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오태백(吳泰伯) 이방우
태조 이성계의 장남은 진안대군 이방우(13~1394), 신의왕후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의판서와 밀직부사를 지냈다. 이방우는 고려 우왕 14년(1388)에 부친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가족을 데리고 세상에 숨어 살 뜻으로 철원 보개산에 들어가 은거하였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국가 일에는 일체 간여하지 않고 해주로 옮겨 가서 은거하였다. 아버지 이성계로 부터 동북면 고원 땅 전사를 하사받아 고향인 동북면 함흥으로 다시 옮겨 가서 여생을 보냈다. 태조실록 진안군 이방우의 졸기에는 진안군은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더니,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하였다고 적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적장자 이방우
1789년(정조 13년) 할아버지(영조)의 능(구리 원릉)에 행차하고 돌아오던 정조의 어가를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충주 사람 이국주였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신은 진안대군(이방우)의 15대 손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잃어버린 무덤을 돌본 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2년 전 홍수 때 비석이 드러났습니다. 묘갈(墓碣)의내용을 보니 '진안대군의 부인 지씨의 묘(鎭安大君妻三韓大國夫人池氏之墓)'와 그 옆에 '대군묘재좌(大君墓在左)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덤을 새로 봉축해야 할 것인데….”
진안대군 이방우가 누구인가. 바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적장자였던 인물이다. 이국주의 상언을 들은 정조가 가슴을 쳤다.
“아! 그 분이 우리 집안의 오태백(吳太柏)이신데…. 그 묘가 실전되어 안타까왔는데 이제 떨어져 나간 비문 조각과 깎여나간 글자를 이끼에 묻히고 돌이 부서진 뒤끝에서 비로소 찾아냈으니...”
정조는 이렇게 한탄하면서 경기관찰사에게 추상같이 명을 내렸다. "무덤을 봉축하고 제청(祭廳)을 지어 수령이 철저히 관리토록하라."
왕명으로 묘소가 정비되던 날 정조가 직접 비문을 지었다. “태조의 장남으로(太祖長胤)~가정에서는 효성스러웠고(在家而孝) 신하로서는 미더웠네(爲臣也藎). 의로운 군대가 서쪽으로 돌아오자(義旅西回) 필마로 동쪽으로 떠나가니(匹馬東조) 북산의 옛 마을로(北山故里), 곧 오태백이셨네.(卽泰伯吳)”(홍제전서)
조선의 오태백(吳太伯)
정조의 어제시가 표현했듯 이방우를 왜 조선의 오태백이라 하는가. 오태백은 중국 춘추시대 ‘춘추5패’ 중 하나였던 오나라의 시조다. 본래 주나라 태왕(고공단보)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태왕은 내심 막내아들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갖고 있었다. 사실 태왕의 가슴 속에는 또 다른 심모원려가 있었다.
막내아들인 계력도 현명했지만, 계력의 아들인 희창이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태왕은 “대업을 일으킬 사람은 나의 손자 희창(훗날의 주 문왕)일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태왕은 막내아들 계력~손자 희창으로 후계를 이어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린 장남 태백은 둘째인 우중과 함께 오랑캐 땅인 형만(장수성 쑤저우 지방)으로 피했다. 거기서 태백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절대 왕위를 이을 뜻이 없음을 전했다. 덕분에 막내아들인 계력은 왕위에 올랐고, 계력의 다음 왕위는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희창에게 이어졌다.
주나라는 주 문왕 때 반석 위에 올랐다. 주 문왕의 아들인 무왕 때 은을 멸하고 중원의 천자로 우뚝 선 것이다. 한편 태백은 형만 사람들의 추대로 오나라의 시조가 됐다.
훗날 공자는 “태백이 세 번이나 천하를 양보했으니 지극한 덕이라 할 수 있다”(논어 ‘태백’)고 칭송했다. 그런데 정조를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이방우)을 ‘조선의 오태백’이라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뒤바뀐 운명
과연 그럴까. 이방우는 과연 중국의 오태백처럼 ‘쿨’한 마음으로 동생(방과 정종과 방원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초야에 묻혔을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와 6남2녀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 2남1녀를 각각 두었다. 한씨와의 사이에서 이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을, 강씨와의 사이에서 방번·방석 등의 아들을 낳았다.
이방우는 어렸을 때부터 효자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조금 자라서는 시서(詩書)에 몰두하고 검약을 실천하였으며 부귀영화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고려조에 벼슬해서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정조실록)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1388년(고려 우왕) 아버지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면서 운명이 뒤바뀐다.
이방우의 무덤을 수축하면서 그의 삶을 재조명한 <정조실록>을 보자. “태조(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명나라를 받들자 대군(이방우)은 가족을 이끌고 철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은거한 것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기록이다.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역성혁명의 뜻을 노골화하자 철원으로 몸을 숨겼다는 것이니까…. 결국 이방우는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반대했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다는 것이 시사해준다.
이후 이방우의 행적은 어땠을까. “1392년, 태조가 조선개국 후 왕위에 오르자 대군은 마음 속으로 두 동생(정종과 태종)이 모두 성덕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향(함흥)으로 낙향했다. 두 동생이 마치 (중국) 주나라 계력 및 문왕(희창)과 같다고 여겼다.”
술병에 걸려 죽은 까닭
<실록>은 점입가경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군(이방우)은 스스로 부족한 사람을 자처하고는 국가의 일에 일절 간여하지 않고 함흥으로 물러가 살았다. 태조께서도 대군의 뜻을 대략 아시고 땅과 집을 하사했다. 장남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그 행적을 묻어버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태조는 주 태왕이고, 이방우는 태백이며, 정종(방과)은 계력이고, 태종(방원)은 계력의 뒤를 이은 희창(문왕)이라는 소리다.
한마디로 스스로 왕의 재목이 아님을 스스로 간파한 이방우가 왕의 기품을 갖춘 두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함흥으로 은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철원으로 은거했다”는 <실록>의 내용은 심상찮다. 또 “태조가 이방우의 행적(자취)을 묻어 버리고 싶어 했다”는 내용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종합해보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은 맏아들 이방우에게 결코 용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맏아들은 새 나라 조선의 세자이자 2대 임금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일까. 이방우는 조선 건국 1년 만인 1393년(태조 2년) 죽고 만다. 그것도 술병에 걸려서. “진안대군 이방우는 술을 좋아하는 성질 때문에 날마다 술을 마셔댔다. 마침내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태조실록)
<실록>은 이방우가 원체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했지만 과연 그 뿐일까. 혹시 은둔지에서 고려의 망국을 슬퍼하며 소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술병에 걸려 죽은 것은 아닐까.
불행의 씨앗
이방우의 은둔(1388년)과 사망(1393년) 이후 조선은 피바람이 분다. 조선 개국(1392년 7월 17일) 후 불과 한 달 여 만인 8월 20일 불행의 씨앗이 잉태됐다.
태조가 계비(신덕왕후 강씨)의 두 아들 가운데서도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이다. <태종실록> ‘조준 졸기’(1405년)는 세자 결정의 순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태조는 (그토록 사랑하던) 차비 신덕왕후 강씨의 맏아들인 방번을 특별히 사랑해서 마음에 두고 있었다. 태조가 배극렴, 조준, 정도전, 남은을 불러 의논했다.”
참석자 가운데 배극렴은 “적장자로 세우는 것이 고금의 의(義)”라 했다. 태조는 배극렴을 외면했다. 조준도 태조의 뜻에 반했다.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가 우선이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功)이 있는 자가 먼저입니다.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
배극렴과 조준 등의 의견은 한마디로 계비 강씨의 아들들은 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 태조와 대신들의 대화를 밖에서 엿듣는 이가 있었다. 바로 신덕왕후 강씨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간파한 강씨는 갑자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강씨의 울음소리는 밖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조준에게 “이방번의 이름을 쓰라”고 명했다. 조준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듯 쓰지 않았다. 태조는 끝내 강씨의 어린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았다. 그래도 방번보다는 방석이 낫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신덕왕후 강씨도 대단한 여인이었다. 정비(신의왕후)의 장성한 자식들이 5명이나 살아있는데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밀다니.
이방우가 세자였다면…
이 날의 세자책봉은 결국 화를 불렀다. 꼭 6년 뒤인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세자 방석은 물론, 방번 등 신덕왕후 강씨의 자제는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정안군(이방원)은 “적자를 세자로 세우는 게 만세의 상도(常道)”라면서 “그런데도 장자를 버리고 유자(幼子·방석)를 세워 화를 불렀다”고 주장했다.
이방원은 ‘적장자’의 명분을 내세워 왕노릇이 싫다는 둘째 형(방과)을 굳이 세자로 옹립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2대왕이 된 방과(정종)는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다가 불과 2년 만에 다섯째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말았다.
물론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필요없다. 하지만 비운의 적장자인 이방우를 접하면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 이방우가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면 어땠을까. 제1, 2차 ‘왕자의 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역사도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조선의 설계자라는 정도전도 그렇게 비명횡사 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오태백 이방우는 동생 이방원의 칼끝에 죽는 비극을 비켜갔으니, 이방원의 야욕을 미리 예견했건 고려의 충신으로 남고자 했건간에 제 한몸과 가족은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조선의 오태백(吳泰伯) 이방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