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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정치사상에 대한 통념은
그 초기 시작과 발전과정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계몽주의에 기반한
지극히 세속적 질서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화에 가깝다.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자 에릭 넬슨(Eric Nelson)은,
근대 초기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신학적 법철학과 가톨릭의 정치론 및 교회법,
그리고 유대교의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세속 이론만큼이나
서구 정치사상과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통해 촉발된 종교개혁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인 그의 대자보가 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신호탄으로 작용하게 한
매우 실질적이고 중대한 일전의 한 사건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로부터 약 70년 전 점화된 구텐베르크 인쇄혁명이다.
‘구텐베르크 인간’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 출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 ~ 1468)는,
1440년 경 자신의 야금기술과 주조기법에 와인프레스 등을 응용·접목해
새로운 ‘가동형 금속활자(movable metal type)’ 인쇄술을 창안했다.
기존의 베껴서 기록한 필사 방식이나
목판 인쇄술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높은
생산력과 양질의 인쇄물을 훨씬 더 싸게 제공하는 획기적인 출판기법이었다.
구텐베르크는 라틴어 문법책, 가톨릭교회의 미사 전서 및 면죄부 등을 인쇄하면서
이 금속활자 인쇄술을 마스터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1450년대 초부터 거금의 투자를 받아
라틴어 성경 대량 인쇄에 착수했다.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일일이 베껴 쓰는 기존 필사 방식으로는 3년에 겨우 한권 정도 복제·생산되었던
성경이 같은 기간에 무려 180권이나 ‘찍혀’ 나왔다.
필사본에서 종종 발생된 오·탈자나 왜곡도 물론 없었다.
무엇보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이 ‘신기술’은 이전의 인류가 알지 못했던 ‘책의 시대’를 열었다.
과거 책 한권을 출간하는 데 평균 2, 3개월이 걸렸었다면,
이제는 한 주에 500권의 책이 생산 가능해졌다.
또한 구텐베르크 인쇄기법은 그 원리만 알면 금방 모방·응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갔다.
1462년 마인츠에서 일어난 전쟁은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 일했던
많은 기술자(장인)들을 본격적으로 유럽 곳곳으로 흩어지게 했다.
1500년에 이르러선 유럽 236개 도시에 약 1,000곳의 인쇄소가 생겨났고,
이곳에서 일하는 인쇄 기술자(공)들은 약 1만에서 2만 명에 이르렀다.
구텐베르크 이전 1천여 년의 중세시대를 통틀어
유럽에서 약 10만여 권의 책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구텐베르크 이후
불과 50년 만에 최소 3만 종의 책이 대략 1,500만 부에서 2,000만 부가 생산되었다고 하니,
이 ‘문자의 폭발’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문명적 기여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하다.
1999년 타임지,
그리고 2000년 대영박물관은 ‘지난 1천년의 인물(Person of the Millenium)’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를 선정했다.
저명한 미디어이론가이자, ‘지구촌(global villag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
문명비평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근대의 인간을
아예 ‘구텐베르크 인간’이라고 불렀다.
청각-촉각 등을 포함한 오감을 통해 정보를 수용했던 과거와 달리,
이 시각적 문자홍수 속의 ‘활자인간’은 그 선형적(linear)이고 정형화된 질서에 의해 보다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맥루한은 그런 인간을 ‘조각난’ 인간이라며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결과적으로 이 문자문화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부족주의 및 집단적 세계관을 벗어나
표준화된 객관성과 합리성 및 자율성을 추구하는 독립된 개인들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이처럼 ‘개혁을 위해 준비된’ 바탕에서
1517년 10월 31일, 33세의 마르틴 루터는
마침내 비텐베르크 성(Castle)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써 붙였다.
종교개혁과 자유주의
95개조 논제의 요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 존엄성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즉 ‘독립(獨立)’된 개인으로서의
주권과 자율과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직을 사고팔거나,
교회의 권위를 이용해 개인의 구원을 거래하는 면죄부를 팔아 이익을 꾀하는 것은
크리스토교(기독교)의 본래 정신에 전면 위배되었다.
구원은 오직 회심을 통한 개인의 믿음으로(sola fide) 주어지는 것이었다.
미 의회도서관에 전시된 구텐베르크 성경
이내 루터는 일반인들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성경을 직접 접할 수 있도록
독일 언문(vernacular language)으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의 대자보가 그랬듯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비롯한
그의 설교문 및 논증들은 물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통해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그의 설교문 중 최소 2건은 2, 3년 만에 20쇄를 찍기도 했다.
한 추정에 따르면 1518년부터 1525년까지 독일에서 출판된 모든 책의
무려 3분의 1이 루터의 저작이었다고 한다.
이후 루터의 개혁은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 프랑스의 칼뱅(Calvin),
스코틀랜드의 녹스(Knox),
그리고 영국의 틴데일(Tyndale) 등에 의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국가체제의 압제와 집단의 불합리에 ‘저항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 개신교)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그 어떤 왕이나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인 헌법이 있다고 설파하며,
더 나아가 개인의 자유에 의거한 공화정을 주장했다.
이들의 저항 정신은 오늘날 서구문명이 누리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의 뿌리가 된 것이다.
영국의 교회사학자 알렉 라이리(Alec Ryrie) 교수는
『Protestants(프로테스탄트)』라는 저작에서 개신교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관찰하며
종교개혁의 정신이 어떻게 근대 서구문명을 이루어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특히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비정치성(apoliticism)’이
근대 사회에 기여한 개신교의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이 자유로이 의문을 품는 것을 장려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민주주의에 힘을 실어주었고
시민들로 하여금 부당한 권위에 민감하게 대처하게 했다.
또한 끊임없는 혁신과 개혁을 가능하게 하여 인류에 공헌했다.
그러면서도 이생의 유토피아가 아닌 천국을 바라는 개신교의 신념은
그들의 혁명적 열기를 식히고 신정(theocracy)의 기대를 잠재워
비정치성을 유지하게 했다.
물론 때로는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통치세력에 대해서는
담대히 맞서거나 뒤집어엎기도 했지만 말이다.
한국의 구텐베르크와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마지막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무려 80여년이나 앞섰던
‘한국의 자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1377년 고려 청주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다.
심지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직지’가 영향을 미쳤다는 식의
억지스런 다큐영화(‘직지코드’)도 있었고 유명작가의 소설도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직지’는 자랑이라기보다 한국인에게 반성해야 할 주제다.
기술이 그렇게 빨랐음에도
인류는커녕 한반도에서조차 아무런 공헌이나 정보혁명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개발과 거의 동시에 있었던
조선왕 세종의 한글 창제(1446)도 마찬가지다.
한글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아무런 문화나 문학도 만들지 못했다.
물론 한글은 자모의 결합을 통해 각 글자가 표현되기 때문에
금속활자 인쇄술을 활용하기 위해선
한자보다도 더 많은 활자를 주조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인쇄술 개발의 주체와 동기에 있었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민간 개인이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었지만,
직지와 한글은 국가의 필요에 의한 정책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왕조시대 책의 출간은 모두 왕의 결정이었고, 책값은 터무니없이 비쌌으며,
인쇄기술과 정보는 국가가 독점했다.
심지어 민간의 책 생산이나 배포를 처벌하기까지 했다.
근대로의 발전은커녕 오히려 중세 질서를 고착화한 것이다.
결국 한국인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에 들어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결정적인 매개역할을 종교개혁의 열매인 개신교가 감당했다.
심지어 한글에 띄어쓰기를 더해 실제 활용 가능한 ‘언문’으로 만들어준 인물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였다.
물론 한글로 된 최초의 단행본도 성경이었다.
한글로 된 최초의 신문 「독립신문」 또한 그 창간과 발행에는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최근 한국 사람의 근원을 추적하는 방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함재봉 교수는,
한글이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재창제”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인이 최초로 선거와 자치를 경험한 것도,
1948년 건국 당시 5.10선거보다 훨씬 전인
1887년 한국 최초의 조직 장로교회 새문안교회를 공식 창립하면서
투표로 두 명의 장로를 선출하면서였다.
이후 1894년에 세워진 곤당골교회(서울 승동교회 전신)에서는
백정이 양반 후보들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되기도 했다.
바로 훗날 인권운동가가 된 박성춘이다.
또 1905년에 시작된 전북 금산교회에서는
한 집에서 자기 주인을 제치고 먼저 장로로 선출된 머슴도 있었다.
바로 이자익 목사다.
그가 섬겼던 주인 조덕삼 장로는 자신의 머슴인 이자익 장로를
아예 평양신학교에 보내 목사로 키운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은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통해 아래로부터 ‘탈조선’하며,
개인 자유와 권리를 서서히 확장하고 다가오는 민주주의를 준비했다.
이러한 정신적 토양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자유민주공화국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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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
*1455년 뒤 인쇄기술의 향상으로 성서 출간 : 42행 성서( 총1275페이지) 42행 성서 (총 1275페이지)
*1997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는 지난 1천 년 동안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그 첫 번재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성경을 찍어낸 일.
*활자 인쇄술의 발명에 따른 영향 :
-르네상스 운동(문예부흥)이 이탈리아에서전유럽으로 확산
-종교개혁 운동
-대학의 증가 13세기부터. 교과서 출판을 촉진
-시민계급의 출현 : 자신들의 사상을 출판물을 통해 전달
*인쇄술은 50년 만에 유럽 전체에 전파됨
*인쇄술의 발명 결과 :
1)고전에 대한 지식을 소생
2)지식과 정보의 대량생산 및 보급이 가능해짐
3)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됨.
*출판혁명의 영향 :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 -> 그리스의 천문학자 톨레미(ptolemy)의 책과 아랍의 지리책이 영향
-중세사회가 근대로 넘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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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2005. 5.) 19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은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인쇄술에 이어 세계에 주는 두 번째 선물이라고 말했다. ...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과 이야기했는데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 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 전한 내용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한국을 높이 평가해 준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 하는 모습이었다.
얼마 전 청주TV방송국에서 활자실크로드라는 다큐멘타리가 실감나게 방영되었으며 인기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뭍으로 떠난 서방님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많은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근본적인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비록 중국,일본,프랑스, 독일 등 전 유럽과 전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옛 말에 칭찬은 많이 하고 병은 알리라 했듯이 멀리서온 벽안의 손님이자 미국의 큰손인 앨 고어 부통령이 “한국의 디지털 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인쇄술에 이어 두 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발전에 기여하는 사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 교황사절단이 조선에는 왔었다는 이야기를 암시적으로 하였다.
그의 발언은 1997년 이후 2번째 발언으로 그는 미국 부통령 출신으로 미국 극비정부문서를 접근할 수 있는 신분이었으며
극비문서를 통하여 구한말 미국이 한 짓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야기 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조선은 이성계의 건국이후 고려의 인쇄문화를 충실히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켰으며 계미자(1403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 등 전성기 조선의 활자는 고려의 ‘상정예문’ 이래 200년 가까이 실험을 거듭해 탄생했다.
반면 구텐베르크는 1455년 성서 인쇄에 성공할 때까지 고작 10년을 투자했을 뿐이다. 조선 활자가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 창작품인 반면, 구텐베르크는 어느 날 갑자기 세계적인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가 중국의 교니 활자나 조선 계미자 등으로부터 영향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의 목판 인쇄술이 널리 유럽까지 전파된 것과 달리, 활자 인쇄술은 아랍에도 닿지 못했다. 14세기 초 페르시아의 대재상인 라시드 에딘의 ‘역사집성’을 보면 목판 인쇄술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을 뿐 활자 인쇄술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아랍에 닿지 않았다면 독일에 중국의 활자 인쇄술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가 조선 활자를 만났을 가능성은 없을까. 조선 활자 인쇄의 전성기는 15세기 초반으로 구텐베르크보다 20∼30년 앞선다. 당시에는 해상 실크로드가 활발했고 조선은 명나라와 티무르, 위구르를 거쳐 유럽까지 사신을 보내고 무역 교류를 했다. 활자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런 교류 사실을 토대로 영국의 허드슨은 그의 저서 ‘중국과학사’에서 “한국의 금속활자가 볼가 강을 넘어서 서양에 전파됐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학자도 있지만 19세기 서세동점은 세계사적인 변화와 자본주의 첨병이자 제국주의의 리더국가인 영국을 중심으로한미국,프랑스,독일,일본,중국의조선의 의 분할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발명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구텐베르그는 좋은 친구 덕분에 최고의 장사아이템을 얻었고 그는 로마교황청에서 보낸 사절단의 일행이 조선을 방문하여 얻어간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알파벳으로 바꾸어 크게 히트한 것이 구텐베르그 금속활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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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은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임시직으로 일하던 한국인 박병선(1928~2011) 박사가 도서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11일 개막한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를 계기로 새로운 증언이 나오고 있다. 이 전시에서 ‘직지’를 50년 만에 일반에 공개한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3일 “1952년 ‘직지’를 기증받기 이전부터 이 서적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도서관 측이 세계 최고 금속활자 인쇄본이란 사실을 모르고 방치하던 유물을 박병선 박사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이날 본지 질의에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1853~1924)가 직지를 구입해 프랑스에 가져갈 때부터 금속활자로 만든 가장 오래된 책임을 알고 있었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될 때도 ‘금속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소개했다”고 했다. 그리고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이 1901년 펴낸 ‘한국 서지’에도 직지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언급이 있다”며 “그때부터 직지의 존재와 (직지를 만드는 데) 사용된 기술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틈만 나면 서고를 뒤져 먼지 쌓인 서고에서 ‘직지’를 발견했다.”
생전 박병선 박사는 본지를 포함해 여러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암 투병 중이던 2009년 병실 인터뷰에서 그는 “6·25전쟁 직후 프랑스에 건너갔다. 애초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취직한 것은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직지를 먼저 발견했다”며 “고활자본을 해독하기 위해 백지 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활자를 직접 만들어 찍어보다 세 번이나 집에 불을 낼 뻔했다는 언급도 있다.
국내 서지학자들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도서의 가치를 알고 귀중본으로 관리해왔기 때문에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발견’했다는 건 과장을 넘어 왜곡”이라고 말했다. 직지는 1377년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됐다.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플랑시가 조선에서 구입해 프랑스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프랑스 경매에 나온 직지를 수집가 앙리 베베르(1854~1942)가 매입했고, 1952년 베베르의 상속자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한국학 학자인 고(故) 다니엘 부셰 박사에 따르면, 경매시장에서 직지가 앙리 베베르에게 팔린 후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직지의 세계사적 가치를 알았고, 도서관장이 세 번이나 베베르를 찾아가 팔거나 기증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사후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상속자가 이를 지킨 것”이라고 했다.
직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건 본지 특종 보도였다. 1972년 5월 28일 자 1면 머리기사로 보도된 ‘고려 금속활자본 직지심경 세계 최초 공인’ 기사다. 신용석 당시 파리특파원은 “유네스코가 ‘책의 역사’ 종합전에 새로 발견된 고려 ‘직지심경’을 전시함으로써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이) 공인됐다”고 썼다. 이 기사에 박병선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 전 특파원은 통화에서 “평소 친분을 쌓았던 도서관 동양문헌실 책임자 마리 로즈 세규이 여사로부터 ‘한국에서 오래 전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이 전시된다’는 얘기를 들었고, 열흘 뒤 세규이 여사가 수장고의 귀중본 보관소에서 장갑을 끼고 책을 직접 보여줬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직지 대모(代母)’의 신화가 만들어졌을까.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실장을 지낸 황정하 사무총장은 “1996년부터 박병선 박사를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직지는 내가 찾았다고 하지 말라’고 본인이 얘기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고, 본인이 부각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언론에서 물으면 그냥 씩 웃고 대답을 안 했다. 기자들은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직지 대모’라고 계속 썼다. 말년이 되면서는 본인도 자신이 발견했다고 굳게 믿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박병선 박사는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일주일에 15시간 일하는 임시직으로 근무했다. 도서관에서 그의 역할은 사서들의 한국 관련 자료 정리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가 끝난 후 그는 동료 직원에게 부탁해 인화한 직지의 흑백 사진을 가지고 12월 17일 한국에 왔다. 당시 강주진 국회도서관장 등 3인이 사진을 감정했으나 의견이 서로 달라 금속활자본이라는 명확한 근거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다. 12월 27일 관련 학자 20여 명이 국회도서관장실에 모여 ‘직지’ 사진을 재감정했고, 이 자리에서 금속활자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 2021년 ‘직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펴낸 황 총장은 “박병선 박사의 공은 원본 크기 사진을 가지고 와서 국내 서지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발판을 놓은 것”이라며 “이제라도 잘못 알려진 진실은 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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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하권(下卷)
이양우
청주 흥덕사에서 쇠북을 울리며
1377년 7월 간행한 직지
역사의 빛으로 탄생하나니
총 38장 1책의 직지 하권
세상 천지를 다 둘러보아도
단 1권의 불조(佛祖) 가르침
용광로에서 녹인 쇳물로 주조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 직지
대웅전 연화문 열고 삼배
석탑 탑돌이 소원을 빌고 빌어
주자소의 뜨거운 활자에
유연 먹물을 칠하여
천년 한지에 찍어 간행된 직지
프랑스 도서관에 보관된
민족의 자부심을
박병선 박사가 찾아낸 집념
2001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천지 자연 속에 기운이 넘치네
세계 인류문명에 이바지한
인쇄의 창조적 선구자
지구촌의 풍요한 생활을 이룬
직지는 영원하리라
고려인의 문화예술이 숨 쉬는
문화 강국 대한민국
직지의 꽃은
세계 문화에 찬란히 빛나리