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태조의 결단으로 무 태자가 왕좌에 오르긴 하였으나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왕규』가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규의 딸은 태조의 16번째 아내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광주원군」이었다
왕규는 먼저 혜종의 동생인 요와 소가 반란을 꿰한다고 말했으나
혜종은 믿지 않았다
왕규로부터 위협을 느낀 혜종은 꿈 해몽을 잘 하는 최지몽을 불렀는데
궁 안에 역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 날밤 암살자들이 왔지만 충신 박술희가 물리쳤다
혜종은 이 사건에 대해 왕규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왕규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그 후 혜종이 병석에 눕자 충신 박술희는 왕규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군사를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혜종은 박술희 반란을 일으킬려고 하는줄 알고 박술희는 귀양보냈다
그 후 박술희는 유배지에서 왕규의 손에 죽었다
혜종은 왕규를 처단하기 위해 서경(평양)에서 작은아버지 『왕식렴』 장군을 불렀다
그러나 혜종은 왕규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왕식렴은 왕규와 싸워 왕규를 이기고 왕규를 귀양 보냈다가 곧 처형하였다
이 때 왕규의 도당 300여 명도 함께 숙청되었다
첫댓글왕규의 세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보다는 왕요, 왕소형제의 세력이 월등했고 이들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 더 위협적이었죠, 왕식렴은 서경파로써 왕요, 왕소형제와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오히려 왕규가 친혜종파였고, 왕요,왕소형제가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첫댓글 왕규의 세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보다는 왕요, 왕소형제의 세력이 월등했고 이들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 더 위협적이었죠, 왕식렴은 서경파로써 왕요, 왕소형제와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오히려 왕규가 친혜종파였고, 왕요,왕소형제가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왕규와, 박술희 등을 숙청하고 차기 대권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거 같습니다. 후에 왕요는 3대 정종, 왕소는 4대 광종으로 등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