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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요한 20, 19 - 31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면서 동시에 자비 주일입니다.
자비 주일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파우스티나 성녀를 시성하시면서,
2001년 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오고 있습니다.
파우스티나 수녀님은 1905년에 태어나, 딱 33년 사시고 1938년에 돌아가셨죠.
폴란드의 아주 지지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대요.
그냥 어릴 때는 죽어라 일만 했나 봐요.
그런데 10대 중반부터 하느님의 계시 같은 것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자비의 성모 수녀회’에 입회합니다.
수녀원에 들어가서도 계속 환시를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직접 이야기를 듣습니다.
1931년 3월 22일, 예수님은 파우스티나 수녀님께
‘지금 네 앞에 나타난 이 모양대로 그림을 그려 상본을 만들어 모든 신자에게 나누어 주고,
오후 3시에 자비의 기도를 바쳐라.’ 하십니다.
그 모습이 우리 성당 뒤의 벽에 있는 자비의 예수님 성화입니다.
예수님이 그 수녀님께 나타나실 때, 한 손은 마치 사제가 강복하듯이 들고,
한 손은 가슴에 대고 그 심장에서 두 개의 빛이 뻗어 나왔다 해요.
붉은색과 약간 푸른색, 바로 교회와 성사를 나타냅니다.
수녀님은 당신이 본 환시 메시지로 일기를 계속 썼고(출간됨), 요한 바오로 2세는
수녀님을 성녀로 선포하시면서 지금 시대야말로 어느 때보다 자비가 필요한 시대라고 하십니다.
파우스티나 수녀님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보여준 그 자비의 핵심은,
첫째 ‘믿음이 있어야 자비를 베푼다.’ 둘째 ‘믿음만 가지면 안 된다.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죄인이라도 하느님은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에게 받은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수녀님은 그림을 잘 못 그렸죠. 그래서 본 것을 영적 지도신부님께 말씀드리니,
화가를 소개해주시고 자비의 예수님이 그려지게 됩니다.
그 원본은 지금 폴란드에 있는 자비의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당에 있는 그림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겁니다.
우리 성당의 성화는 3년 전 어느 화가가 가지고 와서, 이 성당에 모시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커서 어디 모실 곳이 마땅하지 않아 1년 동안은 한쪽에 세워 두었지요.
한때는 도로 가져가라고까지 했었어요. 그
러다가 어느 날 기도하는데 갑자기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자비의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왔는데, 내가 자비의 예수님의 내쫓다니!,’
그리고 지금 저 자리에 모신 겁니다.
저는 2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우리 서운동 신자들, 또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비 가득한 사람으로 변하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자비를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실천하게 해주십시오.’
그 기도에 대한 큰 결실이 지난번 아프리카 돕기, 또 주변의 불우이웃 돕기!
정말 자비를 생각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겼고, 서운동 신자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신자가 같이 호흡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주변의 어려운 분들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역사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자비의 예수님이 이 사제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결실을 보여주시는구나.
자비 주일인 오늘은 우리 각자가 내 주변에 얼마나 자비를 베풀고 있는가 생각하는 날입니다.
지금 이 독서대 앞에 성인 유해가 12분이 계시는데,
지금 스티커 찍혀 있는 곳 밑의 분이 바로 성녀 파우스티나 유해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모시고 나왔습니다.
미사 후 앞에서 기도하시면 됩니다.
자비의 예수님에 대한 것을 더 깊이 영적으로 묵상하고 싶으시면,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일기를 읽으십시오.
예수님의 자비가 얼마나 깊은지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자비 주일이기에 강론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부활 8부축제가 지나갑니다.
부활절 그다음 날부터 교회가 말씀을 통해 정말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실제성입니다.
유령이나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살과 피를 가진, 몸에 구멍이 나 있는 인간 예수님 부활의 실제성을 교회는 강조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 나타나시는데,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못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부활 8부축제 동안 요한복음이 많이 나옵니다.
내가 자주 이야기했듯이, 요한복음을 적을 때는 이미 3개의 복음은 세상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70년 후에나 쓰였다 했죠?
다시 말하면 요한 사도는 무려 70년 동안의 묵상 끝에 다른 복음서에는 빠져 있거나, 강조가 덜 되어 있는 것을 적었습니다.
거의 100살이 된 고령의 요한 사도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70년 전 기억 중의 하나가 뭐냐?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는데, 유령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파가 갈려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예수님의 부활은 유령이 아니라 실제 인간 예수님의 부활이다.’라고 확실히 정리합니다.
옛날에는 이웃이 참 가까웠죠?
그래서 이웃집 애들끼리도 잘 놀았고 동네 형들이 동생들도 잘 챙겨주었어요.
어느 날 이웃집 고등학생 형이 초등학교 1학년 앞집 애를 데리고 대공원을 놀러 갔어요.
가서 뛰어다니는 사슴을 세며 놀다가, 고등학교 형이 ‘내가 수학 문제 하나 낼까?’ 했어요.
꼬마가 ‘응, 나 수학 잘해.’
‘그래? 그럼 5 빼기 3은?’ ‘둘!’ ‘ 잘하네, 그럼, 셋 빼기 다섯은?’
동생이 ‘그런 문제가 어디 있어?’ 하니, 형이 ‘응, 있어.’ 했죠.
동생은 못 믿겠다 하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물었죠.
‘엄마, 고등학교 형이 셋에서 다섯을 빼보래. 학교 헛다녔나 봐’하니, 엄마가 웃으면서 네가 몰라서 그렇지 답이 있다 했죠.
아이는 아빠에게 와서도 물었어요.
아빠도 네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답이 있다 하니,
그 꼬마는 ‘흥,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네.’ 하며 자기 방에 들어갔대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지만, 어제 복음은 ‘듣고도 못 믿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눈 보는 것이 정확합니까?
지나가는 사람을 내가 아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쫓아간 적 없나요?
우리 눈조차 사실은 못 믿습니다.
우리 귀로 들리는 것도 얼마나 부족하고 부정확할 때가 많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감각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안 보이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셋 빼기 오’, 분명 답이 있는데 절대 답이 없다고 우기는 꼬마처럼,
예수님 부활의 실제성을 예수님 당시에도 절대 못 믿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요한 사가는 부활의 실제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이 불도 펴주시고’, ‘빵도 떼어 주시고’, ‘물고기 좀 가져와라. 같이 먹자.’ 강조하십니다.
유령은 먹을 수 없는 겁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실제 부활을 못 보게 막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막달라 마리아를 살펴봅시다.
무덤에 가자마자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이 아니죠?
예수님을 찾으러 갔더니 빈 무덤이었어요. 그래서 징징 울기만 했죠.
그때 뒤에서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인 줄도 모르고, 동산지기인 줄 알고 누가 우리 선생님 가져갔는지 아냐고 묻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못 보게 만든 첫 번째는 바로 자기 위주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슬퍼서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대부분 눈물은 자기 한탄일 때가 많습니다.
젊은 새댁이 남편을 잃고 펑펑 웁니다.
죽은 남편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사는가 하는 자기 위주의 눈물이죠.
자기 위주로 흘리는 눈물은 부활한 예수님을 못 보게 만듭니다.
두 번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못 보았던 이유는 방향성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들여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떠나셨는데, 다른 곳을 쳐다봐야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어느 쪽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어두운 쪽, 세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아무리 구덩이에 빠져도 십자가만을 쳐다보고 살아가는가?
우리가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고 얼굴을 돌리는가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고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자신이 부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의 눈을 가린 것은 자기 위주의 눈물과 바라보는 방향이 틀렸던 겁니다.
여러분은 종일 어디를 바라보고 사십니까?
성당에서는 눈을 뜨면 미사 드리고 있는 신부와 그 뒤에 십자가가 보일 겁니다.
이런 물리적인 바라봄이 아니라 영적인 바라봄을 여쭙는 겁니다.
영적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두 번째로 예수님을 보았지만, 예수님을 못 알아본 사람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였습니다.
엠마오까지는 남자 걸음으로 빨라도 3시간이나 되는 먼 길입니다.
그 긴 시간을 예수님이 옆에서 생전의 목소리로 분명히 이야기하셨고, 같은 얼굴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성경에는 눈이 가리어져 못 봤다고 나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3년간 그분의 발치에서 교육을 받고, 그분의 얼굴을 익혔던 제가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볼 수 있을까?
무엇 때문에 눈이 가리어져 있을까?
첫 번째는 절망감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실망감.
두 번째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과의 흔적을 지우고 싶습니다.
그 멀리 엠마오로 가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멀리 가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단 말이죠.
혼자서 가기 뭐하니, 친구 끌고 가는 겁니다.
마지막 그들의 눈을 가렸던 것은 분노였습니다.
정말 기대하던 사람이 기대치를 내 눈앞에서 못 보여줄 때는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자식에 대한 기대가 부모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부모의 기대와 어긋나기 시작하면, 부모의 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절망감과 두려움과 분노 때문에 눈이 가리어졌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에 있는 비늘을 떼어 내기 위해 구약에 예언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죠.
그때 조금 마음이 울컥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그런데 언제 알아본다 했습니까?
같이 밥을 먹으면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주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러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바로 성체성사, 우리가 주님의 몸을 영 할 때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미사 하러 오는 우리 모습과 같습니다.
미사 하러 올 때만 해도 세상 걱정 다 끌어안고 우거지상을 하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복음을 읽고 사제의 입을 통해 해설을 들으면서 가슴에 감동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을 영 할 때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때야 예수님을 완전히 알아보는 겁니다.
성체를 영 할 수 있는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복된 신자들인가 얼마 전 강론에서 말씀드렸죠.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은 온전히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천주교의 심장은 성체성사입니다.
다른 6가지 성사가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빙 둘러 담을 쌓고 있는 겁니다.
신품 성사가 왜 필요합니까? 사제가 되어야만 주님의 몸과 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고백 성사가 왜 필요합니까? 성사 안 보고 대죄 상태에서 성체를 영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절망감과 두려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3시간 동안 주님을 모르고 있다가
주님이 당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조금씩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인데’ ‘누구 닮은 것 같은데’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눈이 떠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빵을 받아먹을 때, 우리로 따지면 성체를 영 할 때 주님을 확실히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죠?
뭉그적거리지 않고,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곧 일어나 30리 길을 다시 돌아가 제자들에게 주님이 부활했다고 알립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안 믿습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오늘 복음 후반에 나오는 토마스입니다.
다른 제자들과 같이 있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이성주의자였기에 먹고 살길을 찾아 다락방을 벗어났던 것입니다.
다락방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교회 밖을 떠나면 우리는 주님을 못 봅니다.
토마스가 다른 곳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다른 제자에게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 자리에는 사도 토마스만 없었습니다.
나중에 돌아오니 제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왜 그러냐 물으니 주님이 왔다 가셨다 합니다.
‘미친 인간들, 주님이 왔다 가셨다니, 내가 그 양반 손등에 있는 못 자국을 눈으로 보고,
그 구멍에 손가락 좀 집어 넣어봐야 믿어.’ 합니다.
며칠 지나서 예수님이 또다시 오십니다.
‘어떻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자, 봐봐, 옆구리도 보여줄까?’
사도 노마는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구차하게 용서를 청하지도 않고 딱 한 마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사실 사도 토마는 확신에 이르기 위한 성실한 의심을 한 겁니다.
그것은 때때로 필요합니다.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리가 필요하고, 교리를 배우다 의심이 들면 해결책을 찾는지 묻든지 해야 합니다.
의심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토마사도는 첫 번째 부활한 다락방에 오셨던 예수님을 못 본 이유는 이성주의 때문입니다.
그리고 합리주의 경향입니다. 또한 사도 토마스는 회의주의자였습니다.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부활한 주님을 못 봅니다.
네 번째로 티베리아스호숫가 제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제자들은 부활한 주님을 못 보았습니다.
그들은 숙명론자로 바뀝니다.
그들은 야훼이레, 주님이 나의 앞길 선하게 예비하실 것이라는 잊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죽었다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 이야기하셨죠.
그런데 이때 이미 제자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우리 앞으로 무엇으로 먹고살지?’ ‘뭐 특별한 것 있어? 어부 해야지.’
그래서 다시 고기 잡으러 나간 겁니다.
다시 말하면 희망론자가 운명론자가 되고 숙명론자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신세타령만 합니다. ‘아이고, 내 팔자. 어쩐지 내가 3년 동안 허송하면서 그 인간 쫓아다녔네.’
우리는 어둠이 닥쳐올 때마다 ‘야훼이레, 주님은 나의 앞길 선하게 예비하심을 믿습니다.’라는
그 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전과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하는 그 상처가 너무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 어찌 부활한 예수님을 볼 수 있으며, 본인 자신이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세 번의 배반을 기워 갚아 주기 위해 세 번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예, 주님, 사랑합니다.’
또 묻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물으시니 베드로는 왜 자꾸 같은 것을 물으실까 슬퍼하지요.
세 번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말을 끝남과 동시에 베드로 사도 속 깊이 박혀 있던
주님을 세 번 배반한 상처는 치유가 되면서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이런 어둠 -이제껏 죽 이야기한, 눈물, 방향성, 절망감, 두려움, 분노, 이성주의, 합리주의,
회의주의, 숙명론적인 생각, 그리고 깊은 상처-이 숨어 있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수백 번 부활절이 지나고 결코 부활하지 못할 겁니다.
겉으로는 부활절 내년 이맘때 되면 또 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부활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한번 부활 하셨습니다.
결국에 부활의 문제는 그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부활은 영적 진화입니다. 죽을 때까지 확인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내면서 먼저 하느님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저 자비의 예수님상 밑에는 ‘주님, 당신께 의탁합니다.’라고 쓰여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알려주셨죠.
주님께 의탁해야만 우리는 부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한 힘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자비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도록 합시다.
아멘
♣2021년 부활 제2주일 (04/11)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첫댓글 주님께 의탁해야만
우리는 부활할 수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