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난 벤 작카이(Johanan ben Zakkai) 와 야브네
갈릴리의 유다에 의한 기원 6년의 저항 후 유대인은 60년간의 피의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빌라도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강요하려 했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이용해
예루살렘의 수도공사를 하려하는 등으로 반발을 사게 되고,
그 후 총독이 수시로 갈리다가 네로의 통치 말기, 타락한 대사제가 암살당하게 되었다.
그를 기화로 유대인과 이방인, 로마인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는 베스파시안이 이끌었는 데, 네로가 죽자 그는 로마로 가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들 티토로 하여금 유대인을 정벌케 했다.
티토는 항복을 권유했으나 이를 듣지 않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저항한 유대인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도시는 처절하게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기원 70년 이후 유대인은 민족적 대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바빌로니아, 아라비아 사막, 시리아, 소아시아, 로마,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까지 이동해 갔다.
그 후 또 60년이 지난 후 또 피의 항쟁이 일어났으며,
로마는 이 곳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꾸고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시켰다.
유대인들은 1967년 6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옛날 예루살렘의 벽(통곡의 벽)을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티토가 69년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요하난 벤 작카이(Johanan ben Zakkai) 라는 저명한 랍비가
로마의 포위망을 뚫고 해안평야지대에 있는 야브네(Jabneh 혹은 Jamnia)로 피신했다.
그는 배움의 집에서 유대인을 가르치면서 율법과 교리를 체계화하고
재해석하여 유대교의 존속을 도모했다.
또 산헤드린 공회가 없어진 상태이기에 새로운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령 내의 유대인의 공식적인 대표자가 되었다.
야브네의 학자들은 유대교의 경전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진실된 경전의 골라 편찬하기 시작하였는 데 경전은 세 부류로 정리되었다.
모세 율법의 기본 경전인 토라(Torah), 예언자들에 관한 전승인 느비임(Nebiim),
경전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성문서인 케두빔(Kethubim)이 그것이다.
토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느비임은 첫째 문자 이전의 예언자의 전승 역사에 관한 책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와
둘째 예언자들이 직접 기록한 책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셋째는 예언자들의 단편적 기록인 호세아, 요엘, 오바댜, 요나, 미가,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그것이다.
케두빔은 역대기 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시편, 잠언, 욥기, 룻기, 애가, 다니엘, 전도서,
아가, 에스더이다. 그들은 이 모든 책들을 『야훼의 말씀』으로 여겨졌으며,
그 때부터 확정된 경전이 되었다.
이 경전을 바탕으로 유대인 삶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미슈나(Mishnah: 반복, 연구)가
유대지방을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학파는 게마라(Gemara: 추가된 지식)을 출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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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난 벤 작카이: 이 사람은 힐렐 학파의 마지막 랍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혜의 아버지’이며 ‘모든 학자들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전통에 따르면, 벤 작카이는 주후 68년 로마장군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유대인들과 로마군대 사이를 중재했다고 한다.
이때 예루살렘은 열심당원들이 장악하고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다.
벤 작카이는 이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헛소문을 내고 관에 들어가 누웠다.
제자들은 그 관을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
관에서 나온 작카이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로 갔다.
그가 곧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황제가 되면
야브네(지금의 르호봇 근처)의 한 장소에
토라를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게 해달라고 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황제가 되자 벤 작카이를 위해서 야브네에 장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예시바(학교)는 존속되었고
이 예시바는 수 세기 동안 유대학 연구의 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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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난 벤자카이
보통 나라들은 나라가 망하면 몇 십년도 안되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유대인은 로마에 의해 나라가 멸망된 후
약 2,000년 가까이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했음에도 민족적 동질성을 잃지 않고
또 노벨상은 물론 세계경제 문화 언론계를 장악한 비결은 무엇일까?
랍비 요하난 벤자카이란 인물이 그 해답을 알려준다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던 유대마족을 구해낸 벤자카이는 66 년 부터 70 년 까지의
로마와의 싸움에서 결국에는 대학살로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을
예견하고 유대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대의 독립보다 유대인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지금 우리가 로마군에 무너지더라도
나중에 다시 일어나 최후 승리를 하려면 저들 보다 더 강한 무기를 가져야 하며
로마군이 아무리 무너뜨리려고 해도 무너지지 않는 성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벤자카이는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위해 자신이 직접 로마군사령관과 단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포위 되었던 예루살렘성은 아비규환 이었고 성안 주민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었으나 강경파들 때문에 누구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벤자카이는 자신이 질병에 걸려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는 관에 뉘어져 성 밖으로 나 올 수 있었다
벤자카이는 바로 로마군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
장군이 머지 않아 로마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뒤
성안 야브네에 있는 조그만 학교는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고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호의를 베플기로 약속한다
얼마후 로마황제 네로가 자살로 죽고 몇명의 정치군인들이 왕위에 오르지만 살해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된다
그리고는 후임사령관인 아들 티투스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명령했고
이 약속은 지켜져 유대교육과 문화유산이 소멸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벤자카이는 야브네에서 랍비를 길러내어 유럽각지에 흩어진 유대인 마을에 보내고
유대인 마을에 신앙공동체이며 생활공동체인
유대인 회당 시나고구를 세우고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다
벤자카이는 교육을 통해 유대교와 유대전통이 전승 되기만 한다면
유대 민족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 선각자의 행동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과 정체성를 지킬수 있었으며,
야브네에서 시작한 교육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경제 언론 문화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한 밑거름이 되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