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군에는 첫 출전에 나선 조조의 큰 아들 조비가 있었다. 조비는 이때 열 여덟이었다. 그러나 그 전부터 끊임없이 전장에 따라나서고 싶어했다. 조조는 적장자인 조앙을 전장에서 잃은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 일로 조앙을 아끼던 정부인 정씨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조비는 기녀 출신인 변씨 소생으로 조조의 아들 중에서는 맏이가 되었다. 변씨는 출신과 관계없이 조조의 첩실들을 잘 이끄는데다가 조비를 비롯해서 4명의 아들을 낳아 정부인의 자리에 올랐다.
조비를 이번 전쟁에 참여시키면서 아직은 어린 나이가 불안했던 조조는 조진(曹眞)을 함께 참전시켰다. 뒷날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제갈공명을 상대했던 대장군 조진이 바로 그다. 조진은 본래 조씨 집안이 아니다. 본래는 진(秦)씨였는데 조조가 특별히 조씨 성을 내려주었다. 조조가 아직 기반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흥평 말년에 적도들에게 쫓기던 일이 있었다. 이때 조조의 친구였던 조진의 아버지 진소(秦邵)는 자신을 조조라고 주장하여 대신 잡혀 죽었다. 조조는 그 우정에 보답하여 조진에게 조씨 성을 내리고, 조비와 같이 길렀다. 조진은 조비보다 한 살 위였으나 두 사람은 친구처럼 자라났다.
업성이 함락되자 조비는 오랫동안 부친을 괴롭힌 원가의 본성이 어떤 곳인지 궁금한 나머지 둘러보았다. 하지만 오랜 전쟁을 통해 황폐화되어 허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 이번 수공으로 황폐화되어 기주의 중심으로 수백 년간의 영화를 누린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비켜라!”
“안됩니다. 대장군께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들이, 감히 어느 분의 앞을 막느냐!”
조비가 화를 내기도 전에 조진이 먼저 고함을 질렀다. 조비의 신분을 알고나자 병사들도 감히 막을 수가 없었다.
조비는 칼을 뽑아들고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혹시 아직 원가에 충성을 바치는 이가 숨어있어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진이 부하들과 함께 조비를 호위했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비는 안심하고 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원가의 후원입니다. 가실 수 없습니다.”
하인 하나가 나와 조비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앞의 병사야 조조 군이니 호통만 쳤을 뿐이었다. 조진이 바로 그 주제넘은 자의 목을 날려버렸다. 다시는 앞을 막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몇몇이 뛰어가 조조 군이 후원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 같았다.
원가의 후원에는 원소의 미망인인 유씨와 차남 원희의 아내 견씨만이 있었다. 그리고 조비의 목적은 견씨에 있었다.
견씨는 기주 중산군의 명문 집안의 딸이었다. 아버지 견일(甄逸)은 견씨가 세 살이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그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견씨가 열 여덟이 되었을 때 원소는 그녀를 원희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원소는 그 해에 공손찬을 멸망시켰고 원희는 곧 유주자사로 길을 떠나야했다. 유주가 안전할지 아직 알 수가 없었고 원희는 황폐한 곳에 아내를 데려가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견씨는 업성에 시부모와 함께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제 조비 앞으로 끌려오게 된 것이다.
조비는 견씨의 미모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본래 유명하여 중원의 사내들치고 모르는 이가 없었다. 조비의 세째 아우인 조식(曹植)은 이때 열세 살에 불과했지만 업성을 함락시키면 견씨를 자신에게 내려달라고 아버지 조조에게 졸랐을 정도였다.
조비는 조식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비도 어렸을 때는 신동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나 둘째 조창(曹彰)은 무술로 자신을 넘어서더니, 세째 조식은 학문으로 자신을 넘어섰다. 조식은 열살 때 이미 시경, 논어, 고금의 한시와 명문을 줄줄 외워버렸다. 단순히 암송의 단계를 넘어서 작문도 그럴듯하게 해냈다. 그런 아우가 탐낸 여자가 눈앞에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견씨였다.
조비는 그녀의 단아한 이마, 초승달같은 눈썹, 반쯤 내리깔아 더욱 커다랗게 보이는 쌍꺼풀과 둥글고 큰 눈, 오똑한 콧날, 그리고 당장이라고 입을 맞추고 싶게 도발적으로 도톰한 입술을 차례로 훑어내려갔다. 솟아오르는 욕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견씨는 조비보다 다섯 살 연상으로 스물세 살이었다. 그만큼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조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소문대로 죽이는 미인인걸?”
조진이 소근거렸다. 조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비는 견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나는 조 대장군의 아들 조자환이다. 너희는 누구냐?”
견씨 옆에 엎드려있던 중년의 여자가 말했다.
“빈첩은 원기주(원소)의 처 유씨이고, 이 아이는 둘째 며느리 견씨입니다. 부디 너그러운 은혜를 베풀어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주십시오.”
“걱정하지마라. 내가 너희를 지켜주마.”
조비는 견씨를 데리고 후당으로 들어갔다. 조진이 칼을 뽑아들고 아무도 근접치 못하게 했다.
조조는 성내를 진압한 뒤에 원가의 부중으로 가볼 마음을 먹었다. 조조 또한 천하절색이라는 견씨의 미모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성문 옆을 지나갈 때 조조 곁에서 같이 말을 몰던 허유가 채찍으로 성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만(阿瞞=조조의 아명), 내가 아니었으면 이 문을 지나갈 수 있었겠어?”
“그래, 그래!”
조조는 허유의 말을 웃어넘겼지만 조조의 뒤를 따르던 장수들은 모두 불쾌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허유가 아무리 주군의 옛 친구라 해도 최근 행동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조조는 원가에 도착하여 수직을 서고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여기를 넘어선 사람은 없었겠지?”
“도련님이 드셨을 뿐입니다.”
“뭐야?”
조조는 크게 노해서 조비를 당장 불러오라고 명했다. 조조가 조비를 야단치는 와중에 원소의 처 유씨가 나왔다. 조조와 유씨는 안면이 있는 사이라 얼굴을 알고 있었다. 유씨가 말했다.
“대장군의 아드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견씨를 바칠 것이니 아드님의 첩으로 삼아주시기 바랍니다.”
유씨가 말을 마치자 견씨가 조조 앞으로 나와 절을 올렸다. 조조는 견씨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한탄같기도 하고 찬사같기도 한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과연 내 아들의 아내가 될만해.”
조조는 발길을 돌려 원소의 무덤을 향했다. 조조는 제물을 올려 원소의 넋을 위로한 다음 구슬프게 곡을 했다. 조조는 곡을 마친 뒤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난 날 천하를 바로잡고자 본초와 나는 군사를 일으켰었지. 그때 본초가 물었다. ‘일이 잘못되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나는 본초에게 되물었지.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본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북에 의지할 것이다. 연과 대 지방을 아우르고 사막의 무리까지 끌어내어 남하한다면 적수가 없을 것이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지’라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지. ‘천하의 지모와 역량을 사용하여 도(道)로써 다스린다면 못 할 것이 없다네’라고 말이야.”
제장들이 숙연하게 조조의 말을 들었다. 조조가 도로써 다스린다고 한 것은 그의 사상 속에 깊이 잠겨 있는 황로의 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조조는 난세를 다스리기 위해 엄한 법과 공정한 통치가 필요하다고 믿었지만 고대의 군주처럼 통치의 행위가 드러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했다. 조조의 이런 마음은 그가 지은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술을 나누며 노래 부르자,
태평성대를.
관리가 불러대지 않으며
왕자(王者)는 현명하고
재상과 신하들 충성스럽고 어질며
예의와 겸양을 지키니
백성들 다툴 일이 없어라.
삼년을 농사지으면 구년을 살 수 있으니
창고엔 곡식이 넘쳐라.
반백이 되어도 짐을 질 일 없으리.
조조는 기주의 백성들에게 그해의 세금을 걷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스스로 기주목에 올라 업성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조조 군이 업성에 머물자 허유는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설쳐댔다. 허유가 오소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장하의 물을 끌어들여 업성을 공략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시석을 무릅쓰고 공을 세운 장수들이 보기에는 자기 공만 내세우는 졸장부에 불과했다. 모두들 그를 흰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허유는 더 장수들을 무시했다. 조조도 그런 허유를 무시하고 있었다. 조조의 태도는 자연히 장수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루는 허저가 성의 동문으로 들어서다가 허유를 만났다. 허유가 공연히 허저를 불러세우고 야단을 쳤다.
“내가 아니었던들 네 놈 따위가 이 문을 드나들 수 있었겠느냐?”
허저도 더는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우리가 천신만고를 무릅써 목숨을 걸고 혈전을 거듭하여 이 땅을 얻은 것이다!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네 놈들은 모두 필부에 불과하다! 너희들이 지략에 대해서 아는 게 뭐 있겠느냐?”
허저는 불같은 성질의 사내다. 허유의 이런 모욕을 참을 사람이 아니었다. 허저는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허유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허저는 허유의 목을 잘라들고 조조를 만나러 갔다.
“허유가 워낙 방자하게 굴어 참지 못하고 그를 죽였습니다. 벌을 주십시오.”
조조가 탄식을 하며 말했다.
“자원(=허유)은 내 옛 친구로 농담을 했을 뿐이다. 어찌 죽이기까지 했단 말이냐?”
조조는 허저에게 책망을 크게 하고 허유를 후히 장사지내주었다. 허유가 경망스럽기는 했어도 하북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비였다. 선비들을 홀대하면 인심을 얻을 수 없다. 조조는 주위에 기주의 이름난 선비들을 추천하게 했다.
그 중 추천된 한 명이 최염(崔琰)이었다. 최염은 자를 계규(季珪)라고 하고 청하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검술과 무예를 좋아했다. 본래 무인이었으나 스물세 살때 처음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스물 아홉이 되었을 때 정현에게 가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원소가 그를 불러 기도위로 삼았다. 최염은 관도대전때 원소에게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고 간했으나 원소는 최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림이 애써 변호해주지 않았다면 그도 전풍처럼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최염은 물러나 집에 은거하고 있던 중이었다. 업성이 함락되었을 때 조조의 나이 오십, 최염의 나이는 마흔 아홉이었다.
조조는 최염을 불러 별가종사에 임명한 뒤에 말했다.
“어제 호적을 들춰본 즉 병사 30만을 얻을 수 있겠소. 과연 기주는 큰 주라 할만 하오.”
“지금 천하가 나뉘어져 구주(九州)가 모두 갈가리 찢겨져 있습니다. 기주는 두 원씨가 서로 싸우는 통에 기주의 백성들은 백골이 되어 황야를 뒹굴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천자의 군대를 이끌고 오셨음에도 인의를 앞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원할 방도를 묻지 않으시고 호적부터 물으시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체 기주의 백성들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같이 있던 사람들이 최염의 대담한 말에 놀라 얼굴색들이 변해 버렸다. 그러나 조조는 최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조조는 기주의 일이 대충 마무리되자 원담에게 업성으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원담은 원상이 중산으로 도망친 것을 알고 그곳으로 원상을 잡으러 출동했다. 그러나 원담이 도착해보니 원상은 이미 유주의 원희에게 도망친 다음이었다. 원담은 평원으로 돌아갔으나 조조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원상이 패한 마당에 조조와 협조할 필요가 없었다.
조조 역시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원담과 맺은 혼약을 파기하고 군사를 이끌고 평원으로 출정했다. 기주의 통치는 조비에게 맡기고 최염에게 보좌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