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7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주님을 구합니다.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한 없이 어리석고 부족하며 연약한 인생이오니 이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한 심정으로 주께 간구하오니 상 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허락하시어 비천한 이 종을 긍휼히 여기사 오늘도 주의 나라로 인도하옵소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나 육으로 오신 주의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 주의 영과 늘 함께 하시오니 주의 영 안에서 육이신 말씀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나의 심령은 가난할지라도 주의 말씀으로 부요한 자 되기를 원하나이다.
심령은 가난하고 말씀으로 배가 불러서 나의 영이 총명하여 주님의 뜻을 밝히 아는 반짝반짝 빛나는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
나는 어린 아이와 같나이다.
생각하는 것이 죄요 행하는 것이 죄뿐이오니 연약한 이 죄인을 주의 보혈로 덮어 정결케 하시고 나는 부족하오나 주의 정결한 신부로 주의 안게 거하게 하소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조명하사 주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단 맛을 오늘도 느끼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마 14:13-21
제목 :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의 생명의 떡을 먹고 다시 태어나다.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음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표적으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가 오천 명을 먹인 실로 놀라운 사건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상은 물론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대제사장들이야 먹고 사는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 외 일반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삶이 피폐해서 하루 한 끼 먹기가 힘든 삶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러 수많은 사람들이 벳새다(눅 9장) 들녘으로 왔다.
모인 그들에게 말씀도 전하시고 병자들도 고쳐주시는데 어느덧 시간이 저녁이 다 되어버렸다.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이르기를 이곳은 빈들이기 때문에 먹을 것도 없으니 마을로 보내서 먹을 것을 각자 사 먹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제자 중 한 명이 우리에게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며 난처해 한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사람들을 잔디 위에 앉도록 하신다.
사람들이 다 앉자, 주님께서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신다.
(19-20절)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이 19-20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제자들을 모아놓고 성만찬을 하실 때 하신 내용과 똑같다.
(막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이를 보면 벳새다 들녘에서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저 단순히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표적 중의 표적이요 생명의 역사이다.
어떤 이들은 이처럼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며 귀신들린 사람들의 귀신을 쫓아내주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본질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못 알아도 한참 잘 못 아는 것이다.
물론 연약한 이들을 육신적으로 돕고 돌봐주는 일이야 아무리 많이 한다해도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되 잘못 믿게 되며 결국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 섬기게 되는 결과를 자아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곧 창세전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그 아들에게 주셨다(요 5:26).
그리고 창세전에 그 생명을 우리에게도 주시마고 약속하셨다(딛 1:2).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그와 함께 주의 말씀으로 교제하면서 아직 아들의 생명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아들과 같이 함께 지내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품에서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작정하신 일이 또 한 가지가 있다(벧전 1:20).
그것은 아직 아담과 같이 아들의 생명을 얻지 못한 이들에게 아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유일하신 독생자요 인자이신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 태어난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 자가 영생 곧 아들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범죄하고 말았다.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의 궤계가 있었다.
그로 인하여 아담은 결국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에덴동산 나무 사이로 가서 숨어버렸다.
그가 숨는다고 어디 숨어지는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아담을 하나님은 친히 찾아가신다.
그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담에게 찾아가셔서 그가 잘못한 죄에 대하여는 징계하시고 다시 그에게 복음을 주셔서 결국 아들의 생명으로 살 수 있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창 3:15절과 21절의 내용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두 말씀은 원시복음이라고도 하는데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때가 되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다(갈 4:4).
그리하여 원수 마귀에 붙잡혀 죽게 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믿는 믿음이란 곧 그들이 입었던 무화과옷을 벗고 가죽옷 곧 그리스도 보혈의 옷을 입도록 하신다.
그래야만 나의 더럽고 부정한 옷은 찢어 벗겨내시고 의의 옷 구원의 옷을 입혀주셔서 우리 주님의 신부로 삼아주시는 것이다.
(사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사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이는 언간생심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죄에 빠져 영 죽을 인생, 헛것 같고 안개와 같이 있다가 금세 스러지며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이 존재감이 없는 나요, 또한 더럽고 부정한 옷을 입되 잎사귀와 같이 시들어 죄악의 바람에 불려 날아가버릴 존재인 내가, 거룩한 구원의 옷이요 공의의 겉옷을 입혀 주시고 각종 보석으로 단장을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옆에 정결한 신부로 서게 해주심이 과연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기인가?
그런데 이게 말이 된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나의 행위의 있고 없음이 아니라 그런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아들을 보내셔서 가죽옷을 입혀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 앞에 그저 목 놓아 울게 된다.
죄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육신으로 보내셔서 죄악덩어리로 삼으시고 대신 그 죄를 우리에게서 제하여 주시며 그뿐 아니라 이런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아버지의 자녀로 아들로 삼아주신 것이 어찌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행한 것은 죄밖에 없는데, 그런 나의 죄의 옷 곧 무화과옷을 다 벗겨내시고 거룩한 의의 옷, 구원의 옷인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 곧 가죽옷을 입혀주셔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은혜 앞에서 오열한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죄의 집을 짓고 살다가 결국 그는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들이 집을 나가던 그 순간부터 동구 밖에서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 그 사랑, 그 놀랍고 깊으신 헤아릴 수 없는 은혜는 집에 돌아온 아들만 보일 뿐 그에게서 나는 돼지 똥냄새나 거지꼴 같은 누더기 옷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아버지 품을 떠났다가 누더기를 걸친 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나를 바라보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고도 독보적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나를 아들로 삼아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아버지의 사랑을 내 어찌 또 다시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가슴이 먹먹하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자기 생명을 다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을 아무리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길이 없다.
그저 부족할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내가 바로 그 사랑을 받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덧입고 오늘도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감히 주 앞에 설 수 없는 자임에도 염치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담대함 곧 파레시아 때문입니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습니다.
그러나 그 철판마저도 주님께서 벗겨주시오니 그저 감사와 은혜 그리고 감격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나는 없고 오직 내 안에 주님만이 계십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만이 살기를 원합니다.
나의 심령은 가난하여지고 오직 예수로 부요해지기 원합니다.
헛것 같고 안개와 같으며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이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자이나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는 그 누구보다 존귀한 자녀임을 믿나이다.
나의 믿음을 받아주옵소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그 강청이 곧 나의 강청이오니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던 우리 주님, 또한 부족하고 겨자씨보다 더 작은 믿음일지라도 나의 믿음 또한 받아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