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나해)
제1독서(창세 2,18-24)는 하느님의 사랑의 짝인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빼놓고 인간을 말할 수 없듯이, 인간을 빼놓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창조에 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7일 도식을 이용하면서 안식일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창조가 여섯째 날 이루어진 것으로 말합니다(1,26-31). 둘째는 인간창조가 창조의 첫 날에 이루어진 것(2,7)으로 말하면서, 인간은 자기 살과 뼈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면서 그분을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창조 이야기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불가분의 관계, 인간 사이의 평등과 사랑의 협력자 관계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또한 흙으로 빚어졌기에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 있고,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남자)에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지만 세상에서 협력자(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남자에게 생명을 주는 여자를 적합한 협조자로 만들어주시면서 서로 뿌리칠 수 없는 갈망을 지니게 한 사랑의 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마르 10,2-12)은 창조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혼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만난 바리사이들과 혼인에 관한 논쟁을 하십니다. 마음이 완고한 바리사이들을 질책하시고, 다가오는 어린이들을 막아서는 어리석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려는 예수님의 의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갈라서지 말아야 할 부부들의 이야기이지만 핵심은 하느님과 인간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합니다.
일부다처제를 묵인했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혼인한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면 이혼 증서를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는 모세의 법(신명 24,1-4)을 들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그들을 탓하시면서 마음이 완고해진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런 법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또한 “좋지 않은 규정들과 지켜도 살지 못하는 법규들”(에제 20,25)로 사람들을 얽어매려는 바리사이들에게 율법주의적인 생각과 태도를 뛰어넘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부가 사랑 때문에 만났으므로 둘이 알맞은 협력자로서 하나가 되도록 서로의 품위를 존중하면서 사랑으로 일치하라고 하십니다. 부부는 하느님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랑에 함께 참여하는 동등한 존재이지 예속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 때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나누셨던 대화의 주제에 대하여 다시 여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창조와 일부일처제의 근본적인 의미(창세 1,27; 2,24)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다인들은 여자를 남자의 단순한 소유물이나 노예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혼은 불평등하게, 아니 무조건 남자의 의사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유다인들 가운데 한 부류(샴마이)는 이혼에 관한 규정(신명 24,1-4)을 좁고, 엄격하게 해석하면서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는 “추한 것”을 부부의 일치성과 동등성을 무너뜨리는 것에 연결시켰습니다. 한편 다른 부류(힐렐)는 “추한 것”을 지나치게 넓게 확대 해석하면서 풍기문란하거나, 음식을 태우거나, 눈을 치켜뜨고 남편을 바라보는 것까지도 이혼 사유라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남자 중심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반면에 순수혈통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유다교의 사제들에게는 이혼규정을 더욱 넓게 적용하면서 쉽게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편적인 자연법과 남녀의 동등성을 무시하고 남성 중심으로 해석하거나 법의 정신인 사랑과 용서를 잊어버리고 법조문에 얽매여 적용하는 사회적 악행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혼인의 평등성은 하느님의 창조사상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남녀가 부모를 떠나 혼인을 할 때 믿음이라는 받아줌으로, 사랑이라는 내어줌으로, 희망이라는 같은 방향을 바라봄으로 살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대화로 소통해야 하는 동반자이고, 지배가 아니라 섬겨야 할 서로의 주인이고, 서로 기대야만 버틸 수 있는 부족한 협력자입니다. 사랑은 귀가 아니라 마음에다 속삭이는 것입니다. 귀에다 하는 말은 다 알아듣지 못하지만, 마음에다 하는 말은 다 알아듣습니다.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마음이 뛴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가끔 마음이 아니라 머리가 먼저라고 하기 때문에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와 하느님도 이런 부부의 관계와 똑같습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편협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지 어린이들처럼 힘없는 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오는 누구에게든지 방해물이 되지 말고 오히려 자세하고 친절하게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주셨습니다. 자기들 멋대로 혼인관계를 파괴시키려는 바리사이들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에게 향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갈망을 지닌 존재이듯이, 하느님과 인간 역시 갈라설 수 없는 관계이며,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말씀하십니다.
제2독서(히브 2,9-11)는 인간이 무엇이며, 하느님이 누구신지 되새겨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자기 낮춤과 들어 높여짐을 말하기 위해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편 8장을 인용입니다. 위대함과 비천함을 동시에 갖추셨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을 인간 구원의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혼인한 부부가 불가분의 협력자라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고 부모와 자녀가 같은 운명 공동체이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서 우리를 당신의 영광으로 끌어들이시기 위해 고난을 겪으셨고, 비천한 인간인 우리를 형제로 받아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하신 분과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우리가 똑같이 인간이지만, 피조물과 창조주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지니게 해주셨습니다.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우리는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아야 하며,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협력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되새겨보라고 합니다.
사랑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부모, 다른 가정과 교육환경에서 자라났기에 도저히 같을 수가 없는 성격을 가지고 협력자가 되려면 부부는 닮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적 특성이고, 하느님의 고유한 권능에 의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입니다.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고, 기댈 수 있도록 내어줄 수 있는 갈빗대(마음)로부터 우러나오는 친밀함(사랑)을 발휘해서 부부가 평생 서로 닮으려고 애쓰는 것이 혼인생활이라 여겨집니다. 부부가 성격차이를 탓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은 물론 인간 존재의 근본적 특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닮을 수 있고, 맞출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성격 탓만 하는 것은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며, 닮으려고 하지 않았고, 사랑하기 위해 먼저 희생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혼인의 기본적 자세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들이 겉으로는 남녀의 혼인에 관한 말씀이지만, 속으로는 인간과 하느님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사랑이 충만한 부부가 그렇듯이, “내(남자) 뼈에서 나온 뼈(아내)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다.”(창세 2,23) 할 정도로 하느님과 인간의 도저히 갈라설 수 없는 관계를 깊이 되새기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버린 인간을 계약위반으로 죽일 수도 있었는데(예레 34,18), 신비스러운 계획으로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 사랑의 짝으로 다시 받아주셨습니다. 부족함이 많음에도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시는 신랑이신 그리스도,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아름다운 아내인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어주시는 신랑 그리스도,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어여쁜 신부인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신랑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든든한 동반자이십니다. 인간의 영원한 삶을 위해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주시는 신랑 그리스도, 그분은 바로 우리의 사랑의 짝이십니다. 이런 사랑의 짝으로부터 누가 감히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37)
- 방효익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