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뿌옇게 변해가고 있었다.
신륜재도 내 앞에서 치를 떨며 서있던 빨간머리 여자애도..
그리고 하얀 이불을 뒤집어 쓴 곤지도 그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내 코끝을 심하게 자극하던 병원 냄새와
바쁜 듯 뛰어다니는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그리고 심장을 뚫어버릴 듯 아파오던 고통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
"침 흘리지 말라니까? 새 책인데 왜 침을 흘리냐고!"
팍!
아얏-
"책에 대한 공경이 없어, 공경이."
"쓰읍. 어? 뭐, 뭐지?"
"이거 어쩔 거야? 이렇게 흥건한데 어쩔 거냐구!"
내 밑에 깔려있던 문학책을 뺏어서 나에게 펼쳐 보이는...곤지.
그리고 나는 내 볼에 묻은 침을 닦아내고 있었다.
"문학이 그렇게 싫으냐? 과외하면서 선생이 자는 건 또 처음이네."
"...곤지야?"
"왜!"
"곤지..맞지? 맞지, 곤지지?"
"그럼 내가 곤지지, 곤충이겠냐?"
"어머, 곤지야!!!"
와락-
나는 그가 나와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것에 너무 깊이 감동해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곤지를 껴안아 버렸다.
너 살아 있었구나!
죽지 않았구나!
자살한 것이 아니었어.
그래, 그건 꿈이었던 거야! 꿈!!
모든 건 꿈이었던...
"징그럽게 왜 이래!"
팟-
곤지가 나를 밀쳐내기 전에 나는 황급히 곤지의 품에서 떨어졌다.
꿈...이라니?
모든 것이 꿈이었던 거라니?
"누나 왜 그래?"
"곤지야, 너 지금 몇 살이니?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젊어졌어?"
"무슨 헛소리야. 나 지금 15살이잖아. 중학교 2학년!"
"으악!!!"
뭐, 뭐라고? 주, 중학교 2학년?!
그, 그럼? 그럼 나는 몇 살인 건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난? 난 몇 살이야?"
"뭐? 누난 자기 나이도 몰라?"
"아니, 알아. 스물 둘. 나 스물 둘이잖아."
"뭔 소리야? 누나 아직도 잠 안 깼어? 또 이상한 꿈꿨어?
누난 고2 잖아. 18살. 22살 될려면 아직 멀었네요."
...정말 꿈이었단 말이니?
내가 지금까지..꿈을 꾸고 있었다는 거니?
거짓말.
아직도 생생하다구!
아직도 울 것 같단 말이야.
아직도..아직도 륜재가 날 안아주는 느낌..
"륜재! 륜재는?"
"륜재? 누구야?"
세상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꿈이라서 느끼지 못했던 고통과 아픔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아팠고 배도 아팠다.
아기가 있었는데..
곤지의 아기였지만 륜재가 날 받아 주었었어!
"꿈이 아니야...아니라구."
"누나, 왜 그래? 미쳤어?"
"꿈이 아니야!!"
"...누나?"
륜재는 날 사랑한다고 했단 말이야.
륜재는 끝까지 날 안아줬단 말이야.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갖은 나를 받아주고..
날 안아주고, 깊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도
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남자라구.
그런 남자가 그저 한낱 꿈일 뿐인 사람일리가 없어.
분명히...분명히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야!
나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이 꾹꾹 참으로 애썼지만
애쓰면 애를 쓸 수록 꿈에서의 아픔이 더 느껴져
결국은 눈물이 토해내고 말았다.
"끄윽, 윽..흐앙."
"누나, 왜 울어? 나,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흐흐흑. 흐아아아."
"누나? 누나.."
오곤지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탠지.
하지만 나도 내 눈물의 이율 모르겠고 또 멈추기도 힘들었다.
사랑했는데.
18년을 살아오면서 누굴 좋아한 적은 크게 없었지만
정말 사랑했는데.
재준오빠를 좋아했던 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는데.
사랑이라고 믿었고..그게 꿈에서의 감정이라도
난 정말 신륜재라는 사람..아니, 신륜재를 사랑했는데.
"누나, 신륜재라면 이 문학책을 쓴 사람 말하는 거야?"
"흐윽, 윽..뭐?"
"신륜재. 아까 륜재라고 그랬잖아. 누나가 읽던 이 책 말이야."
"..그게..왜?"
"이 책을 신륜재가 썼다고. 그래서 륜재, 륜재 거렸던 거 아냐?"
그 책을?
그 재미없는 책을?
왜? 어째서?
어째서 그 책을 쓴 작가가..내 꿈에 나온 건데?
"나 수학문제 풀동안 읽는다더니 자기나 하고."
"그 책 재미없던데?"
"재미없으니까 잤겠지. 근데 신륜재는 왜 찾아?"
"..그 작가 얼굴도 모르는데?"
"무명 작가 아니야?"
"그럼 뭐가 어떻게 된거야!"
신륜재는 내가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잠든 책을 쓴 사람이고,
내가 그 책을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잠들었을 때 꾼 꿈의 주인공이라고?
왜?
왜 하필 신륜재라는 사람일까?
얼굴도 모르는데 왜 신륜재인 거지?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지?
"아무튼 오늘 과외는 누나 상태가 안 좋아서 안 할래.
나 집에 간다. 내일은 제정신 차려주길 바래."
깍쟁이 같은 곤지는 그렇게 내 방을 나갔고
나는 아직도 패닉상태인 채로 그렇게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고 '신륜재' 라는 무명작가가 쓴 책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느 특별한 남자의 밤'
뭔가 있을 것 같은 제목 때문에 고른 책이었는데...
이렇게 재미없을 수가 있다니.
하아. 근데..근데 왜 신륜재를 사랑했지?
왜..이렇게 이름만 바라보아도 심장이 뛰지?
거울 속에 서있는 내가..왜 스물 둘로 보이는 거지?
아직도 내 뱃속에 아기가 있는 거 같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그날 밤, 또 다시 잠들면 그 꿈을 이어서 꿀 것 같은
안 좋은 예감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무래도 '신륜재' 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선 안될 사람이라는 생각에
아침 일찍부터 서점을 찾아갔다.
그리고 신륜재의 작품을 모두 찾아 보기로 했다.
"신륜재..신륜재..신륜재."
입으로 계속 그의 이름을 되뇌이면서 열심히 책을 찾았다.
그런데 여간해선 그의 책이 보이지 않았다.
워낙 무명 작가라서 그런지 책이 없는 거 같았다.
설마 어제 그 책이 처녀작인 건가?
처녀작을 이렇게 망쳐서 어떡해?
"신륜재..신륜재."
에잇, 설마..
설마 정말 그게 처녀작 이라고.
나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끝까지 그의 책을 찾기로 결심했다.
"신륜재, 신륜재. 실륜..아니, 신륜재."
으악! 왜 없는 거야?!
동네 서점이라 없는 건가?
그럼 시내에 큰 서점으로 가야한다는겨?
정말 이 작가 인지도도 없네.
"아저씨, 신륜재 거 없나요?"
"아저씨, 신륜재님 거 없나요?"
흠칫-
나는 내 옆에 모자를 푹 눌러쓴,
나와 똑같은 타이밍에 말을 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도 놀랬는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자 때문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날 쳐다보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아, 신륜재님 작품 찾으시나 봐요? 하하."
"네. 재, 재미있는 거 같아서.."
"그렇죠?! 재미있죠?!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갑자기 내 손을 부여잡는 남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는 내 놀램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구 흥분해 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은 뭔가 심금을 울려요! 그쵸?!"
"네? 아, 네.."
"흐윽. 있구나. 그의 심오한 작품 세계를 이해하시는 분이!"
"네? 아, 네에.."
"반가워요!!!!"
그렇게 그는 나를 카페로 끌고 갔다.
그게 꿈이 아닌 현실에서의 '운명' 의 첫만남 이었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너는 나의 피피새 :54:
윤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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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1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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