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우스개 소리로 '여보 나 아직 안 죽었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한참 일 할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간 중년 사니이가 사망 판정을 받고
응급실에서 흰 천을 덮어 쓰고 시체 보관실로 옮겨지는 순간에 깨어났던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하얀 천을 살짝 걷어내니 그토록 사랑하던 마누라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여보 여보 죽으면 안 돼" 하면서 따라 오고 있었다. 내심 기분이 좋아서 살짝 마누라의 손을 잡으면서
"여보 나 아직 안 죽었어!" 라고 말했더니, 마누라 왈, "의사가 죽었다고 하면 죽은 거요" 하더란다.
크게 상심한 당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 멀찌감치서부터 대성 통곡을 하면서
찾아오는 남자가 있었으니 자세히 보니 자기 아들이었다. 회사에 근무중에 급작스런 비보를 받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애비는 반가움에 그의 손을 덥썩 잡고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 아직 안 죽었어!" 라고 했더니, 아들왈,
"어머니가 뭐라고고 합디까?"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밝힐 수밖에,"의사가 죽었다고 하면
죽은 거요'라고 했더니, "아부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냥 가십시요!" 하더란다.
지난 목요일부터 토요일에 서울에 사는 둘째 딸과 인천에 사는 첫째딸이 애비 생일이라고 가족과 함께 내려왔다.
생일파티는 토요일 저녁시간에 하기로 했는데 두 딸이 금요일 낮과 토요일 낮 시간 동안 너절하게 어지러져 있는
애비방과 에미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수천만원짜리 방을 짐한테 뺐기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아 내버려 두었다. 고물 책상도 들어내고 그 위에 있던 PC와 프린트도 들어내고 베란다에 있던 화분도 시들한 것은
밖으로 들어내 버렸다.
대신동에서 해운대로 이사한지가 1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물건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독주택에서 비교적 넓게 쓰던 공간이 갑자기 좁은 아파트 공간으로 한정되니 일단 비어 있는 공간에 물건을 최대한 집어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 한테는 아주 소중한 물건이지만 아들, 딸들에게는 쓸모없는 폐기물이나 다름없는 물건들이 많다.
그중의 하나가 1968년도 제일은행에서 나온 달력이다. 당시 식구가 먹고 살기가 힘들어 입이라도 하나 던다고 내 바로 밑에 있던
동생을 중1 어린 나이에 알바이트를 하면 야간중학교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서울로 보냈다가 밤에 혼자 자다가 연탄가스로
잃었는데 그 동생이 집으로 보냈던 달력이다. 나는 동생과 함께 지냈던 그 한많은 세월을 놓치기 아쉬워 지금까지도 고이 간직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두 딸이 방을 깨끗이 치워서 전에 보다 훨씬 넓어졌지만 내가 그토록 아껴왔던 달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보릿고개도 모르고 배고픔도 모른채 풍족하게 자랐으므로 물자 아낄 줄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세계10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도 6.25전쟁 후 폐허에서 부모 세대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줄 모르고 저절로 잘
살게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을 나와도 3D 직업은 쳐다보지도 않고 캉가루족속으로 남아 부모들의 속을 썩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카페나 맛집을 찾아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