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2023. 2. 24. 금)(마태 9,14-15)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단식』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1) 예수님은 우리를 굶기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의 배고픔’도 걱정하셨습니다(마태 15,32).
‘빵의 기적’을 행하셔서 사람들에게 주신 빵은
분명히 육신을 배부르게 해 준 빵이었습니다(마태 14,20).
2) 그리스도교는 ‘굶는 종교’가 아니라 ‘먹는 종교’입니다.
<우리 교회의 중심에 있는 미사 전례는,
‘말씀’을 받아먹고, ‘성체’도 받아먹는 예식입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면, 단식을 중요한 신심 행위로 여기고
실천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교회에서는 단식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먹는 종교’ 라고 해도, ‘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과 혼자서만 먹는 것은 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활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8,20).
또 어느 안식일에 사도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다가
바리사이들과 다툰 일도 있었습니다(마태 12,1-2).
예수님과 사도들의 실제 생활은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은,
아주 고달픈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단식을 할 수도 없고,
단식이 무슨 의미 있는 신심 행위가 되지도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지역에 따라, 또는 나라에 따라, 또는 개인 사정에 따라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해진 날에는 단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고, ‘사랑 없는’ 일입니다.
단식은 평소에 잘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모든 사람들이 일률적으로 지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식은 의무가 아니라 권고로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4) 우리 교회의 모든 신심 행위의 기본 정신은 ‘감사’입니다.
단식의 기본 정신도 ‘감사’입니다.
우리는 그냥 한 끼를 굶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극기와 절제로 남긴 음식을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데,
그 ‘나눔’도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하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나눔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굶기만 한다면,
그런 단식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5)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실천한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약시대의 단식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이미 오셔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표현은 ‘손님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뜻으로는,
신앙인은 손님들이 아니라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입니다.
즉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신랑은 남의 신랑이 아니라 나의 신랑입니다.>
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에는 중요한 문제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신심을 과시하기 위한
단식이었다는 점입니다(마태 6,16).
이야기 속에 있는 질문도 자기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단식을 철저히 실천하는 충실한 신앙인들이다.
그런데 당신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당신들은 사이비다.”>
6) 예수님 말씀의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날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이
죄를 짓고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 사도들은 너무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일부러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단식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는,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에 자기들이 비겁하게 행동했던 것을 뉘우치면서,
또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단식의 뜻에 ‘수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어서 멀어졌든지, 아니면 마음이 풀어져서
멀어졌든지 간에,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가 예수님에게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경우에 단식은 효과적인 신심행위가 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굶주리게 된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지만(루카 15,14-17),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뚜렷이 표시 나게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좀 더 예수님 곁에 충실하게 남아 있으려고 노력할 때
단식은 효과적인 회개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단식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방법이나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마태 22,37)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출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첫댓글 회개와 단식으로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