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은 조선 중기의 여류 서화가입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현모양처로 유명하며 오만원권 지폐의 모델이기도 하지요.
우선 그녀의 재능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시와 그림에 매우 재능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세 때는 글공부를 시작하였고, 7세 때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림을 그릴 정도였지요. 안견은 세종대왕 때 가장 뛰어났던 화가이고 이후 우리나라의 미술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명인의 그림을 어릴 때부터 슥슥 따라 그렸다는 것이죠.
특히 그녀의 그림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조선 중기의 거물 정치가였던 ‘송시열’(이 사람이 발문을 적은 이유는 뒤에서 더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숙종’ 임금이 그녀의 그림에 ‘발문’을 지었지요. 발문이란 작품의 끝에, 작가나 작품에 대한 평가 혹은 칭송하는 문구를 적는 것을 말합니다. 발문을 짓는 사람의 명예가 걸려 있음은 물론이지요.
그녀의 재능은 예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인 감각도 탁월했지요. 그녀의 남편 ‘이원수’는 벼슬을 하지 못하여 친척이자 당대의 우의정인 ‘이기’에게 벼슬자리를 부탁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극구 반대했지요. 결과적으로 신사임당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이기는 후일 ‘을사사화’로 인해 숙청당했거든요. 만약 이원수도 이기를 통해 관직을 얻었다면 함께 숙청당했을 것입니다.
또한 유교적인 지식도 대단했습니다. 남편 이원수에게 자신이 먼저 죽으면 재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때 공자와 주희 등의 고사까지 인용하며 의견을 내세우는 모습은 매우 논리적이지요.
사임당: "제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7남매나 두었으니까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원수: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사임당: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나타나게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원수: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사임당: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공양하는 도리에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해서 다시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원수: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 같은 일이 없소?"
사임당: "주자가 47살 때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지만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결코 남편의 말에 순응하기만 했던 여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원수는 이 말을 무시하고 주막집 여자 ‘권씨’를 신사임당이 살아 있을 때 첩으로 삼았습니다. 신사임당 사후에는 직접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지요. 이 권씨라는 사람의 연배가 장남인 ‘이선’과 비슷했기에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신사임당의 3남 율곡 이이는 아버지의 행태에 질려버려 집에 말도 하지 않고 금강산으로 출가해 버렸죠.
여하튼 신사임당은 시, 서, 화는 물론 학문에도 능했던 엄친딸의 표본처럼 보입니다. 괜히 아홉 번이나 과거 장원급제를 한 율곡 이이 같은 사람이 나온 게 아니지요. 또한 신사임당 당대에는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라는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예술가로서 뛰어난 명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녀의 업적이나 여러 가지로 상당히 앞서나갔던 여성이라는 면모는 무시되는 편입니다.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명칭이 더 유명하여 그녀 자체는 별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지요. 물론 현모양처라는 단어 자체나 율곡의 어머니라는 점은 절대로 모욕적인 단어는 아니지만, 그녀 개인의 역량이 묻혀버린 것은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의 주변인으로 머물게 된 것은 앞서 말했던 송시열의 영향이 큽니다. 그는 이이의 학풍을 계승했기에 이이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했지요. 그가 신사임당의 그림에 쓴 발문을 볼까요?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사임당화란발>
이런 발문을 시작으로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세력들은 신사임당을 격상시키는 데 힘썼죠. 이는 결코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신사임당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율곡 이이의 부속품 정도로 취급한 것이지요.
조선 당파의 계보를 잠깐 언급하자면 이 서인 세력이 후일 ‘노론’으로 이어지고, 노론의 학풍이 유학의 정통으로 현재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신사임당의 주변인화는 정말 오랫동안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죠.
현모양처의 개념은 전통적인 아내의 이상적인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단어의 원 뜻과는 달리 지금에 와서는 그저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에게 어진 어머니이면 현모양처로 불리기 충분하다고 여겨지지요. 이런 왜곡된 뜻으로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라 부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는 이원수의 부인이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 예술인 신사임당이니까요.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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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