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사이에 / 김형영
눈 덮인 산중
늙은 감나무
지는 노을 움켜서
허공에 내어건
홍시 하나
쭈그렁밤탱이가 되어
이제 더는
매달릴 힘조차 없어
눈송이 하나에도
흔들리고 있는
홍시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외롭게 매달린 예수처럼
바람으로 바람을 견디며
추위로 추위 견디며
먼 세상 꿈꾸고 있네
ㅡ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문학과지성사, 2021)
* 김형영(金炯榮) 시인
1944년 전북 부안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6년 『문학춘추』 등단, 1967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수상
시집 『침묵의 무늬』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다른 하늘이 열릴 때』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새벽달처럼』 『홀로 울게 하소서』, 『낮은 수평선』, 『나무 안에서』, 『땅을 여는 꽃들』, 『화살시편』
시선집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2021년 2월 15일 77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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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아름답고 슬픈 계절이다. 우리는 눈이 내리는 것처럼 서서히 슬퍼지고 성에가 서리는 것처럼 무겁게 흐려진다. 아름답게 슬프기로는, 혹은 슬프게 아름답기로는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겨울을 사랑하고 겨울도 시인을 사랑한다. 가난한 계절이지만 겨울시만은 풍성하다. 그중에서도 이 시는 서둘러 읽어야 할 겨울 초엽의 시다.
시 앞부분은 생명 탄생을 담고 있다. 감나무는 붉은 노을을 그러모아 홍시로 뱉어냈다. 무슨 말일까. 노을은 거대한 피의 주머니, 감나무는 그 생명력의 감응, 마지막으로 홍시는 생명의 표현이다.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이 바로 각각의 홍시 한 알인 셈이다. 우리의 붉은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인은 점점 우리의 인생을 클로즈업해 간다. 홍시는 어떻게 살고 있나. 홍시는 ‘견딤’으로써 살고 있다. 우리네 삶은 홍시보다 더 즐거운 것이라 생각하고 싶은데 읽다 보면 뜨끔하다. 홍시는 아주 작은 일에 나약하게 흔들린다. 바람과 추위를 피하기보다는 그저 견뎌내야 한다. 이런 구절을 읽고 나니 홍시의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결국에는 홍시가 점점 가엾게 느껴져 응원마저 해주고 싶다.
삶이 ‘즐김’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많은 소셜미디어의 문법이다. 그곳에 ‘견딤’의 오늘은 없다. 그래서일까. 잘 즐겼다는 실제 사진들보다 저 홍시 한 알이 더 현실에 가까워 보인다. 세상 곳곳의 홍시들은 오늘도 잘 견디었을까.
- 나민애 시인, 시가 깃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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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눈 덮인 깊은 산중에 늙은 감나무 하나. 그 높은 가지 끝에 매달려 흔들리는 홍시 하나. 그 홍시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 비유한 시인의 눈이 경이롭다. 김형영 시인의 시에서는 이런 놀라운 영성의 숨소리가 들린다. 나는 예수에게도 배반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늘 위안을 받는다. 예수의 손에도 못 자국이 나기 전에 노동으로 굳어진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는 사실도 나에게는 큰 교훈이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통하여 애써 가르친 사랑과 용서에 대해서는 늘 고민이 많다. 죄는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신의 몫인가.
-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