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장 시작된 죽음의 요리!
①
그때 어둠을 가르며 다가드는 관부금마선의 좌측 오십여 장 밖, 파도에 밀리는 부표인가?
해변을 향해 흔들리며 밀려오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 문득 파도가 낮은 부르짖음을 토하며 겨울 바다를 흔들고 지나갈 때였다.
돌연 파도소리에 섞여 두런두런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가야. 저기 검은 물의 그림자가 보이느냐?"
"응."
"저기가 바로 중원이다. 아가의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대륙이지."
"중원?"
바다 위에 떠오른 검은 물체는 바로 자천릉을 품에 안고 헤엄쳐 오는 대천법왕 사륵탄의 그림자였다.
해란주에서 중원으로, 그 죽음의 탈출 사십 오 일! 관부금마선 밑창에 몸을 붙인 채 한 사람씩 스스로 죽음을 맞아야 했던 그 처절한 사투의 마지막 순간이 마침내 도래한 것인가.
대천법왕 사륵탄. 이 위대한 라마교의 달라이대라마의 권위를 상징하던 붉은 가사는 갈가리 찢기워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뿐이랴. 지난 사십 오 일 간의 고행의 흔적은 그의 얼굴과 팔, 가슴에 할 것 없이 깊고 얕은 무수한 상처들을 새겨 놓았고 품 속의 자천릉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는지 그의 어깨와 등판에는 도끼에 맞은 듯 길다란 상처가 나있어 보기에도 끔찍했다.
그렇다. 그의 분신과도 같던 밀법부왕 포랍, 등격리의 은리설타 관자격, 서백리아의 마지막 왕손이던 후산왕야, 장백의 살인자란 이름으로 중원을 질타하던 계림인 형제 무의척과 무의괄 등 이방십오국(異邦十五國)의 한과 눈물을 대변하던 그 모든 인물들은 조금 전 회리오조의 첫째 무의탁의 최후를 끝으로 일만 해리 동해바다에서 모두 장렬히 산화됐고, 이제 살아남은 인물은 단 한 사람, 사륵탄 뿐이었던 것이다.
허나 중원의 땅을 응시하고 있는 자천릉의 얼굴에는 한 점의 상처나 피로한 흔적조차 없었다. 이방 십 오 인이 스스로 죽음을 맞으면서까지 호흡을 시키고 암초와 격랑, 흉폭한 물고기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왔기 때문이었다.
"아가야. 네가 중원에 나간 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부나비도를 찾는 것이다."
사륵탄이 상처 투성이의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부나비도에 가면 천치의성 사공역이라는 분을 찾아 노납의 이야기를 하고 아가의 불완전한 신체를 완성시켜야 하느니라."
"부나비도? 그게 어디 있는데?"
"허허, 육천마을 중 소재가 확실한 것은 천재촌과 술예벌, 그리고 시망상천밖에 없단다. 허나 명심하거라. 부나비도를 찾기 전에는 절대로 고수들과 싸워서는 안됨을!"
사륵탄의 음성은 점차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다음으로 아가는 낙양 백마사를 찾아가 보국불사란 분을 만나거라. 그분께 노납의 법호를 말하고 네가 가진 아홉 개의 이국십보를 보여주면 열 번째 기보인 백자공후(白子 )와 함께 난세십승의 모든 무학이 남겨진 철편십권(鐵片十卷)이라는 열 권의 무경을 줄 것이다."
말을 하면서도 사륵탄의 신형은 점차 해안을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사륵탄은 가까워지는 중원을 못 박힌 듯 바라보고 있는 자천릉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
"이국십보와 철편십권을 갖고서 아가는 제국보림장경대전도가 가리키는 곳을 찾아가거라. 그곳에서 대원제국과 라마교가 남긴 모든 유물과 무학들을 수습한 후 아가가 얻은 모든 구결과 무학이론, 병장기들의 응용법들과 함께 익혀야 한다. 그리고,"
파도가 두 사람의 몸을 때리고 있다.
"아가의 무공이 아가 자신마저도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강호에 출도해야 하느니라."
"훗, 그런 다음에 십팔만사천 뭐라고 하는 곳을 찾아가라는 거야?"
"그렇단다. 아가의 무공이 완전해지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들어가 그때는 이미 하늘에 있을 우리들의 곁으로 곤오풍우라는 자를 보내다오. 그것이 노납과 우리 이방십칠인의 마지막 부탁이란다."
"마지막 부탁? 그, 그럼 중할아버지도 죽는단 말야?"
"허허, 그 대답은 바로 우리의 발 밑에 있단다."
"발 밑!"
자천릉은 반사적으로 바다 밑을 내려다 보다 흠칫 굳어졌다.
시커멓게 죽어 있는 깊은 바닷 속에서는 검은 가죽옷을 뒤집어 쓴 두 개의 인영이 발 밑을 향해 달라붙어 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다가왔다 싶은 순간 자천릉과 사륵탄의 신형은 무언가가 전신세포를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듯 강력한 흡인력에 바닷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허허, 아교찰피흡마기(牙 擦皮吸 氣)... 말거머리라 불리는 몹쓸 시주들이었군."
사륵탄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렇다. 이들이야말로 피합추보다 먼저 무의탁을 죽여버렸던 말거머리 형제 아교마해였던 것이다.
쭈우우우!
흡사 거대한 말거머리의 흡판이 전신의 피를 빨아내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아 오는 그때였다.
"갈(喝)! 떨어져라!"
철퍽!
사륵탄의 쌍장이 해면을 후려치자 바닷물이 그대로 해일처럼 밀리며 아교마해 형제의 전신을 강타했다.
"크흑!"
"끄아악!"
비명과 함께 삽시간에 해면으로 수없이 떠오르는 물체, 그것은 바로 천참만륙으로 부서진 아교마해 형제들의 육편과 뼛조각이 아닌가.
"나무환희불!"
사륵탄은 정말로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기라도 한 듯 허옇게 흐물거리는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 보며 무거운 불호성을 흘렸다.
"괜찮아? 중할아버지."
"허허헛! 괜찮다."
사륵탄은 짐짓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사실 그의 몸은 과도한 진력의 소모로 인해 더 이상 헤엄 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허나 그는 애써 고통을 감추며 자천릉의 얼굴을 보았다.
"아가야. 부디 노납의 말을 명심하거라. 중원의 살수로 알려진 아교마해 형제가 우리를 습격했다는 사실은 이미 누군가 검은 그림자가 우리의 탈출을 알게되어 우리를 노리고 있음을 뜻한다. 더욱이 탈출시각과 장소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나타났다는 것은 그 검은 그림자가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 검은 그림자가 나를 노린다고?"
"검은 그림자가 노리는 인물이 우리들인지 아니면 아가인지를 알 길은 없다. 허나 살아서 뭍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아가 뿐일 터이니 아가는 그 검은 그림자에 의해 끝없는 추적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사륵탄이 자천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게다가 아가는 이국십보 중 아홉 개를 포함하여 수많은 기보와 가공할 병장기들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 아가는 움직이는 보물섬인 것이다. 언젠가 그 사실이 검은 그림자에 의해 강호에 알려진다면 아가는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수많은 무인들의 표적이 되고 만다."
"이 보퉁이에 든 물건들이 그렇게 귀하단 말야?"
자천릉이 등에 멘 커다란 보퉁이를 툭툭 쳤다.
"그렇단다. 부디 하루 바삐 부나비도를 찾아가거라. 그 이전에는 될 수 있는 한 몸을 숨겨야 하느니라."
"그런데 검은 그림자가 왜 나를 노리는 거지?"
"허허허, 그것은 훗날 아가가 크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 그럼...."
자천릉이 막 무어라고 대꾸하려는 순간이었다.
"잘 가거라, 아가야!"
사륵탄이 돌연 나직한 일갈을 토하며 다짜고짜 자천릉을 육지를 향해 던졌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액!
돌연 어디선가 한 줄기 새파란 칼날이 자천릉의 신형을 뒤쫓아 유성처럼 폭사되는 게 아닌가.
"허허, 노납의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누가 아가를 해하려 하는고!"
슈파앗!
사륵탄의 신형이 자천릉의 몸을 꿰뚫으려는 칼날을 눈부신 속도로 막아서고 칼날이 그대로 사륵탄의 심장을 관통해 버린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칫! 또 실패다."
사륵탄의 동체가 하얀 눈밭 위에 선혈을 뿌리며 나뒹구는 순간 피합추의 살벌한 그림자가 그 옆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육시랄 땡초 놈이군! 제몸을 던져 꼬마를 죽이는 것을 방해하다니!"
사륵탄은 손을 쓰기에는 이미 시간이 늦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육신으로 자천릉을 꿰뚫는 칼날을 대신 받았던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 어느새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사륵탄의 모습을 노려본 피합추가 자천릉이 떨어진 해변을 향해 재차 신형을 뽑아 올리려는 순간 심장을 찔려 즉사한 줄 알았던 사륵탄의 얼굴에 돌연 빙그레 미소가 번져오르는 것이 아닌가.
"허허허, 잘 가게 시주."
한 가닥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사륵탄의 신형이 유령처럼 솟아올라 그대로 피합추의 등판에 쌍장을 후려쳤다.
"크악!"
피합추가 피를 토하며 땅바닥을 뒹굴더니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 어떻게... 이, 이런 일이?"
"허허허, 우리 라마교의 최후비전 중에는 심장을 찔려도 단 한번 다시 영혼을 되찾을 수 있는 환시라불대유법공(還屍喇佛大酉法功)이란 무학이 있다네."
피합추는 사륵탄의 담담한 음성을 들으며 고목이 무너지듯 그대로 거꾸러졌다.
그 모습을 내려보는 사륵탄의 입가에는 검붉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급속히 잿빛으로 탈색되어 가고 핏기 잃은 그의 입꼬리에 허탈한 웃음이 소리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무환희불! 본하는 당연히 죽어 마땅하도다. 대원이 천하를 지배할 때 천하의 모든 것을 발 아래에 두던 본하가 오늘 이런 하찮은 살수에게 심장을 찔리우다니, 이렇게 두 번 죽는다 한들 어찌 선대에 끼친 누를 씻을 길이 있을 텐가."
사륵탄의 동체는 천천히 흰눈 위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중할아버지!"
어느새 뒤로 돌아온 자천릉이 쓰러지는 사륵탄의 몸을 받치며 회색으로 변해버린 사륵탄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었다.
"아, 아가! 어서 달아나지 않고... 왜?"
죽은 줄 알았던 사륵탄의 눈꺼풀이 힘겹게 떠졌다.
"중할아버지!"
자천릉의 눈에 비친 이 위대한 달라이대라마의 동공은 검은 자위가 이미 허옇게 풀려가고 있었다. 언뜻 자천릉의 무표정한 얼굴에 가느다란 경련이 피어났다.
"허허, 부끄럽게도... 아가의 앞에서 노납이...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다니!"
사륵탄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간신히 자천릉의 손을 움켜쥐었다.
"과거 해란주에서... 노납은 아가가 평범한 사람으로 밝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길 바랐었다. 허나 중원의 문턱에서 덧없이 죽어가는 지금 노납은... 아가에게 부탁하고 싶구나."
"그래 말해 봐! 무슨 부탁이야!"
"어차피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아가의 죽음은 천하의 모든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커다란 죽음이 되도록 할 수 있겠느냐?"
"!"
"허허, 죽음에도 그릇이 있던가... 나 사륵탄은 타고난 그릇이 작아 이렇듯... 작은 죽음을 죽어야 하는가...?"
사륵탄의 음성은 차츰 잦아 들어가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중할아버지! 죽는거야?"
자천릉이 사륵탄의 몸을 마구 흔들자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반짝임처럼 사륵탄의 잿빛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피어나며 눈꺼풀이 힘겹게 떠졌다.
"릉아가 깨우지 않았다면 잊어버릴 뻔했구나."
"?"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백마성이라고도 하지만 기실 백마는 그리 두려운 준재가 아니다. 백마는 태대각(太大閣) 자리를 놓고 서로 견제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한 명, 한 명 제거해 나갈 수 가 있다."
마지막 잠력이 격발된 듯 사륵탄의 음성이 또릿해지기 시작했다. 회광반조의 현상이었다.
"허나... 단 한 사람...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서열 삼 위이며 곤오풍우의 가장 충실한 그림자로 어쩌면 곤오풍우보다 더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인물이 있다."
"할아범들이 그토록 무섭다고 말해 온 곤오풍우보다도 더 경계해야 할 사람?"
"그렇단다. 기실 우리들 중 곤오풍우를 직접 만났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그자에 의해 해란주까지 잡혀왔고 그 자의 손에 곤오풍우의 문장을 찍혔던 거란다."
그랬던가? 이들 이방십칠인은 곤오풍우에 의해서가 아니라 겨우 그의 수하에 불과한 자에게 잡혀 왔었던가. 허면 곤오풍우의 진정한 능력은 대체 얼마나 더 크고 깊다는 것인지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항상 황홀한 향기가 풍긴다. 그리고는 노란 꽃잎 한 장이 미풍에 실려 날아들고... 꽃잎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상대는 눈 앞에 형성되는 꽃가루의 회오리를 목격하면서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자의 이름은 바람... 꽃바람이라고 부른다."
"꽃바람? 알았어. 릉아가 꼭 기억할게."
자천릉은 왠지 모를 전율이 찌르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안색을 싸늘하게 굳혔다.
헌데 자천릉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 그리고 곤오풍우와 함께 그와 처절한 숙명의 사투를 벌여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인 꽃바람. 치열하게 얽혀드는 그 무서운 운명의 소용돌이를.
"드디어... 시작됐다. 릉아와 곤오풍우, 아니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싸움... 약소국의 설움 속에 핍박받고 억눌리던 이방십오국과 천하의 중심이라 칭하며 스스로 오만해 왔던 중원과의 싸움이...."
자천릉의 굳어진 얼굴을 바라보던 사륵탄의 눈빛에 희미한 격동이 스쳐가더니 이어 그 눈에서 급속도로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중할아버지!"
자천릉은 다시 사륵탄을 흔들어 깨우려다 흠칫 얼어붙고 말았다. 사륵탄은 이제 더 이상 다시 깨어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천릉은 묵묵히 사륵탄을 안아 든 채 일어섰다. 그가 마주보고 선 겨울바다는 아직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휘이잉!
그 어둠으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문득 자천릉은 품 속에서 잠든 사륵탄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 들어줄게. 중할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부탁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내가 들어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될 거야."
쏴아아아!
"그렇지만 꼭 죽어야 될 것까지는 없잖아. 릉아는 천하의 흐름을 바꾸는 죽음보다 천하의 흐름을 바꾸는 삶을 살거야. 죽긴 왜 죽어, 바보같이!"
소년 자천릉의 가슴아픈 음성이 울려퍼지고 있는 이곳은 동쪽으로부터 시작되는 중원의 끝, 청도의 겨울바다였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