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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편백나무 숲
요절한 여름에게 / 강혜빈
편백나무가 날아오르는 시간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첫 번째 돌에 표시해둔 나를 지나쳐
마치 갈림길에서 힌트라도 쓸 것처럼
척척함과 약속은 잘 어울려
더듬더듬 목구멍 들춰 어둠을 만지듯이
나는 오늘 가지색 인사법을 배웠고
카나리아를 내년 귀퉁이에 묻어주었지
철제로 된 새장이 무엇을 책임져?
날개 터는 방법을 잊어버렸어 어쩐지
뾰족한 부리는 당신의 피상
나는 오늘 도도한 레몬처럼 거절했고
편백나무의 날숨은 뿌리를 놓치는 것
뱃속이 잠시 투명해지는 그런 것
내가 따뜻한 흙을 퍼먹는 동안에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새끼손가락을 주머니에 넣고
어제로 통하는 길을 잘 안다는 듯이
그러나 모르는 발바닥처럼
하늘을 지나치게 올려다보며
우리는 절벽을 잊어버릴 수 있어
똑똑한 버섯들은 어떻게 우는지 들어봐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 시집 『밤의 팔레트』(문학과지성사, 2020)
* 강혜빈 시인
1993년 경기 성남 출생, 서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문학과사회> 등단.
시집 『밤의 팔레트』
사진가 ‘파란피’로 활동 중
<문학과사회> 2016년 여름호, 신인상 당선작 [심사평]
▲ 힘들었고 부끄러웠고 이상했다. 6인용 책상 위에 가득 놓인 투고작들을 하나하나 책상 아래 종이 상자로 옮기는 일은, 쉽지도, 자랑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았다. 시를 계량화하는 노동이라니. 나는 비로소 빌라도의 심정을 이해했다. 심사에 참여한 소감을 쓰는 지금도, 이 이상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시를 쓰기 시작한 뒤로, 시는 나에게 목적이었을까, 수단이었을까. 돌이켜보건대 아마도,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시인데, 죽기 살기로 쓰는 시인들이 보낸 시들이 책상 위에서 상자 안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중 다섯 편의 시가 이 책에 실렸다. 상자 안의 시인들에게 용기를 내라는 말은 사치이고, 오늘도 이토록 진지하게 시를 대하는 문청들이 있다는 상찬은 공직선거용 구호와 같을뿐더러, 뽑힌 시인에게 축하를 건네는 건, 원조교제를 사랑이라 항변하는 아저씨들의 변론과 같을 것이라서, 모두 생략한다. 다만, 힘이 들었으니, 상자 속의 시인들에게 조금 덜 미안하고, 부끄러웠으니 '당신'을 몰라본 저를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고, 이 모든 것이 이상하고 이상했으나, 그럼에도 한 편, 또 한 편, 종이를 넘길 때마다, 문득문득 나를 아득한 곳으로 이끌어 눈물 나게 한 '당신'의 문장들에게, 두 눈 지그시 감고 안부를 전한다.
- 최하연 시인
장성 편백나무 숲
▲ 시란 무엇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예심 내내 다소 엄격한 잣대로 작품을 읽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고민은 마찬가지였다. 응모자들의 이름을 바꾸어 읽는다 해도 그리 다르게 읽히지 않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시편들. 그야말로 잘 만들어졌다고는 여겨지는, 그러나 텅 비어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써나갔는가, 자기만의 언어를 어디까지 밀고 나갔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선뜻 손을 들어줄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최종적으로 정화연, 베이지, 백선율, 강혜빈의 시편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갔다. 정화연은 내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쓴다는 점이 시인으로서 좋은 덕목으로 여겨졌으나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내면의 발화점이 사라진 자리에서 써 내려가게 될 무엇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느낌이 들게 했다. 베이지는 이미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언어와 놀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곧 다른 지면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백선율은 담백한 어조가 인상적이었다. 허나 절제된 언어로 써 내려갈 때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감당해야 될 무게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강혜빈은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활달한 어법을 가지고 있었다. 시적 긴장감을 무너뜨리는 몇몇 안이한 문장들이 아쉽기도 했으나 다양한 이미지들을 조화롭게 불러와 한 편의 시로 구성해낼 줄 안다는 점에서 이후에 써 내려갈 시편들도 기대하게 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오랜 낙선의 날들을 떠올리며 당선되지 못한 다른 분들께도 몇 마디 전하고 싶다. 당선작과 낙선작의 차이는 실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심사는 그저 하나의 편견 정도로만 여기고 계속해서 자신만의 시의 길을 걸어가라고 말하고 싶다. 걸어가는 그 길이 어둡고 무겁다 해도, 걸어가는 내내 당신 혼자만이 아니라고. 당신의 시가 당신의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오늘의 이 어두운 눈을 비웃듯 번쩍이며 솟아오를 또 하나의 시의 얼굴을 기대해본다.
- 이제니 시인
장성 편백나무 숲
[심사 경위]
올해 신인문학상에서는 심사 방식상의 작은 변화를 꾀했다.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을 초청함으로써 좀더 다양한 문학적 입장과 취향을 심사에 반영하고 나아가 문학과사회 신인상이 견지하려는 문학적 모험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시 부문에서는 최하연, 이제니 시인, 소설 부문에서는 백민석, 한유주 소설가와 함께 투고작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편집동인들(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이경진, 조연정)은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패기 넘치는 신예들을 탐색하고자 노력했다.
▲ 총 507명이 응모한 올해의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은 양적으로 작년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은 소위 '서정시'라고 광범위하게 지칭되는 전통적인 계열의 시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예년의 심사평에서도 유사한 소회를 밝힌 바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에 촉발된 다양한 시적 실험의 파장과 영향이 어느새 안정적인 방식으로 시 창작의 현장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향 관계나 모방이라는 단순한 말로 충분히 아우를 수 없을 만큼 이러한 변화의 폭과 깊이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시에 대한 기존의 관습적인 이해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에 대한 통념의 파괴가 역설적으로 시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통념을 낳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되물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낯선 감각으로 능란하게 기록하는 응모작들이 많았지만, 응모자들이 구가하고 있는 자유가 시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생략하고 포기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이 매개되지 않은 날 선 언어들을 장황하게 전시하도록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으며, 낯설고 특이한 이미지와 단어들을 조합하면 곧바로 시적인 문장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안이한 태도 역시 자주 목격되었던 것이다. 1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18명의 응모자들의 작품들을 좀더 단호하고 꼼꼼하게 검토한 것도 그 때문인데, 그 결과 최종적으로 정솔아, 베이지, 백선율, 정화연, 강혜빈의 작품들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베이지는 본심에 오른 응모자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시는 기성의 의미를 파산시키고 새로운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문하려는 의지로 충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험적인 의지가 시의 언어를 작위적으로 포박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솔아는 시적인 상황을 재치 있게 조성하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으며 시적 긴장이 일어서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시적인 정황과 순간을 연출하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시의 전체적인 구조를 희생시키는 경우를 종종 발견했다. 백선율은 겉으로는 단아하고 미니멀해 보이지만, 현실과 꿈의 경계를 청신한 감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응모한 시편들만으로는 그의 시가 지닌 스펙트럼의 넓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전반적으로 시들의 색채가 비슷하다는 뜻이다.
논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정화연과 강혜빈의 시였는데, 두 응모자의 작품들은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색채가 서로 달랐다. 우선 정화연의 [유원지]외 9편에서는 응모자 자신이 체험이 시로서 강렬하게 육화되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인에 의한 폭력과 고통을 소재로 자신의 일상과 육체를 낯설게 되돌아보는 그의 시선은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자신의 경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시적 언어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반면 강혜빈의 [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외 9편은 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산개해나가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독자를 유혹하듯, 매끄럽고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시들 사이에는 다소 편차가 있었으나 시적 진술들이 조성하는 리듬감도 매력적이었으며, 여기에 아이 화자 특유의 자유로운 화법이 더해져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와 같은 감각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듯하다. 오랜 습작을 통해 단련된 시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숙성을 거치지 않은 가능성이야말로 한 시인의 장점을 더욱 만개시키는 창조의 원천이라는 생각 끝에 강혜빈을 당선자로 결정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응원과 감사의 말을 전한다.
-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이경진, 조연정
장성 편백나무 숲
「요절한 여름에게」라는 제목이 살아 숨 쉬는 사유와 신선한 감각을 동반한다. 삶에서 죽음을 껴안는 방식이랄까.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이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주체의 목소리가 여름장마처럼 다가온다.
“나는 오늘 가지색 인사법을 배웠고/ 카나리아를 내년 귀퉁에 묻어주었지”라는 문장을 모르는 사람처럼 따라간다. 그 길에 드리워진 비애의 그늘을 감지한다. 우리는 무엇을 감당하기 힘들 때 비참한 세계에 내던져 질 때, 차라리 다시 태어나기를 열망한다. 그래서 주체는 ‘카나리아’를 요절시킨다. 그리고 ‘내년’ 이라는 시점이 탄생의 순간으로 선택된다. 그것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고자하는 표지(標識)인 셈이다. “철제로 된 새장이 무엇을 책임져?” 라는 질문은 자기 삶에 대한 탄식을 드디어 스스로 풀어보겠다는 고백이라고 해도 좋을까? “우리는 절벽을 잊어버릴 수 있어” 잠시, 강혜빈의 투명한 비애가 얼어붙은 얼음처럼 빛나는 문장이다.
우리는 장애물이 있으면 뛰어넘으려 하고, 부수려하고, 극복하려고 전전긍긍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다. 그러나 시인은 잠시 간편한 망각의 방식을 택한다. 비밀스러운 책사처럼 잠시 죽는다. 그리고 힘이 세지고 성장하기를 기다린다. “똑똑한 버섯들은 어떻게 우는지 들어봐” 창조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뿌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조건이 생길 때, 버섯은 키를 키우고 세계로 확장된다.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존재는 방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순간일지라도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 가” 라는 전언으로 삶에 대한 방식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다. 강혜빈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방법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 최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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