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역사 집중조명
비록 지나간 일이지만, 역사적 의의가 큰 일이라 다시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지난 2001년 12월, 아키히토明仁 日王이 갑자기
자신의 혈통에 관하여 입을 엶으로서 한일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또한 2002 韓日월드컵을 앞두고 고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역할도 해낸바 있다.
일본의 2000년 사직의 왕통을 이어오며 가장 최고자리에 있는 왕(天皇)의 위치에서
그런 파격적인 발언이 행하여져, 양국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통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일본왕실은 일본의 고대사,
특히 고대국가 성립시의 왕실의 유래와 인물 왕래에 관해서는
거의 극비에 부칠 정도로 일체 함구,
학자들의 학문적 접촉조차도 금기시하고 꺼리는 극히 예민한 문제로서,
궁내청 내부에서만 쉬쉬하며 보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신성한 聖域성역에 해당된다고 볼수있다.
게다가, 왕가를 陰地에서(?) 보위하는 우익정계나 우익단체등의 압박에 의해,
사회나 언론에서 日王家의 혈통뿌리를 논하는 것은 아직도 금기시 되고 있다.
그러한 엄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그러한 발언이 나왔는지,
어떤 의도에서 내놨는지, 정확한 내막이야 알수 없지만...
아마도, 천상계로부터의 모종의 암시~
즉, 원시반본하는 기운에 부응한 것이 아닌가...
[原始返本원시반본:역사와 생명의 밑바탕이 되는 근원자리로 돌아가서
모든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새로운 창조의 기틀을 이뤄낸다는 의미...]
일찌기, 20세기 초두에 甑山증산상제님께서는
昨今의 이 시대를 일러 말씀하시기를,
“이 때는 原始返本원시반본하는 시대이니라”고 언명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古來 일본 왕가의 숱한 역사과정에서 볼때,
빙상의 일각, 또는 鳥足之血(새발의 피) 정도에 해당하여,
그 진실된 역사의 겉절이 맛만을 맛배기로 살짝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한일 고대사에 관한 복잡한 사연은
게시판 [일본의 역사(起源)]의 자료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어쨋든, 일본 사회에서 거의 있을수 없는 아주 희귀한 이 발언을
다시 상기하고 되새겨,한일간에 구태의연-왜곡된 역사를 깨우치고,
보다 올바른 역사관 정립에 도움이 될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아키히토明仁 日王, 충격 발언!
“간무桓武 천황의 어머니는 백제百濟 무령왕武寧王 후손”
일본인은 민족-문화 형성에 미친 한국 유산을 바로보기 시작했다.
George Wehrfritz 도쿄 지국장, Hideko Takayam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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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왕자 시라카베(白壁)의 둘째 부인은 백제 왕족의 후손이었다.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여인은 남편이 서기 770년 고닌(光仁)천황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렵게 살아 남았다. 그런데 황후와 태자가 천황을 해치는 주문을 걸었다는 죄로 투 옥되자, 다카노노 니가사의
아들이 태자가 되고 781년 일본의 50대 천황으로 등극했다. 그가 바로 간무(桓武)
천황이다.
생물학적으로 간무 천황의 절반은 한국인이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일본인들은 왕실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이 사실을 숨겼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역사적·문화적·혈통적 증거도 감추었다. 일본이 이처럼 한국과 공유한 역사를 부인하는 태도는 양국 관계에 계속 악영향을 미쳤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과거사 망각증을 일본 문화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수탈과 강제노역·종군위안부 등 한반도 강점기에 저지른 만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과거에 너무 집착한다고 못마땅해한다. 이렇게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나라가 오는 6월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다는 것은 매우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양국의 오랜 긴장관계를 해소하려고 시도한 인물은 뜻밖에도 일왕 자신이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지난해 12월 68회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 자신과 관련해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적혀 있어 한국과의 緣을 느낀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 왕실이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키히토의 발언은 시기로 봐서도 다분히 계산적인 듯하다. 일본
왕실 관측통에 따르면 아키히토는 지난해 일본의 전시 만행 부분을 왜곡한 새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던 우익들의 목소리를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잠재우려 했다. 아키히토가 한국인들의 對일본 기여를 인정한 것은(음악·유교·불교 3가지를 언급했다) 1910∼1945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이 겪었던 고통의 기억을 달래려는 노력이었다. 왕실의 한 측근은 “천황은 진심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하길 원한다. 그 발언은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키히토의 발언이 13년 재위 기간 중 가장 의미심장하며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발언은 지난 50년간 일본이 전쟁기록을 숨긴다고 비난해온
한국과 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일왕 자신이 이 오랜 설전을 끝내기 위해 직접 나서서 “역사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전략은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명이 이웃 나라, 특히 한반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함으로써 주변국의 신뢰를 얻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환은 가위 혁명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일본의 한 젊은 역사학자는 아키히토가 한국과의 혈연을 언급하자 충격을 받았다며 “일본의 현재 분위기에서 그 문제는 금기시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실 일본 궁내청은 왕가의 무덤 2백30개를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하며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계속
거부해왔다.
학자들은 궁내청이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은 왕실의 한인 혈통에 관한 증거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본다. 일본 교과서는 한인들이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왕실과 관련된 소문을 즐겨 보도하는 TV의 낮 프로그램도 아키히토의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다. 주류 언론조차 그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 한국에서는 아키히토의 발언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학자들이 일본에 대한 한반도의 영향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최근부터다. 이것은 문화교류가 늘어나면서 양국의 연관성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데에도 이유가
있다. 이제 인류학자들은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1세기 초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생각한다. 언어학자들은 일본 왕실 의식에서 사용되는 말이 신라어에서 유래했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니가사 황후가 살던 시기에 교토(京都) 주변에서 사는 사람
중 백제 유민이 약 30%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교토大 우에다 마사키(上田正昭·74) 명예교수는 지금도 이와 관련된 연구의 가장 큰 결점이 기술·사상의 전래에만 집중하고 사람에 관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키히토의 발언은 백제의 여성을 언급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누구였던가?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녀의 가족은 왜 일본으로 왔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 사람들의 생애가 들어가야 역사가 흥미로워진다.”
일본의 건국신화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쪽의 규슈(九州)섬 다카치호(高千穗)라는 마을 아래에 골짜기가 있었고,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사악한 남동생과 싸운 후 그 골짜기에 있는 동굴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추방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후 아마테라스는 쌀의
신 니니기(瓊瓊杵)를 비롯한 자신의 자손들이 땅에 나가 살도록 허락했다.
아마테라스는 일본 고유종교인 신토(神道)에서 가장 신성한 존재로 추앙받으며,
그녀의 5대손 진무(神武)는 일본의 초대 천황이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규슈의
이 골짜기에 내려가 시냇가에서 기도를 하고, 소원을 돌멩이에 적은 다음 돌탑을
쌓는다. 2차대전 전에 발간된 한 여행 안내책자에는 “일본 제국의 왕실은 세계
여느 나라와 달리 하늘과 땅에서 시작해 영원히 계속된다”고 서술돼 있다.
이에 반대하는 이론이 전후에 제기됐다. 이 신화는 이민족의 침입을 뜻하거나, 이민족이 갖고 온 것이라는 설이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東京)大 교수는
1967년에 이 가능성을 연구했다. 이것은 2천년 전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에서 호전적인 몽골리안 기마민족이 규슈로 건너 왔으며 이들이 일본인의 지배층을 이룬
덴손(天孫)족이라는 연구에 근거한 이론이다.
최근에는 저명한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가 이 이론을 연구했다. 그는 쌀의 신 니니기가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온 덴손족으로 쌀 재배법과 새로운 문화를
도입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그 영향으로 원시적인 조몬(繩文) 부족시대를 끝내고 야요이(彌生)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를 따라 일본에 온 도래인들이
다카치호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서기 300년 이후에는 사이토바루(西都原)에서 제사를 지냈다. 여기에는 수백개의 열쇠구멍 모양의 무덤이 있다.
가장 큰 무덤은 한반도·만주에서 발견된 왕가의 무덤과 비슷하다. 그보다 작은
무덤 몇개는 1910년에 발굴됐고, 여기서 진흙으로 만든 고대 중국식 배 모형과 한국에서 발굴된 것과 유사한 금동제 말안장이 발견됐다. 우메하라는 “쌀을 재배하는 지식을 갖고 들어온 야요이인들이 조몬인과 섞여서 지금의 일본인이 탄생했다”고 결론지었다.
7세기 일본 제국의 형성에서도 그와 비슷한 한국인들의 영향이 밝혀졌다. 교토大
우에다 교수는 이것을 언급한 최초의 학자다. 1965년 그는 백제인 니가사가 간무
천황의 어머니이며, 나라(奈良)의 거대한 동불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장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료학자들은 그를 비난했으며, 극우주의자들은 수차례
그를 협박했다. 그는 “한 우익 인사는 나에게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협박장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최근 들어 여러가지 발굴이 이뤄지면서 한반도의 이주민·기술·문화가 그 시대
문명의 중심을 형성했다는 그의 이론이 지지를 얻고 있다. 660년께 백제 유민 10만명이 야마토(大和)에 들어오면서 불교·한자·도자기 제조술·주조술을 전래했다. 일본 문명화의 중심지로 묘사되는 7세기의 아스카(飛鳥)는 여러 민족·문화가
하나로 융화된 국제도시였다.
이 지역의 무덤은 한반도식이다. 1972년 발굴된 다카마쓰즈카(古松塚) 고분에는
고구려의 복장을 한 남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여행 가이드는 이 무덤 주인인
이름 없는 귀족은 한국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런 사실이 논란을 일으켰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고만 말했다.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사실은 한반도가 일본에 끼친 영향 중 주된 것이 바로
인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사실은 17세기 들어 나타난 일본이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300년부터 이주가 있음을 확인했고, 일부 연구에 따르면 일본인의 3분의 1에서 많으면 절반까지가 어느 정도는 한인의 피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권을 장악하고 1604년 수도를 에도(江戶)로 옮긴 뒤 쇄국정책을 썼던 시절에도 한인들은 계속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과 문화를
전파했다. 무관·유학자·화가·악사·의관들로 구성된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배로 도착한 뒤 말을 타고 6개월 이상 걸려 에도에 도착하곤 했다. 조선통신사는 약
2백년 동안 모두 12차례 일본에 파견됐다.
그러나 모든 교류가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은
한반도를 침략해 해변 마을을 약탈하고 도공(陶工)들을 납치해갔다. 모두 합해 5만여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잡혀갔고 그중 도공들은 일본 엘리트층을 위해 도자기를 제조했다.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의 작은 마을 히가시이치키(東市來)에 가마를 가진 도예가
심수관(沈壽官)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가 ‘사쓰마’(薩摩) 도기를 창시한 심당길(沈當吉)의 14대손이다. ‘사쓰마’란 이름은 그 선조들을 납치한 군벌이 살았던 고을의 이름(현지명은 ‘가고시마’)이다. 아직도 한국 姓을 지키고 있는 그는 “우리의 역사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인내심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금의 재일동포들은 그들이 일본에 도착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런 강인한
의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했다. 한국인들은 창씨개명을 해야 했고 강제로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그런 다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백50만명의 한인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끌고가 광산·농장·공장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현재 재일동포의 대다수는 종속된 상태는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많은 차별을 받고
있다. 60만명에 이르는 강제 노역자와 그들의 후손들은 거주권을 갖고 있지만 선거권이 없다. 40대의 한 저명한 재일교포 학자는 학교를 마치고 취직이 안돼 “야쿠자냐 교수냐” 둘 가운데서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한 젊은 재일동포(35·웹 디자이너)는 마늘 냄새가 난다고 멸시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일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출신을 숨기기 위해 일본
이름을 쓴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이런 피해의식은 월드컵과 관련해서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겉으로는 협력을 내세운 공동개최이지만 결국은 누가 앞서는지를 가리는 시험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양국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 서로 경쟁했으며 공동개최로 결정이 난
뒤에도 서로 독자적인 조직위원회를 유지했고 대회 타이틀 표시에서 어느 나라의
이름이 먼저 나와야 하는지를 두고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결국 결승전을 일본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Korea-Japan으로 결정났다).
네덜란드인으로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은 거스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이 일본팀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때문에 당황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프랑스에
4-0으로 지고, 일본이 그 얼마 전에 프랑스에 5-0으로 졌다면 우리 선수들은 프랑스에 진 것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런 비교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국은 세계의 이목을 의식해 월드컵 대회 시작 전에 양국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주 양국은 한·일 관계사에 초점을 맞춘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달 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서울에서 열리는 월드컵 개막식에 일본 왕실에서 누가 참석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일본 궁내청은 일왕의 방한계획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외국어大에서 일본문화사를 가르치는 홍윤기(洪潤基) 교수는 아키히토 일왕이 개막식에 참석하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한국으로서는 어쩌면 아키히토의 방문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문보다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여러 전문가들은 아키히토의 발언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니가사의 능이 있는 교토의 한 지역에 가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가사 황후는 1천2백년 전에 만들어진 그녀의 능
곁에 살고 있는 이웃 주민들에게도 여전히 미스터리다.
산꼭대기의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어 꾸불꾸불한 산길로 접근할 수 있는 그 능은
등산객들과 개를 데리고 산책나온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산행 기점의 표지판은 ‘간무 천황 모친의 묘’로 표시돼 있다. 꼭대기에 도달하면 ‘光仁天皇皇后高野新笠大枝陵’이라는 표지판이 그녀의 이름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주민들로부터 들을 수 없다. 이 지역에서 30년 이상 거주해온 한 주부는
“그녀가 한인이라고? 난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이제는 일본인들이 韓人 황후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시기가 왔다.
With B. J. Lee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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