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때(7년)는 큰 환난이 아니다. 아마겟돈이 큰 환난이다
1. 일곱 때(7년)에 대하여
기독교 신자라면 기성교단이든 자칭 메시야교단이든 누구나 아무런 성경적
근거제시도 없이 입버릇처럼 "칠년 대환난"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있다.
그런 어불성설의 나팔을 무작정 아무렇게나 불어대고 있다니
이는 성경에 대해 일자무식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자살꼴임을 누가 알랴.
일곱 때란 대환난의 때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일곱 때에 대해 성경을 들어 일일히 열거한다면 무수히 많아서 그 모두를
다룰 수는 없고, 간단히 결론부터 말한다면 예수님이 오신 이래 그분이
다시 오시는 기간까지가 된다.
즉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이 일곱 때가 된다.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이 된다고 해서 재림주가 곧 영광의 옷을 입고
우리 눈앞에 나타나시는 때까지도 아니다. 재림의 때는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은 처음부터 그분이 "내가 그로다" 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고 스스로 연막을 치고 감추어 계시면서 말씀(주의 음성)만으로
무덤속에 죽어 있는 우리를 불러내시는 때가 있고, 그 후에 영광의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처음엔 말씀만으로 우리를 불러내시기 시작하는 최초의 때까지를
"일곱 때(7년)" 라고 한다.
이러한 일곱 때는 전 셋때 반과 후 세때 반으로 나누인다.
"전 셋때 반" 은 초림 예수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기간이 된다.
초림 때의 복음전파는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된 것를 일컬음이 아니다.
천국이 미래에, 즉 재림 때에 실현되리라는 예언이다.
따라서 계11:3에서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전 셋때 반)을 예언하리라" 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두 증인이란 초림예수님과 재림예수님을 한테 묶어서 언급한 것이 된다.
그리고 "후 셋때 반" 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된 후에 적그리스도가 복음백성을
짓밟는 기간이다. 즉 예수님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666=적그리스도)이
먼저 와서 기성교단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그리 초토화시키는
때가 된다.
그런데 이같이 후 셋때 반에 복음백성의 멸망은 곧 두 증인의 멸망과 같다.
예수님은 복음이 세계화되면 다시 오시는데, 그 재림주가 이 땅의 보좌에
앉지 못하고 그 보좌를 후셋때 반동안 적그리스도에 넘겨준 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11:7,8에서
"저희(두증인)가 그 증거(전셋때 반의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영적으로 하면..." 이라는 뜻은 초림때는 예수님이 육적 십자가를
지셨으나, 재림때는 영적 십자가를 지셨음을 의미한다.
영적 십자가이므로 육체의 죽음은 없다.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전 셋때 반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기간이요, 후 셋때 반은
적그리스도(자칭 메시야)가 복음백성(기성교단)을 짓밟는 기간으로써
합 일곱 때가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일곱 때 동안을 살아왔는데
일곱때 동안은 환난의 전조를 보인 환난의 시작은 될수 있을지언정
본격적인 큰 환난은 절대로 아니다.
큰 환난이란 아마겟돈 전쟁이 되기 때문이다.
2. 큰 환난(아마겟돈)의 때는 언제인가
적그리스도, 즉 자칭 메시야들은 사이비 재림주들이다.
참 재림주는 자신을 일컬어 "내가 그로다" 라고 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다.
전 셋때 반과 후 셋때 반이 지난후에, 즉 일곱 때만에 예수님은 재림하시지만
예수님은 진리의 새말씀만 주시고, 처음엔 자신의 신분을 절대로 알리지
않으시는 천기로 임하신다.
아가서의 술람미 여자가 왜 그토록 아름답다고 극찬을 하고 있는가.
그는 전략상 너울을 쓰고 연막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너울을 쓰고 자신의 신분을 감춘 상태에서 말씀만을 주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를 알아볼 수 없으며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멸시천대만 받게 된다.
사53:3-5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했다는 것은 택한자라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멀리했다는 뜻이다.
재림예수님은 적그리스도의 집권중에 오시는데,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들은
그분을 알아보는가? 아니다.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천기 가운데, 때가 되면 그분은 권능과 영광의
옷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그분은 여전히 감추어 계신다.
영광의 옷을 입기 전에도 물론 감추어 계시고 영광의 옷을 입으신 후에도
처음엔 아직 감추어 계시면서 말씀만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능력과 영광의 옷을 입기전에 감추어 계시면서 멸시받고 귀히 여김받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분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함이다.
또 능력과 영광의 옷을 입으신 후에도 얼마간(아마겟돈때) 감추어 계시는 이유는
이 때부터 비로서 사람들을 택하여 불러모으시기 위함인데, 이것은 곧
적그리스도와 본격적인 큰 환난의 아마겟돈 전쟁을 발발시키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초림때도 열두제자들을 친히 택하셨다. 마찬가지로 재림때도
예수님은 그 능력으로 적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들 중에서 만세전에
택한자들을 불러모으시게 되는데, 이렇게 속속 우리주님 음성 듣고
돌아오는 자들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적그리스도는 분기탱천해서
그분께 대적하게 된다. 이것이 본격적인 큰 환난의 아마겟돈이다.
이 아마겟돈을 일컬어 단11:45에서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베풀 것이나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줄 자가 없으리라" 라고 했다.
장막 궁전은 적그리스도를 일컫고, 바다는 기성교단이며,
영화롭고 거룩한 산은 능력과 영광을 입으신 재림주의 캠프이다.
이 때는 재림주께서 권능과 영광체의 몸을 입으신 때가 되기 때문에
"영화롭고 거룩한 산" 이라고 했던 것이다.
아마겟돈 때 적그리스도는 자기들의 추종자들을 그분께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기성교단(바다)과 재림주(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서
전력투구하나 결국 멸망받게 된다는 기록이다.
이와 같이 큰 환난이란 재림주께서 권능을 받고 그 권능을 발휘하여
적그리스도에게 그동안 사로잡혀 있던 자기백성을 친히 찾아오실 때
치열한 영적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때를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더 이상 백성들 위에 군림할 수 없게 되고, 그의 낚시밥으로
물려 있던 백성들은 능력의 예수님께 돌아와 상처를 씻고 구원의 궁전으로
들어가느냐 못들어가느냐의 기로에 있고, 예수님은 마침내 권능의 철장으로
만국을 치는 결정적인 때가 곧 큰 환난의 때가 된다.
이러한 큰 환난(아마겟돈)의 때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적그리스도가 주의 백성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최후 발악의 때가 된다.
그에 대해 단8:13,14에서
"... 이상에 나타난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2천 3백주야 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라고 했다. 성소는 건물성소가 아니라 사람성소를 뜻한다.
따라서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백성들이 마침내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아서 아마겟돈의 사령관이신 재림주께 돌아와 영생을
받게 됨을 뜻한다. 진리전쟁이 되는 아마겟돈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아서
그 상급으로 영생받는 일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성소가 정결함을 받는 일이 된다.
아마겟돈 기간 2천 3백주야는 6년 5개월쯤 된다. 이렇게 짧은 기간이므로
예수께서는 마24"21,22에서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을 감하시리라"
라고 하셨다. 큰 환난이 겨우 2300 주야 밖에 안되기 때문에
택한자들의 육체의 구원을 위하여 그날을 감하시리라고 한 것이다.
2300 주야 동안에 벌어지는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이야말로 큰 환난인 것이다
결코 일곱 때가 큰 환난이 아니다. 최후로 짓밟히며 최후로 빼내심을 받아
성소가 정결함을 받는 다니엘서의 2300주야가 큰 환난인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추측컨데 창세기 41장에서 바로의 꿈에 나오는 살진 일곱 암소와
그 후에 다시 파리한 일곱 암소, 그리고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그 후에 다시 세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놓고
사람들은 무작정 "7년 환난" 이라고 말하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바로의 꿈에 나오는 그 같은 일곱의 숫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때가 있겠지만, 그것은 7년 환난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전무후무한 환난날을 말함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로의 꿈에 나오는 살진 일곱이 파리한 일곱에게 잡아먹힘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선 결론적으로 간단히 말한다면
처음의 살찐 일곱은
그동안 복음전파의 전셋때 반과 그 후 적그리스도로부터 사로잡히는
후 셋때 반, 합 일곱때를 말하는데, 그 일곱 때 동안은 누구라도 성경을
자의적 해석으로 마음대로 요리해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때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살진 일곱으로 말한 것이다.
나중의 파리한 일곱은
처음의 살진 일곱이 갖고 있는 배부름이 사그리 무너짐을 당한다는 뜻에서
나중의 파리한 일곱일 뿐이다. 즉 사실적 일곱수를 말함이 아니고
처음의 배부름의 일곱을 나중의 배고픔의 파리한 일곱으로 대응한 것 뿐이다.
왜 나중은 배고픔이 오는가?
전셋때 반과 후셋때 반, 합 일곱때 만에(비진리로 배불러 있는 기간이 일곱때임)
예수님은 진리의 새말씀으로 우리를 구하러 다시 오시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성경을 명명백백히 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때부턴
아무라도 예전의 일곱 때처럼 자의적 해석으로 요리저리 요리해서 배불리 먹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자들은 불법자들로 낙인 찍히고 사정없이 재림예수님이 휘두르시는
말씀의 철장권세에 의해 불법자들로 내침을 당하기 때문에 배고픔이 오는 것을 뜻했다.
원문카페:https://cafe.daum.net/kkysn2
첫댓글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남고, 멋진 말은 귀에 남지만
따뜻한 배려는 가슴에 남는다고 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사랑 나누며 즐겁고 행복한 날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