들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진입하지마라 했었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참으로 당시 미군전략기획단 생각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분할이나 38도선이나 39도선 이야기는 우리 우리는 전혀 모르는 채 몇 사람들 전략가에 의해서 결정 되어버렸다는 너무나도 어이없고 슬픈이야기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위기 시 대한민국에 통찰력있고, 진정성있는 지도자가 나타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어서 해방전후사 4, '여운형과 건준' 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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