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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의 역사는 항상 프레임을 만들고 모든 것을 그 프레임에 따라 재단하는 역사였다. 참된 기독교인과 이단이라는 프레임, 고귀한 아리아인과 사악한 유대인이라는 프레임, 훌륭한 백인과 열등한 흑인이라는 프레임, 위대한 미국과 악의 축이라는 프레임, 사회주의자와 반동분자라는 프레임, 애국세력과 빨갱이라는 프레임, 최근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등장한 독립운동세력과 토착왜구라는 프레임 등 다채로운 프레임이 있었다. 프레임에 따른 사고방식은 흑백논리에 입각해 있다. 정상적으로 간주되는 집단은 무조건적으로 선하고, 비정상으로 간주되는 집단은 무조건적으로 악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종교인들이나 정치인들은 이러한 프레임을 만들어 대중을 현혹하면서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대중은 프레임에 따른 선동에 너무나 잘 넘어간다. 사람들은 자신은 선이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충족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가장 비판적인 지성이라고 자부하는 철학자들도 곧잘 프레임에 빠져 자신이 신봉하는 철학사조를 정당화하는 데 급급해하면서 다른 철학사조는 격렬하게 배격한다.
2.
'왜 나는 현재의 나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통속적인 정식분석학은 현재의 내가 된 것은 어린 시절에 그런 내가 되도록 조건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이렇게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릴 때는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정신분석가에 의존하거나 권위적인 정치가 등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프롬은 네 살 혹은 다섯 살의 아이도 자기 나름대로 주체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현재의 내가 이런 것은 내 어머니가 나를 잘못 길렀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부모나 외부의 영향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은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왜 내가 현재의 내가 되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이며, '어떻게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3.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은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에 미국인들에게 영국에 대한 항쟁을 호소하면서 부르짖었던 말이다. 이 말은 그 후 프랑스혁명이나 1871년 파리코뮌을 비롯하여, 압제에 대한 민중의 항쟁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서 민중에게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와 열정 그리고 목숨보다도 자유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불어넣었다. 유사한 말로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는 말도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참으로 자유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로 자유를 원하는가? 사람들은 정녕 무릎 꿇고 살기보다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가? 역사를 보면 오히려 자유보다는 무릎을 꿇고 노예의 삶을 택한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않은가? 우리는 자유보다는 비굴한 연명을 더 바라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노예제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겠는가?
4.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대해서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생존이 위협받고 있지 않는데도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신적인 종교나 정치이데올로기에 빠지는 것도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러한 종교나 정치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다. 신과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성직자들의 노예가 되고, 민족이나 인민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정치가들의 노예가 된다.
5.
보통 우리는 외적인 강제에 의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고 정의한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동물에게 본능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본능에 따라서 사는 동물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물은 본능에 따라서 살 때 건강하게 산다. 따라서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본능에 충실하게 사는 동물은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6.
프롬은 이렇게 인간과 동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동물의 삶은 인간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지렁이는 시궁창에서 잘 산다. 이러한 삶은 인간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삶이다. 시궁창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사는 것을 기준으로 하자면, 인간은 지렁이를 아무리 해도 따라잡을 수 없으며, 지렁이는 인간보다 무한히 우월하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동물이 우월한지 인간이 우월한지는 달라진다. 맨눈으로 먼 곳을 보는 능력은 인간이 독수리를 결코 따라갈 수 없다. 따라서 동물과 인간 중 무엇이 우월한가에 대한 논의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7.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형성한다는 사태와 인간이 본능에 의해서 제약되지 않은 열린 세계에서 산다는 사태는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동물은 목전의 현실에 사로잡혀 있지만, 인간은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와 미래에 열려 있다. 인간에게 미래는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과거 역시 과거의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이 흙수저로 태어난 것을 불행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자신을 더욱 강하고 원숙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축복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무한히 펼쳐져 있는 공간을 상상하면서 파스칼Blaise Pascal이 말하듯, 무한한 공간의 침묵 앞에서 전율할 수도 있다.
8.
인간의 삶은, 약화된 본능 대신에 이성과 상상력을 갖기 때문에 사로잡힐 수 있는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 대신에 연대감과 활기와 의미로 충만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이 점에서 프롬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본능적인 욕망뿐 아니라 인간에게만 특유한 욕망들이라고 본다. 프롬은 그러한 욕망으로 첫째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합과 합일을 원하는 욕망, 둘째 무력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을 느끼고 싶어 하는 초월과 창조에의 욕망, 셋째 허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삶에 숭고한 의미와 방향 그리고 목표를 부여하는 지향체계와 헌신의 대상을 구하는 욕망을 들고 있다.
9.
행복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무런 고통도 없는 즐거움이라는 식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지속적인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용액을 발명해서 뇌를 그 속에 영구적으로 담가 놓는 것이 최대의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상태를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별다른 능동적인 노력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돈과 명성과 권력을 갖게 되면 행복은 자연히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지속적인 오르가즘을 느끼게 하는 용액에 의존하여 행복해지는 것은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행복이 돈과 명성 그리고 권력과 같은 외적인 것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프롬은 인간은 돈이나 명성 혹은 권력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전개할 경우에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롬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습관화되고 체화된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갖는 만족감을 행복이라 보았다. 달리 말해서 인간의 행복은 돈이나 명성 혹은 권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인격적 성숙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10.
프롬은 이렇게 나르시시즘을 벗어난 상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프롬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편협한 나르시시즘, 즉 편협한 이기주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물질이나 명성 혹은 자신이 집착하고 동일시하는 국가나 민족 혹은 종교적·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이성적인 덕을 제대로 구현할 경우에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을 제대로 사랑한다고 보는 것처럼, 프롬 역시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인 잠재적 능력을 제대로 구현할 경우에만 진정으로 행복하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본다.
11.
근대인은 중세봉건 사회의 비합리적인 규범이나 신분적인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이러한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인은 자유를 부담스러운 짐으로 생각하면서 새로운 비이성적인 권위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어 하게 된다. 프롬이 말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바로 이러한 심리적 경향성을 가리킨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 경우 자유란 단순히 전통사회의 비이성적인 규범과 구속에서 해방되었다는 소극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주체적인 자아를 실현하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감각적·정서적·이성적 능력을 온전히 실현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란 인간이 주체적인 성장을 포기하고 비이성적인 권위에 자신을 내맡기는 상태로 퇴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12.
더럽고 썩어 있으며 악취가 나는 것이나 죽은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원래의 네크로필리아는 오늘날에는 청결하고 번쩍거리며 많은 경우에 에로틱한 아름다움마저 갖추고 있는 정교한 인공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롬은 오늘날 생명의 세계는 '비非생명'의 세계가 되고 사람들은 '비인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프롬은 20세기 후반을 지배하는 네크로필리아의 정신은 표면적으로는 미소와 친절을 보이면서도, 오히려 모든 것을 사물화하고 상품화하는 보다 세련되고 섬세한 네크로필리아라고 본다.
13.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평등은 고귀하고 주체적인 인간들의 평등이 아니라 개성을 상실한 자동인형들의 평등일 뿐이다. 이러한 평등은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생각을 갖고 있다는 획일성을 의미한다. 현대의 대량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현대사회는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대사회는 이렇게 개성이 사라진 평등을 이상적인 상태로 내세우면서 사람들에게 거대 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일하는 원자적인 인간이 되도록 강요한다.
14.
근대 초기에 사람들은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획득했지만, 현대인들은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사실을 믿는 내면적인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 사람들은 과학에 대한 우상숭배에 빠져 인간의 모든 문제를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사랑의 능력을 성숙시킴으로써 고독감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신경안정제와 같이 현대의학이 제공하는 약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언론의 자유 역시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의 속박에 대한 투쟁으로 획득한 귀중한 승리지만, 현대인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는 대부분이 여론이나 상식과 같은 익명의 권위에 의해 주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표면적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안정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지독한 불행에 빠져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들은 사회의 한 기능 인자로 전락해 버린 자신의 비참한 자아를 구원하기 위해 이른바 개성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거나 독특한 디자인의 핸드백을 들거나 문신을 하고, 핸드백이나 휴대전화 등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개성을 갖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자부심을 갖는 이러한 개성이 사이비 개성이라는 사실은 말할 나위도 없다.
15.
우리는 사랑과 책임감과 관심에 입각한 삶을 살 경우에만 자신의 인격과 정체성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에게 속하는 재산이나 지위, 권력, 가족, 신체, 과거의 영광을 통해서 확보하려고 한다면, 자신의 인격과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아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존재being의 범주에 관계되는 것이지 소유의 범주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의 참된 정체성은 내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내가 얼마나 진실하게 존재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진정으로 '나'라는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을 사랑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며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고 살 경우에만 주어진다. 이렇게 참된 나로 살 때,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고 재물을 상실해도 정체성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
고지식한 규범과 신분 제도에서 벗어난 현대인들은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세상에 살면서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진정한 나, 존재(being)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자기 내부의 공허를 끊임없이 외부 요인들로, 소유로 채운다. 또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자동인형이 되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표면적으로
안정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아의 참된 정체성은 내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내가 얼마나 진실하게 존재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예로부터 만연한 진리지만, 우리는 오늘도 '나'가 아닌 '나의 주변'을 토대로 내 정체성을 정의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은 살면서 꼭 한 번쯤, 단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분야이고, 나에게도 그렇다.
부끄럽지만,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절반도 채 넘기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반납한 적이 있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에 이어 박찬국 책의 님을 읽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는데,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덕분에 에리히 프롬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즐거웠다. 철학을 어려워하는 나
같은 사람이 읽기에 정말 좋은 책이라고 느꼈다. 어렵겠지만, 앞으로 천천히 더 많은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쌓고
싶다. 그러면 늙어 죽기 전까지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