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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runsema, defence.co.kr)
2004/12/30 (15:49)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10
Access : 1447 , Lines : 156
수 · 당의 군사제도및 부병제에 대한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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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 혹은 민족의 국력을 가늠하는 수단은 여러가지가 있다. 현대에는 경제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고대에는 군사력 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군대의 집중과 필요한 지점 혹은 장소에 대한 투입능력이 중요한 척도가 될수 있다고 볼수 있다.
물론 현대에도 군사력이 그 나라의 국력을 잴수 있는 중요한 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서양의 고대 군사부문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진행된 것과는 반대로 고대 동양의 군사부분에 대한 연구는 미비한 자료로 인해서 서양에 비해서 미진한 부분이 적지 않다.
서양 특히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가 상당부분 진행된 것은 당연히 그 시대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풍부하고도 면밀한 자료가 밑바탕이 되었다면 고대 동양 – 중국을 중심으로 한 – 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간략한 기록과 전쟁의 승패를 단지 지휘관의 도덕성과 자만심으로만 볼려는 시각과 그에 따른 영향으로 사서에 단지 양측의 투입병력과 승패만을 기록함으로 인해서 전쟁의 본질적 혹은 심층적인 연구를 하는데 결정적인 문제점을 제공하였다.
고구려의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는 거의 걸음마 단계라고 볼수 있겠다. 그나마 활발한 고구려 후기의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는 후기에 보여지는 몇 가지 무관직을 중심으로 한 연구 및 지방 행정체제와 일체화 된 것으로 판단되는 지방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에 그치고 있다.
여기에서는 동양의 군사제도 중 그 실체가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당나라의 군사제도 특히 군의 징집 및 지휘체계에 대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당은 중국에서 탄생된 토착 정권중 대외 정복전쟁을 가장 활발하게 진행시켰던 왕조였었다.
그 근간에는 당태종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었지만 몇 차례의 크나큰 패배를 극복한 이면에는 부병제를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병력 징집 체제가 존재했었다.
또한 당나라의 각종 군사제도는 바로 직전에 존재했던 수나라에게의 강한 연결성을 지니고 있었고, 북주에서 시작되어서 수나라를 거쳐서 완성된 당나라의 군사제도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로 동양에서는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군사제도로 인식되었다.
측천무후 시대를 지나 8세기 중반 현종시대에 실질적으로 부병제가 붕괴된 이후에도 당의 지배층은 부병제의 존속을 위해 확기제와 같은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했었다.
당나라의 군사제도는 다른 여러가지 제도 및 문화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국과 일본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같은 시기 고구려의 군사제도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수 있다.
부병제의 시작
황하 이북의 지배자였던 북위는 유목민족으로서 선비족 탁발부가 중심이 된 국가였었다. 북위는 화북을 통일한 이후 효문제(재위 471 ~ 499)시대 때 수도를 북쪽의 평성(현재의 산서성 대동시)에서 남쪽의 황하 남안에 있는 낙양(하남성)으로 옮기고 급진적인 한화(漢化)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한화정책의 원래 목적은 다수의 한족을 포용함으로서 정권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 였지만 급진적인 한화정책은 일부 선비족의 강한 불만을 사게 되었고, 결국 524년 옛 도읍인 평성 북쪽에 있는 옥야진(沃野鎭)에서 파육한발릉(破六汗拔陵)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급속히 세력을 확대한 반란군 때문에 북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동쪽의 업(현재의 하남시 임장현)에 기반을 둔 고환(496 ~ 547)과 서쪽의 장안(섬서성 서안시)에 근거지를 둔 우문태(505 ~ 556)가 북위를 양분하여 각각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
이중 서위의 우문태 정권의 기반이 된 것은 무천진(현재의 내몽고 자치구 무천현)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선비계 집단으로 이들은 관중지방의 토착 호족의 협력으로 국가를 확립하고 유지할수 있었다.
서위는 동위에 비해서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한인들을 징집해야 했고, 8주국 12대장군제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의동부(儀同府)를 두어 한인들을 징집하였다. 이 96개의 의동부가 후에 수당 시대의 부병제의 근원이라고 할수 있겠다.
580년 5월 북주의 선제가 사망한 이후 즉위한 정제때 양견은 승상의 자리에 오르며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양견이 북주의 실권을 장악하는데에는 아버지였던 대장군 양충때부터 이어져온 무력이 밑바탕이 되었고 그에게 반대하는 몇 차례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다음해인 581년 2월 선제에게서 양위를 받고 새로운 왕조인 수(隨)를 연다.
관롱(關籠 : 섬서성과 감숙성을 가리키며 여기서 얘기하는 관롱은 이 지역에 근거를 둔 선비족과 토착 지배층을 가리킨다)집단이라는 북주, 서위시대 이래의 지배집단을 정치적인 기반으로 유교를 정치적인 지배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수왕조가 등장한 첫 해 새로이 제정된 개황률(률은 형법법규를 지칭한다)을 근간으로 하는 통치제도의 기초를 만들었는데 이때 함께 제정된 것으로 추정되는 개황령(령이란 행정법규를 가리키는 것으로 율과 령을 함께 묶어서 율령이라고 부르며 이 율령제의 실시를 중앙집권화의 성공 즉 고대국가의 완전한 성립을 보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이 개황령에서 중요한 부분은 정치적으로는 고대중국 및 그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국가의 보편적인 정치제도인 3성 6부제도가 시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상세한 부분은 남아있지 않지만 균전제, 조용조제 그리고 부병제와 같은 일반 백성들을 통치할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이때 완성되었다는 점을 들수있겠다. 이 시대에 등장한 정치제도는 곧이어 등장한 당나라도 명칭의 변화를 제외한 본질적인 부분은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학자들은 보고있다.
588년 10월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태자 광(후에 수양제)과 양소가 지휘하는 51만 8천명의 수나라 군대는 양자강을 건너 남조인 진의 수도였던 건업(현재의 강소성 남경)으로 진격한다.
별다른 저항없이 건업을 점령하고 진의 황제를 생포함으로써 589년 개황 9년 마침내 신흥제국 수는 위,촉,오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이래 350여년에 걸친 분열을 마감하고 통일제국을 탄생시켰다.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남북조의 분열을 기반으로 한 다원화된 중심축 중 하나로 동아시아의 중심국이었던 고구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6세기 중반이후 귀족들의 세력다툼으로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았기고 함경도 지역까지 신라의 세력이 잠식되는 상태였었던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귀족들의 분쟁이 중단되고 귀족들의 세력균형을 기반으로 하는 귀족연립정권이 탄생되었고, 이 연립정권은 642년 연개소문의 유혈정변의 배경과 고구려의 멸망에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604년 병이 악화되었던 수문제는 당시 태자였던 태왕 광에게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이어 즉위한 태왕 광은 후일 수양제로 불리워졌다.
수나라의 부병제와 군사력
수나라에서 본격적인 호구조사가 시작된 것은 583년이었다. 그 동안 정치적인 혼란기가 지속됨으로서 호적에서 누락되었던 호구를 철저히 조사해서 등재하였고, 그 결과 당시 40만명에 불과했던 장정이 2백만명까지 증가하였다.
또한 호구의 증가에 따른 조세수입과 요역의 수취도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 호적에 등재된 호구수도 수문제 초기의 4백만호에서 남조인 진을 멸망시키고 진의 호구였던 6십여만 호를 흡수함으로서 약 4백6십만호에 이르게 되었다.
급격히 증가된 호구는 막대한 국가세입의 창출로 이어졌고, 수는 급격한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통일 직후인 590년 수는 부병제를 실시하였고, 막대한 세입과 장정의 수는 군사제도의 정비와 확립으로 이어져갔다.
지방행정기구인 주 ·현에 소속된 병적을 바탕으로 군인이 될 장정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완성시켰고, 군인을 징집하는것에 따른 보상을 지급함으로서 안정적으로 병력을 확보할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이전에 존재했던 군부를 정리해서 표기 장군부(607년에 응양부로 개편)를 두어 지휘권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군사기구 특히 지방군사기구의 단일화와 함께 지방군의 관할권을 주현의 행정체계와 분리해서 중앙의 군령기관으로 집중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 방식은 후일 당나라에서도 절충부라는 명칭으로 계속 이어져 갔다.
이 시기 이후부터 징집된 장정은 부병 즉 중앙의 군령기관의 관할하에 있는 응양부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어갔다.
수나라는 604년 양제의 즉위 이후 전국의 응양부병을 12위에 지휘하에 두게 하고 각 위에는 대장군 1명과 장군 2명씩을 두어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12위의 명칭은 다음과 같으며 지휘관은 원칙적으로는 대장군 1명과 장군 2명씩을 두게 되어있다.
좌익위,우익위,좌효기위,우효기위,좌무위,우무위,좌둔위.우둔위,좌어위,우어위,좌후위,우후위
그리고 12위에 나누어서 소속된 응양부병들을 형성하는 각 지방의 응양부에는 기병을 지휘하는 월기교위와 보병을 지휘하는 보병교위가 각각 2명씩 배치되어 이들이 각기 해당병종을 통솔하였다.
부병제의 형태와 임무
수(후술하겠지만 당나라의 부병제 역시 수나라와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나라는 정리된 호적을 바탕으로 20세부터 60세까지의 장정을 응양부병으로 편성하였다.
편성된 응양부병들은 개인마다 각각 17결(結)씩의 토지를 국가에게서 지급받았고 농번기인 봄, 여름, 가을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농한기인 겨울철에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응양부병들에게 주어진 주요한 의무는1년에 1개월 내지는 2개월씩 교대로 상경하여 도읍의 경비를 담당하는 이른바 상경입번(上京入番)이 대표적이었다. 도읍에 올라온 응양부병들은 위사(衛士)라고 불리워졌으며 그때 사용되는 무기와 식량등은 각자가 부담하게 되어있었으며 국가는 그에 대한 대가로 응양부병들에게 분배된 토지에 대한 면세혜택을 주었다.
또한 병역의 시작연령인 20세부터 끝나는 시기인 60세까지 1회의 국경지방의 요충지에 설치된 진(鎭)과 수(守)에서 3년동안을 보내야 하는 의무도 같이 부과되었다.
물론 유사시에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전과 대외원정에도 종군하였다. 이 때에는 이미 편성된 응양부병 외에 추가로 모집한 병력을 편성하여 추가하여 행군(行軍)이라는 부대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편성된 군대의 총 지휘관은 행군원수(行軍元帥)라고 호칭되었으며 그 규모는 일정하지 않았다.
출전부대가 다수일 경우에는 임명된 행군원수중 1명의 선임지휘관이 절도(節度)가 되어서 다른 행군원수들을 통괄 지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출동하는 행군원수의 휘하에는 행군총관이 휘하의 단위부대를 지휘하였다.
행군총관이 지휘하는 부대의 규모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통상적으로는 약 6천명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병력 규모의 변동과는 상관없이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2 : 1로 편성되었다.
행군총관의 휘하의 하급부대로는 천명이 편제되어 있는 단(團)이 있어서 단장(團長)이 지휘를 맡았고, 그 밑에는 백명으로 편성되어 있는 10개의 대(隊)가 있어서 대정(隊正)의 지휘를 받았다.
수나라는 그 짧은 존속기간에 비해서 적지않은 성과를 남겨놓았다. 대표적인게 중국을 경제적으로 통일시켰다는 평을 받은 대운하의 개통이었다.
수 양제는 605년 백만명의 인원을 동원해 수문제가 개통시킨 광통거에 이어 두번째 운하인 통제거를 개통시키고 이어서 608년에는 탁군(북경)까지 연결된 영제거를 개통시켰다. 특히 탁군까지 연결된 영제거는 북방민족 특히 고구려 원정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학자들의 대략적인 판단이다.
수나라의 급속한 대외원정과 국력신장의 원인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당시 주위 국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광대한 인력동원 능력이었다. 이것은 물론 보유한 인구라는 자연적인 조건외에도 이 인력을 효율적으로 편제해서 투입할수 있는 능력도 포함하고 있다.
대운하의 개통은 참여민중에게 적지않은 고통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도읍의 경제적인 안정외에도 원활한 물자의 유통을 통한 상업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게 한다.
이러한 경제적인 안정은 황제권의 안정과 중앙집권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충분한 훈련과 장비를 보유한 부병집단을 보유함으로 인해서 방어일변도 였던 대외정책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590년 부병제의 도입시기에는 4백6여십만호로 확인되었던 호구수도 불과 십몇년이 지난 양제의 즉위 초기에는 8백9십여만 호로 급증하였다.
물론 자연증가적인 호구외에도 그 동안 파악되지 않았던 호구들이 수나라의 행정지배력 아래로 포함되는 것을 의미하면 이 8백9십여만 호의 호구수는 후일 당 현종시기에 9백만호를 돌파하기 까지 수당대의 최대호구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밑바탕으로 해서 수양제는 신무기의 개발과 대규모 훈련을 실시함으로 그 성과를 가시화시키고 608년 부터는 북방민족인 토욕혼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개시함으로서 그 동안 쌓아온 군사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토욕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실전경험은 무기의 개량과 전술상의 문제점을 보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수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던 돌궐을 정복하는 밑바탕이 된다.
중국의 전통적인 이민족 통치정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에 휘말린 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고, 수의 급속한 몰락으로 인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전 까지 돌궐은 계속 수의 지배하에 있었다.
편견과 신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편견중에 하나가 고구려를 공격한 수양제의 백만대군이 오합지졸이었다는 것이다.
전투 능력도 전투 의지도 부족한 병사들과 무능한 지휘관과 광기에 사로잡힌 황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나라 군대의 이미지였지만 실상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고 볼수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수나라는 590년부터 실시한 부병제를 밑바탕으로 충분한 장비를 갖춘 수십만의 부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지휘관들은 수나라의 남조 정벌과 이어진 토욕혼과 돌궐정복전에 참가해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추었고, 육합성과 같은 조립식 성을 만들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수나라 군대가 패퇴한 결정적인 원인은 수나라 군대의 능력부족이나 실전 경험부족이 아니라 전체적인 전략의 부재와 보급선의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무리한 속전속결 전술의 실패, 그리고 내호아의 수군의 독단적이고 무리한 공격 때문이었다.
여기에 만약 이라는 가정을 삽입해보면 재미있는 결과들이 나올수 있다.
“만약 내호아군이 우문술의 군대와 합류하는데 성공했다면?…”
“만약 수양제 혹은 우문술이나 우중문이 보급선의 확보에 좀더 신경을 썼더라면?…”
전쟁에서는 “행운”도 일종의 “실력이나 능력”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믿고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완전한 해결에도 실패했지만 적어도 외부의 침략 앞에서는 하나로 뭉쳐서 결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구려의 인구가 얼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5백만이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국가에 병참과 보급능력, 실전경험과 우수한 장비를 갖춘 백만명이 넘는 대군이 공격해 왔고, 비록 도읍이 함락될 위기까지 처하기는 했지만 고구려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중국인들이 만든 역사서에는 오직 영양왕과 을지문덕, 그리고 건무의 이름밖에는 없지만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압도적인 적과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퇴각하는 우군을 엄호하기 위해 벌떼처럼 요하를 건너오는 수군의 대오에 덤벼든 나이어른 병사들도 있었을 것이고, 화살과 돌이 하늘을 가득 메우는 그 순간에도 성가퀴 밖으로 몸을 내밀어서 창으로 적을 찔렀던 늙은 병사도 존재했을 것이다.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격파했던 살수에서도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사투를 벌였던 중장보병이나 손가락이 끊어질 정도로 화살을 쏘아대던 궁수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병사들을 제 자리 아니 필요한 자리에 있게 하고 이들에게 자신의 임무가 무엇이고 왜 싸워야 하는지 똑똑히 알려줄수 있고, 이들이 자신의 임무를 다할수 있을 때까지 혹은 죽을때까지 싸울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어주는 것이 진정한 힘이자 군사적인 역량이라고 보고있다.
비도(승우) 좋은글 잘읽었습니다^^전투의지와 행동신념을 병사개개인이 이해하고 실천하는군대와 그렇치못한군대의 차이는 동서고금을막론하고 정말크죠.전승요소중의 무형적요소의 중요함이 새삼떠오르는군요^^ 2004-12-30 16:53:01
218.153.90.156
서봉덕 당이 수의 부병제를 이어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이 전쟁에 능한 주변 이민족을 잘 부렸던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차이라고 봅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대당전쟁과정을 보면 당군은 한인부대보다도 오히려 말갈인, 돌궐인 부대의 비중이 막강하죠. 고구려인 고선지 장군이 2004-12-30 17:43:32
61.79.96.229
당의 서역정 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거나 백제 출신의 흑치상치가 대돌궐전에서 역시 빛나는 전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의 번장제도 운용이란느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후기 당에는 터어키계 유목민족 출신의 무장들과 병사들이 제국의 간성이 될 정도입니다. 2004-12-30 17:46:15
61.79.96.229
당시의 기록 을 보면 이런 이민족 출신의 군인에 비하면 한인들은 거의 겁쟁이로 매도되는 실정입니다. 오대 중 하나인 후당태조 이극용은 터어키계 사타족이죠. 2004-12-30 17:48:28
61.79.96.229
블레이드 다양한 이민족의 활용이 바로 당을 세계제국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합니다..다만 이런 이민족의 활용이 당이 사해평등주의를 가지고 있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한 분이 상당히 존재했습니다. 2004-12-30 22:44:09
61.37.145.37
블레이드 즉 지속적인 대외팽창과 잦은 대외원정으로 인해서 부병들과 그때 그때 모병한 병사들로는 감당할수가 없었고, 따라서 이민족들을 활용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면서 이들을 지휘할수 있는 이민족 출신의 무장들을 기용했습니다. 2004-12-30 22:45:35
61.37.145.37
블레이드 제국 후기에 위구르족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결국 이들에 의해 당이 멸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안사의 난과 뒤 이은 황소의 난 때 이들의 힘을 빌려야만 할 정도로 당이 쇠약해져 버린것도 하나의 원인입니다. 2004-12-30 22:46:57
61.37.145.37
블레이드 (runsema, defence.co.kr)
2004/12/31 (19:30) powered by DEFENCE KOREA Article Number : 11414
Access : 1409 , Lines : 205
수 · 당의 군사제도및 부병제에 대한 잡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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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멸망과 당의 등장
612년과 613년, 그리고 614년 수의 거듭된 고구려원정의 실패는 막대한 인명과 물자의 소모 외에 수황제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태원유수였던 이 연은 동돌궐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난 이후 617년 11월 9일 장안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장안을 점령한 이 연은 수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제위에 올려서 공제라고 칭하고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만들지만 어디까지나 양 견(수문제)이 북주의 정제에게 실권을 넘겨받아서 수나라 창업의 기초를 마련한 것 처럼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실제로 약 반년 후인 618년 5월 20일 이 연은 공제로부터 제위를 넘겨받은 후 당을 건국한다. 하지만 이 시기는 물론 약 10여년 후까지 당은 아직 장안 일대를 점령한 군벌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626년 6월 4일 장안성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진왕 이세민과 그의 처남인 장손무기등은 그 유명한 현무문의 정변을 일으켜서 형인 태자 건성과 동생이었던 제왕 원길을 살해하고 아버지였던 당 고조 이 연을 핍박해서 제위를 넘겨받는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군주는 이렇게 형과 동생을 죽이고 손에 피를 묻힌채 아버지를 협박하면서 탄생하게 되었다. 아마 당 고조 이 연이 제위를 넘겨주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 역시 아들에게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세민이 제위에 오른지 2년만인 628년 삭방(섬서성 북부)의 양사도를 진압한 것을 끝으로 당은 중국은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630년에 풍년이 들기 전까지는 계속된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물가상승으로 인해서 적지 않은 혼란이 계속되었다.
630년은 당에게 대내적인 안정외에도 돌궐의 복속이라는 또 하나의 정치적인 선물이 주어진 해였다. 당 태종은 항복한 돌궐의 일릭 카간으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또 628년에는 영류왕(재위 618 ~ 642)의 즉위 이후 당나라에 대한 유화정책을 실시하던 고구려에서 봉역도라는 지도를 바쳤다.
우리들이 역사책에서 볼수 있는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정관의 치”의 시작이었다.
만들어진 환상..믿고 싶은 이야기
과연 이 시기 당나라의 백성들은 과연 자부심을 가지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정말 당시의 기록대로 벼 한말이 비단 한 필 값까지 올랐던 것이 4~5전 정도로 하락해서 굶주리는 자가 없고 도망친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었을까?
1년간 전국의 사형수가 불과 29명에 불과했고 집은 문단속을 할 필요가 없었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가 도래했을까?
632년 문무백관들이 태종에게 봉선(封禪)의식을 치르도록 요청하였다. 봉선이란 천자가 천하의 안정과 번영을 하늘에게 감사하기 위해 올리는 제사였다.
이 봉선의식의 진행에 대해서 당시의 유력한 신하였던 위징은 강력하게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폐하는 여섯 가지의 훌룡한 점이 있습니다만 수말대란의 뒤를 이어 호구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곡물창고는 텅텅 비었습니다. 그런데 봉선을 위한 행차와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은 백성들이 감당할수 없습니다. 지금 낙양에서부터 바다에 이르기 까지 연기는 드물고 잡초만 무성합니다. 자치통감 194권 中 –
물론 위징의 이 발언은 봉선의식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과장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관의 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수 있으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한 왜곡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수 있다.
이 시기의 사서 특히 당 태종의 대 고구려 전쟁기록은 그대로 믿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나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 까지 감안하면 이 시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처럼 당나라의 거의 모든 백성들이 행복한 시기로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
결국 당 태종의 치적 중에 남는 부분은 실패한 고구려 원정을 제외하고 주변 유목민족들을 제압한 것이지만 이 역시 불완전하고 허술하였다.
첫댓글 디코에서 토론되었던 내용이군요. 원저작자에게는 양해는 얻으시고 가져오신건지. 그쪽사람들이 이런거에 민감해서 가져오기 쉽지 않으셨을텐데.
디코... 아직도 존재하는군요. 유료화(?) 된 후로는 뜸해지다가 안간지가 몇년 됐네요.
그런쪽 사이트가 극우쪽으로 변질한지 오래되서 예전처럼 자주 가지 않지만. 자기들이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과 똑같은짓 하는거 보니 별로 가고 싶지가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