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 2 - 피사 사탑과 대성당에서 4대 해운 강국 피사 그 영광의 흔적을 보다!
5월 16일 이탈리아 서북부 친퀘테레 의 리오마조레 에서 기차를 타고는 라 스페치아
역에 도착해서 다시 13시 41분 기차를 바꾸어 타고 피사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후 거리를 걸어 아르노 강 을 지나니 눈 앞에 오래된 성벽 이 보이는데
한 구간은 회색 돌이고 다른 구간은 붉은 벽돌이라 그럼 건축 시기가 다른 모양이네요?
피사 성곽 을 끼고 왼쪽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가는데 피렌체 처럼 여기도 흑인 행상
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관광객을 상대로 손목시계등 잡동사니 를 파는 것을 봅니다.
저런걸 누가 사는 사람들이 있을라나 하는 의아한 생각 이 드는 데,
아프리카에서 유럽에 온지 얼마 안되는 흑인 들이야....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수 없으니 밥이나 먹는지 주제넘는 걱정을 합니다.
행상을 지나치면서 보니 멀리 지붕 위로 솟은 피사의 사탑 이 듣던대로
기울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꼭대기 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고는 그 옆에 육중한 모습의 대성당 이 우람한 모습으로 굳게 서 있고 잔디 광장
에는 앉거나 누운 관광객들의 여유로운 모습 을 보면서 남들 처럼 우리 부부도
피사의 사탑 앞에서 사진을 찍는 데 우리처럼 평범한 자세로 찍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남녀 일행들이 일렬로 서서 기울져 넘어 지려는 "사탑을 일렬로 받치는 모습" 이며.....
손가락 위에 얹는등 다양한 자세로 즐기는 이들의 장난스러움에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여기 사탑 Campanile o Torre Pendente 은 1173년에 팔레르모
전투 승리 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두오모 에 부속된
55m 종탑 으로 8층 인데 남쪽으로 10도 가까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피사 지방의 해안선이 아르노강 퇴적 으로 10km 나 후퇴 했지만
당시는 해안에 가까운 이 곳 기적의 광장 에 모난도 피사노
가 10미터 정도 탑을 쌓았을 때 점토지반이 내려앉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공사를 중단하고 안전점검을 통해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시모네가 설계
를 약간 수정 하여 55m 까지 올려 완성한 것은 177년이나 지난 1350년
이라는데... 탑 위에는 옥상 으로 트여 있으니 그 위에 올라간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입장은 15유로 로 40분만에 30명씩 예약제 인 탓인지 지금 줄 선 사람은 보이지 않네요?
사탑이 점점 기울어지자 1900년대 초에 기초를 다지기 위해 360개의 구멍을 파고
시멘트 를 주입했으며 1990년에는 개방을 금지하고 1층에 600톤의 납웨이트 를 부었습니다.
1993년에는 지하에 콘크리트 링 을 설치하고 또 50미터 아래에
10개 케이블 을 심어 고정했으나 소용이 없자 1999년
3층에 강철 케이블을 두르고 북쪽에 구멍을 파 진정시켰답니다.
지금도 1년에 1mm 씩 기울어 진다는 예쁜 기둥이 돋보이는 사탑 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저 탑에서 무겁고 가벼운 물체의 낙하실험 을 했다는 갈릴레이 갈릴레오 가 떠오릅니다.
갈릴레이 는 이 도시 피사에서 태어 났는데 1583년에 대성당의 청동 램프 가
흔들리는 것 을 보고는.....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 하였다고 합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 는 이후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 를 지냈으며 여기 사탑에서
실시한 낙하실험 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오류 를 밝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일로 피사 대학에서 추방된 그는 1592년에 파도바 대학 교수 가 되어 명성을
떨쳤으며 1609년에 제작한 수제 망원경 으로 1610년에 목성의 위성, 토성의 띠 와
달 표면의 요철,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을 뒷받침 합니다.
그는 피렌체 대공의 초청을 받아 연구에 전념 하다가 교회의 비난에
대답 하기 위해 로마 바티칸에 소환되어 변명 을 시도하였지만...
결국 악명 높은 "종교재판" 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 받습니다.
화형 을 당할 수도 있는 교회의 끔찍한 고문을 면하고 살기 위해서는 주장을 굽혔으나
교회 법정 을 나오면서 했다는 말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였다던가요?
기독교 유럽은 마녀 사냥과 종교재판 으로 잔인한 고문과 화형에 처해지는 일이 다반사라?
교회 성직자들은 교회 가르침인 천동설 에 위배되는 지동설을 잠재우지 않으면 교회 권위가
추락한다고 여겼었나요? 지동설을 포기한 댓가로 사면된후 피렌체의 교외에서 여생을
보내며“신 과학대화”를 저술했다는데 재료강약학의 선구적 논의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탑 옆에는 탑 이 있고 그 위에 늑대 젖을 빠는 두 어린아이 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이고 그 뒤쪽에 건물은 캄포산토 공동묘지 인 데.....
12세기에 피사 주교 란프린키 가 성지순례 를 가서 예루살렘 골고다의 흙 을
가져온 것을 기념해서 1278년에 조반니 디 시모네 가 건축했다고 합니다.
캄포산토 공동묘지 외부의 벽에는 43개의 블라인드 아치 가 있으며 벽 내부
에는 최후의 심판, 지옥 및 죽음의 승리 가 프레스코화 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 베노초 고촐리 는 방대한 양의 구약성서 이야기 를 프레스코화
로 그렸으며 피사 상류층의 묘지로 사용되던 중에......
1944년 미군 공국기의 폭격으로 파괴 되었다니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피사의 사탑 을 실컷 보았으니 이제 흰색의 피사 대성당 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티켓 을 사야 하겠는 데.... 사탑 바로 앞쪽
대성당 문은 닫혀 있는지라 완전히 한바퀴를 돌아 반대편으로 걷습니다.
세례당 쪽에 대성당의 문이 열려 있기로 들어가려고 하니,
티켓 은 여기서 파는게 아니라... 멀리 우리가
처음에 들어왔던 사탑 너머 건물 까지 되돌아 가야 한답니다?
그럼 여기 관리자들이 표지판 을 제대로 세우든가...... 툴툴거리며 다시
되돌아가니 들어올 때 오른쪽에 있는 별도 건물에 티켓
오피스 가 있는데 우리가 사탑에 홀린지라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네요?
6유로 하는 공통 입장권 을 사서 되돌아와서는 피사노의 문 을
통해 1068년에 부스케투스의 설계로 착공 하여
1118년에 준공했다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 으로 들어섭니다.
여기 피사의“기적의 광장”에다가 대성당 을 세운 것은 그 5년 전인
1063년에 시칠리아 섬 서부에 자리한 이슬람 사라센 의
부유한 도시 팔레르모를 약탈해 엄청난 황금 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사라센 과 북아프리카 베르베를 해적 들이 이탈리아등 지중해 를 휩쓸며
수백년간 약탈을 했으니 그 보복으로 피사가 팔레르모를 습격해 약탈
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들어간 문은 세례당과 마주보고 있으니 1180년에
보난도 피사노가 만들었는데 피렌체 세례당의 문처럼 아주 섬세한 조각들이 보입니다.
대성당 내부 는 좌우로 열주들 이 늘어서 있고 100m 에 달하는 5회랑 에
좌우익랑의 라틴 십자형 플랜 으로 교차 지점에는 타원형인 돔 으로 덮었는 데....
정면에는 조반니 피사노 가 고딕식으로 설계했다는 설교단인 제단 이
보이니, 6개의 기둥 과 조각 장식이 5개의 지주 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바로 신앙과 희망 그리고 자애 를 상징한답니다.
그 위로는 옥탑에 성화 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예수 가 앉아 있으며
그 아래에는 3단으로 성화 가 그려져 있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그 앞쪽에 천장에서 내려온 쇠사슬에 매달려 흔들리는 청동램프 가
보이는데.... 저것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가
“진자의 원리” 를 발견했다는..... 바로 그 램프 인가 보네요?
실내에는 아름다운 청동 부조 외에 천장에는 금빛 사방 무늬 가 예쁘고 또
왕관 이 장식 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데 무엇보다도 그림들 이 볼만하니....
구양과 신약 성경 에 나오는 장면들에는 왕들의 모습 도 더러 보이는데
다윗왕 이나 솔로몬왕 인지...... 아님 로마 이후 근대의 왕 일러나?
여기 기적의 마당 에 선 바실리카 형태의 대성당 과 원통형의 세레당,
그리고 우아한 사탑 및 캄포산토 공동 묘지 는
중세의 단절도 르네상스의 부흥 도 없이... 고대로 이어진다 고 합니다.
이 건축물에 기초를 닦은 부스케토 는 비잔틴 은 물론이고 멀리 다마스커스,
카이로 및 코르도바의 사라센 건축에서도 영감 을 얻었으며.....
또한 로마 시대의 영묘 와 예루살렘 성묘 를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데.....이는 고대로 부터
내려오던 건축술이 단절되지 않고 피사에서 재현 된 것일러나?
토스카나주 의 고도 피사 Pisa 는 고대에 그리스인들이 개척한 식민 도시
로 출발하여 로마 시대부터 동방교역으로 번영 했는데.... 827년
부터 아프리카 튀니지 에서 출항한 사라센 해적들이 시칠리아를 공격 해 오자!
다음 해인 828년에 로마 교황의 청 에 응해 튀니지를 공격 하는
보니파초 백작 군대에 선단을 제공 하니 이탈리아군은
튀니스 에서 기독교도 노예를 해방 시키고 카이루안을 공격 합니다.
이슬람 사라센 의 북아프카 근거지를 공격 한 이 전투는 대성공 이었으나
시칠리아의 이슬람 사라센 군 은 철수하기는 커녕 대반격을 준비 하니....
이듬해에 튀니스를 출발한 사라센 해적 들은 간 크게도 치비타베키아에 상륙 해
점령하고는 로마를 포위 하고..... 바울성당과 베드로 성당을 약탈 하였습니다.
기독교 유럽의 심장부를 약탈 하고는 20년 후에는 사라센 해적들은 피사 해군을 피해
그 북쪽 루니(라 스페치아) 에 상륙해 제노바 외곽 을 지나 남프랑스를 약탈 합니다.
이에 피사는 해군력을 더욱 증강해 사라센 해적을 물리치고는 11세기 말에서 13세기
까지 코르시카 와 사르데냐섬 을 지배하며 제노바와 해운국의 패권 을 다투었습니다.
1016년에 피사 함대는 제노바와 연합해 사르데냐섬의 사라센인 해적들을 몰아 내었으며
1063년 멀리 시칠리아섬 서부 사라센 의 도시 팔레르모를 약탈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후 1087년에는 이슬람 해적들 에게 잡혀간 기독교도 노예를 구출 하는 작전
에 참가하니 300척 으로 구성된 선단은 로마와 아말피, 제노바 가
참여했는 데..... 그중에서도 피사는 가장 많은 선단 을 참여시켰던 것이지요!
제1차 십자군 이 터키를 지나 안티오크를 함락하고 팔레스티나로 진입하자
1099년에 피사는 가장 빨리 120척의 선단을 팔레스티나로
파견해서는.... 십자군의 보급품을 수송 하고 무역 기지를 건설 합니다.
이후 제노바와의 전투에서 승리 해 코르시카와 사르데냐섬 을 차지
했으며 스페인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6세 를 원조해
스페인 동부의 발렌시아에서 엘시드 를 몰아내는데도 일조 했습니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와 비잔틴 제국내에서 특정지역을
차지하고 상거래 기지를 세우며..... 면책특권과
면세특권 을 가지는 댓가로 선단을 제공 하는 협정 을 맺기도 합니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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