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불이 없으면 정식 있는 중생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집이거나 건물 속이거나 간에 어떤 불빛이든지 불빛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불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한다. 그때 외적으로 부처님의 자비를 찾고 내적으로 지혜의 불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의미를 두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주위의 불은 언제나 이렇게 무지한 인간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는 소임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밝음의 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내 마음속에 들어 있던 진여의 불씨는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때 심지 역할을 해 주는 것이 큰 불인 부처님과의 인연이고 기름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바로 복덕이 된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지면 지혜의 불이 내면에서 일어나 자기의 앞길을 훤히 비추다 보니 삶에 장애로움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생각하나 없이 부처님오신날이라고 해서 절마다 등을 달러 쫓아다닌다면 정말로 돈 잃고 힘 빠지는 결과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다. 절은 등불 없어도 언제나처럼 밝고 부처님은 등불 없어도 제도하실 자들은 잘도 제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는 거실 전등쯤은 되겠네요?"
"내가 보기엔 가족들조차 희미하게 비추는 호롱불 정도밖에 안되는데."
부처님오신날의 진정한 의미를 놓친 헌등이라면 절마다 빠짐없이 등을 달고 심신을 다해 기복을 하여도 공덕이 되지를 않는다. 그런 연등이 초파일 날 수만 개가 아니라 수억만 개가 이 땅 천지에 보기 좋게 달려 장엄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문화행사에 그칠 뿐 진정으로 중생들을 변혁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파일에 등불을 켜는 것을 일회성 이벤트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부처님은 중생이 이 날을 기념하는지 안 하는지 거기에 관심이 없다. 얼마나 장엄하게 등불을 켜는가에도 마음이 없다. 다만 인간들이 이 날을 기해 축제분위기로 법석을 떨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하루를 보내면 사찰과 중생은 등불을 끄고 내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형식으로 내년에 또 맞이하는 초파일, 그냥 가족의 안녕을 위해 등 하나 달랑 다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만족하는 불자라면 평생토록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도 거칠고 극심한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연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소경이 등불을 들고 어두운 길을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눈 뜬 사람이 비웃었다. 앞도 보지 못하면서 등불은 왜 갖고 다니느냐는 것이다. 그 소경은 이렇게 대꾸했다.
"남이 내 등불을 보고 나에게 부딪히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다못해 이 정도쯤이라도 되어야 1년에 한 번 절을 찾아 등불을 밝히는 것이 그나마 공덕이 될 것인데, 초파일이 내 마음을 밝히는 매개의 날이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게송으로 읊어 주겠다.
身心把定元無動 默坐茅庵絶往來 寂寂寥寥無一事 但看心佛自歸依
몸과 마음을 잘 붙들어 매어 놓고 보면 원래부터 요동함이 없었던 것. 풀로 엮은 초암에 묵묵히 앉아 부산스러움의 왕래를 끊을지어다. 고요하고 또 고요하게, 조용하고 또 조용하게 아무런 요동이 없으면 자연히 마음속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거기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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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_❤_
나무아미타불 _()()()_
성불 하소서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